메뉴 건너뛰기

close

 청백리의 삶을 산 조선시대 문인 박수량의 묘와 비.
청백리의 삶을 산 조선시대 문인 박수량의 묘와 비. ⓒ 이돈삼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출판기념회 '쓰나미'가 휩쓸고 가더니 이젠 예비후보자들의 선거사무소 개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이때마다 느끼는 건, 예비후보자들이 '보통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약력을 보면 그렇다. 지금까지 한 일도 많고 감투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썼다.

그러나 약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일을 참 많이 했고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게 사실이다.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다. 의정보고서의 치적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사업을 놓고 구의원도 시의원도, 구청장도 시장도, 국회의원도 하나같이 '내가 했다'고 자랑을 한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같은 말이라도 정치인들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하면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돼 버렸다. 말도 상충되기 일쑤다. 어느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이는 열심히 일을 해놓고도 스스로 떠벌리고 다니며 노력의 대가를 까먹기도 한다. 가만히 있으면 모두 인정을 해줄 만한 일까지도….

자화자찬을 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인정을 해주는 건 결코 아니다. 앞에서는 끄덕일지라도 뒤돌아서면 혀를 차곤 한다. 진정한 인정은 내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알아줄 때 받는 것이다. 여러 사람에게 인정받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름이 회자되고 또 후세에까지 남게 되는 법이다.

 '박수량 백비'를 찾아가는 길. 입구에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박수량 백비'를 찾아가는 길. 입구에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 이돈삼

 박수량의 묘 옆에 서 있는 안내판. 박수량의 청빈한 삶과 백비의 유래에 대해 씌어 있다.
박수량의 묘 옆에 서 있는 안내판. 박수량의 청빈한 삶과 백비의 유래에 대해 씌어 있다. ⓒ 이돈삼

당대에는 물론 후세에까지 진정으로 인정받는 선비가 있었다. 요직을 두루 거쳤음에도 청빈한 삶을 살아 온 박수량(1491∼1554)이다.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출신의 박수량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으로 23세에 진사, 35세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관직생활은 39년 동안 계속됐다. 예조, 형조, 호조, 병조. 한성판윤, 전라감사, 좌찬성지중추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박수량은 또 효자였다. 그는 관직생활 중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고향에서 가까운 고부군수로 임지를 옮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관직을 버리고 3년 동안 상례를 지냈다. 어머니가 병환을 얻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임금께 사의를 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담양군수로 내려와 가까이서 병간호를 했다. 어머니 사후엔 3년 동안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생활했다고 한다.

그에 얽힌 일화도 전해진다. 나라에는 충성, 부모에 효도를 다하는 그의 고매한 인품이 어쩌다 임금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명종은 사실 확인을 위해 암행어사를 두 차례나 보냈으나, 돌아온 대답은 변변한 집 한 채 없이 청빈하게 살고 있다는 얘기가 전부였다고.

 청백리의 삶을 산 조선 중기 문인 박수량의 묘와 백비.
청백리의 삶을 산 조선 중기 문인 박수량의 묘와 백비. ⓒ 이돈삼

 '백비'가 서 있는 박수량의 묘 전경.
'백비'가 서 있는 박수량의 묘 전경. ⓒ 이돈삼

박수량은 39년 동안 고위관직에 있으면서도 사사로이 재물을 취하지 않았다.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살았다. 그가 죽은 후 남긴 유품은 당시 명종이 하사했다는 술잔과 갓끈뿐이었다고 한다. 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역사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인 만큼 믿을 수밖에.

요즘 말로 오랜 세월 고위 공직에 몸을 담았음에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접대도 안 받고, 뇌물도 안 받고, 부정한 뒷거래도 없이…. 그러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유언으로 고향에 장사를 지내되 묘를 너무 크게 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했을 정도라고.

오죽했으면 그가 죽은 후 장례비용이 없었단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명종 임금이 장례비용을 하사해 장례를 치르고 서해안 바닷가의 돌을 골라 비를 하사했다는 것이다. 그 비(碑)에 비문(碑文)을 새긴다는 게 오히려 그의 생애에 누가 될까봐 후손들이 묘 앞에 그냥 비를 세워뒀다고 전해진다.

하긴 눈부신 업적을 남긴 사람의 공적을 요약하기란 쉽지 않다. 어설픈 글로 찬양하는 것이 오히려 누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요즘 예비후보자들처럼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생애에 누가 될까봐 묘 앞에 그냥 세워둔 백비.
오히려 그의 생애에 누가 될까봐 묘 앞에 그냥 세워둔 백비. ⓒ 이돈삼

그래서 백비(白碑)다. 비석이 하얗다. 사방에 글자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충 세워놓은 것도 아니다. 비석은 잘 다듬어져 있다. 단지 글자만 없을 뿐. 평범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범상치 않은 비석이다. 비석의 크기는 대략 높이 130∼140㎝, 폭 40∼50㎝ 정도 된다.

안내판에는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한 박수량이 죽은 뒤 나라에서 내린 것으로, 직사각형의 대석 위에 호패형의 비신을 올리고 비문의 내용을 새기지 않아 백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적혀 있다. 전라남도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돼 있다.

보잘것없는 공일지라도 크게 치장하는 게 요즘 세태다. 그런데 이름 하나 남기지 않았다는 게 더 귀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결국 그는 이름을 만세에 남긴 셈이 됐다. 그는 청백리의 상징적인 존재가 됐으며, 벼슬과 공적은 물론 이름마저 새기지 않은 백비는 청백리를 상징하는 유물이 됐다. 요즘 공직자와 선거를 앞둔 예비후보자들이 본받아야 할 삶이다.

 필암서원에 핀 매화. 청빈한 삶을 산 박수량의 고고한 인품을 닮았다.
필암서원에 핀 매화. 청빈한 삶을 산 박수량의 고고한 인품을 닮았다. ⓒ 이돈삼

 조선 중기 문인 박수량의 묘 전경. 앞으로 황룡 들녘이 펼쳐진다.
조선 중기 문인 박수량의 묘 전경. 앞으로 황룡 들녘이 펼쳐진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 '박수량의 백비'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 있다. 필암서원과 홍길동테마파크를 지나 만나는 마을 뒤, 산자락 햇볕 따사로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백비#박수량#청백리#장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