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와 폭설과 강우가 끊이지 않아 기온이 낮고 일조량이 적어 소빙하기(小氷河期) 같은 수상한 봄날의 연속이다. 섬진강변 양쪽 길에는 매화와 산수유, 개나리가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투어 피더니 꽃시샘 바람에 입술을 파르라니 떨며 꽃잎을 떨구고 있다. 사열식을 하듯 줄지어선 벚나무도 꽃망울을 내밀고 있으나, 꽃샘추위에 감히 터트리질 못하고 있다.
구례와 하동에서는 벚꽃 개화기에 맞춰 4월 첫째주말로 축제일정을 잡아 놓았는데 꽃이 피지 않아 낭패인 모양이다. 사람의 힘으로 자연을 거스를 수 없는 노릇이니 무심한 하늘만 쳐다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있겠는가? 꽃 없는 축제장에 상춘객의 발길은 줄고, 대신 가설상가에서 요란스레 유행가만 울려 퍼진다.
겨우내 메말랐던 강물은 봄철의 잦은 비에 제법 살을 찌워 하얀 뱃살을 드러낸 채 햇살에 반짝이며 강바닥에 깔린 암반을 핥고 흐른다. 섬진강은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원신암 마을의 데미샘이 발원지이다. 산골짜기 조그만 샘에서 시작된 물길은 임실과 순창을 지나면서 계곡과 하천에서 흘러드는 물을 다 받아 안고 내려와 곡성군 오곡면 압록에서 보성강과 합류하면서 강다운 모습을 갖춘다.
보성강과 합류한 섬진강은 구례분지를 거쳐 지리산 피아골, 쌍계사 계곡에서 흘러드는 물을 만나 강폭을 넓히고 그 깊이를 더한다. 한결 푸르러진 강물은 화개장터 앞에 넓게 펼쳐진 금빛 모래톱을 숨죽여 지난 후 경남 하동까지 80리 길을 따라 광양만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대 정들었으리.지는 해 바라보며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깊이깊이 잦아지니그대, 그대 모르게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중 략 -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돌아오는 저녁 길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눈 익어 정들었으니이 땅에 정들었으리.더 키워나가야 할사랑 그리며하나 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그대 야윈 등,어느덧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김용택 作「섬진강 3」부분)강은 이렇게 태고 적부터 골짜기를 돌아 평야를 지나고 강줄기를 형성한다. 줄기마다 포도송이처럼 마을을 매단 채 유구한 세월을 흘러오면서 문명을 만들고 있다. 강기슭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강과 함께 삶을 영위하고, 강이 생활의 터전이 되어 정을 붙이고 산다.
어릴 적 동무들과 물장구를 치며 물고기를 잡고 모래톱에 두꺼비집을 짓던 그 옛날 강의 모습은 많이 변했으리라. 하지만 그 기억속의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 눈 익어 정들었을 강마을 사람들은 저녁 어스름에 하나 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를 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일 것이다.
이 강을 따라 '토지(土地)'와 같은 대하드라마가 탄생하고, 수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풍광이 수려한 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은 '나는, 내 문학은 그 강가 거기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랐고, 거기 그 강에 있을 것이다. 섬진강은 나의 전부이다.'고 말하고 있다.
비단 섬진강만이 아니라 모든 강은 그 강을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린시절의 추억과 삶의 애환이 서려 있을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강을 '4대강 살리기'란 미명하에 송두리째 생채기를 내고 있으니, 그 강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저밀 일인가?
정부에서는 생태계 복원의 일환으로 섬진강에도 233억원을 투자하여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샛강을 정비한다는 계획이다. 섬진강 수계의 오염원을 제거하고 생태하천으로 복원하여 맑은 물을 공급한다니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그 동안의 하천 복원사업이 대부분 시멘트로 포장된 생태계 파괴행위여서 이 또한 그와 같지 않을까 우려된다.
기왕에 마련된 사업이니 장구한 역사를 거쳐 형성된 강의 모습은 온전히 보전한 채 물만 정화되기를 바랄 뿐이다. 홍매화 잎이 바람에 날려 눈송이처럼 강에 내린다. 국토의 생명줄인 강은 세월을 따라 유유히 흐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