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신이 인간에게 귀를 선사한 이유
날씨가 을씨년스럽습니다. 연둣빛 봄날의 시간은 사금파리처럼, 우리의 영혼을 스쳐가고 뿌연 황사와 때 아닌 폭설이 내리는 요즘, 이런 저런 생각이 듭니다. 자연이 어디가 크게 아픈 건 아닌지, 성경 속 지구의 지축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는 선지자들처럼, 제가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몸이 무거워 일찍 집에 왔습니다.
글을 쓰기 전,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고 주위를 느껴봅니다. 우리의 시각체계에선,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육안과 심안, 영안이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범부의 수준에 머문 생의 이력으로선 깊음의 세계를 맛보고 느끼기란 쉽지 않습니다.
재작년, 모 미술관에서 시각장애인 체험 프로그램을 잠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온통 깜깜한 방 안에서, 촉지능력과 동물적 듣기 능력을 통해서 길을 빠져나가야 하는 경험은 독특한 시간이었죠. 눈을 감는 순간, 깨닫는 일면은 얼마나 내가 시각적 풍경 속에 매몰되어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감이 있어 축복이라고 하지만 시각은 그중 가장 큰 비중을 갖고 우리를 지배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눈으로 확인하고 입으로 토설된 이론을 정당화해온 인간의 역사는, 바로 시지각에 종속된 인간의 단면을 설명합니다.
눈을 감는 순간, 끊임없는 존재에 대한 의심이 되살아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적이거나 답답해지는 것은 아닐겁니다. 청각이 시각보다 무서운 것은, 자의적으로 차단할 수 없는 열린 신체기관이기 때문이지요. 들음으로써 우리는 사물의 형상과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관음(觀音)을 통해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듯 들음으로해서 볼 수 있게 되는 능력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능엄경에는 듣는 것을 수행하여 제2의 눈을 만들라는 말이 나옵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가톨릭 또한 '들음의 훈련'을 위해 묵언수행을 합니다. 최근 법정스님이 '언어(말)의 빚을 지지 않기 위해' 책을 절판하라 부탁하셨습니다. 속세의 인간들은 무소유의 정신을 배우기보다, 책을 소유하려 열을 올렸지만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법정스님의 말을 인용합니다. "홀로 있으면 귀가 열린다. 내 안의 소리 사물이 소곤대는 소리, 때로 세월이 한숨 쉬는 소리, 듣기는 곧 내면의 뜰을 들여다 보는 일이다"라고요. 기도 또한 결국 '신의 음성을 홀로 듣는 일'이니, 들음은 '보는 능력'보다 영혼의 촉지에 더 큰 반향을 실어내는 듯 합니다.
작가 고동현이 연필로 아련하게 그려낸 귀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봉은사에 대한 정치권의 외압으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기자의 질문에 '노코멘트'로 일관, 품새가 영 마뜩찮은 '묵언수행'에 돌입했다지요. 그런데 저는 언론이나 누리꾼이 갖다붙인 이 '묵언수행'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아립니다. '묵언수행'은 말의 빚을 지지 않기 위해, 듣기에 정진하며, 들음으로써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아닐까요?
묵언수행이란 듣기에 내 영혼의 껍질을 벗고 던지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타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눈을 감은 채, 영혼속에 울리는 '억울한 이들의 슬픔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죠. 그래야 묵언수행입니다. 그 과정에서 내 죄가 보이고, 내 슬픔의 둔덕이 그려집니다.
아울러 안상수 의원에게 부탁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세요. 참 안쓰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