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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여인의 속살처럼 고왔다. 저만큼 손을 뻗어도 잡힐 것 같은 달빛은 마알간 은가루가 묻어날 듯 고왔다.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은 탓에 먼지 한 점 없는 대기 속으로 달빛이 잦아들자 어두운 마음 자락에 숨어든 생각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달빛이 무한하게 비추는 것처럼 천지는 고요의 바다에 젖어 무심히 흘러갔다. 그때 무언가 미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호흡이었다. 그 소리는 끈끈한 물기가 어린 평범하고 지극히 단조로운 하나의 소리였다.

꿈이었다. 그것은 꿈이었다. 감미로운 냄새가 입안 가득 머금어지며 따사로운 손길이 다가왔다. 결코 사대부 집안에서는 맡을 수 없는 이상한 따뜻함이었다.

이곳 재동(齋洞)은 풍양 조씨를 제외하곤 그런대로 김문(金門)이 자릴 지키고 있었다. 지난 날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한명회라는 모사의 계책을 좇아 단종이 누님 경혜 공주의 집에 간 틈을 타 충신들을 참살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계유정난(癸酉靖亂)이다.

수양대군은 병사를 이끌고 좌의정 김종서를 습격해 일가족을 살해하고 영의정 황보인 등을 궁으로 불러 궐문에서 죽인 후 시체를 거리 곳곳에 매달았다. 당시의 대학살로 피비린내가 코를 찔러 그 냄새를 잡고자 온 동네에 재를 뿌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동네를 잿골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한자로 재동(齋洞)이 됐다. 지금의 창덕여고가 들어선 곳은 조선 중기 이후 '7대 판서 터' 또는 '풍양 조씨 터' 등으로 불렸는데 6대에 걸쳐 정2품 이상의 관직이 서른 명 이상 배출된 명소다.

동네는 조용했으나 기품 있었고 불어오는 바람이나 비오는 뜨락이나 공산명월을 휘젓는 달빛에도 격조와 품위가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래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은 '격'의 도움을 받았고, 그것이 가문의 위상을 나타내는 중요한 가늠대였다. 그곳 중앙부에 자리잡은 김진사 집도 이러한 '격'의 위세가 있었다.

"부인, 내일은 무엇이 좋겠습니까? 달빛이 고우면 풍월지선생(風月之先生)이 돼 부인의 마음 자락에 스며들 것이고, 비 오면 진흙속의 벌레가 되어 부인의 은밀한 곳을 찾아들겠소."

간밤의 약속이 그런 것일까. 사내는 고운 달빛을 벗 삼아 여인의 방을 찾아들었다. 자신의 아내를 찾아가는 길이지만 언제나 같은 방법을 쓰지 않았다. 하루는 도둑과 같은 방법으로, 하루는 선비다운 풍모로, 또 하루는 지독한 풍류객으로···. 하루하루의 날들은 늘상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 생기있게 타올랐다.

두 사람에겐 늘 그들만의 비밀이 있었다. 오늘은 도둑괭이처럼 두건을 쓰고 찾아가는 길이지만 살금거리는 호기심과 조바심이 가슴 한쪽에 있었다. 중문을 벗어나 몇 그루의 향나무 있는 곳에 다다라 나무 사이에 숨겨 놓은 두건을 꺼낼 때였다.

"너는 하는 짓이 어찌 그 모양이냐. 제 방을 찾아가는 데 도둑괭이처럼 살금거린 이유가 무엇이냐?"

형이었다. 재동의 김진사(金進士) 큰아들 김상운(金尙雲)이라면 인물 좋고 학문 잘하기로 근동에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다. 그는 고려의 선비들이 즐겼던 각촉부시(刻燭賦詩)를 좋아 했다. 촛불을 켜고 금을 그은 후 거기까지 타들어올 때까지 시를 짓는 놀이는 학문 하는 선비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영역이었다.

시회를 열었다 하면 단번에 장원을 꿰찰 실력이니 그에 대한 소문은 장안 사대부가의 규수들 마음 자락을 흔들고 남았다. 그에게 시집 온 것은 그의 아비의 동문수학이던 박 선비의 따님이었다. 이상하게도 큰아들의 결혼생활은 톱니가 어긋난 듯한 분위기여서 집안사람들도 이유를 몰라 의아스러워했다.

"얘야, 요즘 네 서방이 너와 소원한 듯하니 그 이유를 모르겠구나. 너희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그런 일 없습니다."

큰 며느리는 아무 일 없다 했으나 큰아들의 파행은 알게 모르게 이어졌고 해가 지나면서 그것은 새로운 걱정거리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보니 큰아들은 혼인한 지 다섯 해가 다 돼 가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어 집안 분위기까지 냉랭하게 만들었다. 그런 걸 모를 리 없건만 김상운은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며 집안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그런 형이 과거를 앞두고 며칠간 보덕암(普德庵)에 가서 심신을 수양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떨구자 식구들은 이제야 철이 드나 싶어 희색이 만면이었다. 바로 그 걸음이 중문을 지나던 동생 상헌(尙憲)과 맞닥뜨렸다.

"너는 무엇이 그리 바쁘냐? 하긴 너 같은 효자라도 있어야 부모님이 안심할 터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마음 먹은 대로 되더냐?"

상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로 흘리며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다음날 저녁, 시각이 술시(戌時) 어림에 이르렀을 때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상헌의 몸이 발견됐다. 지금의 사당동과 과천시를 잇는 호현(狐峴)이라는 남태령(南泰嶺)에서였다. 예전엔 이 고개에 여우가 많아 근방 관악산 일대는 여우 천지였다. 그러던 것을 지금의 관악구 봉천동에서 태어난 강감찬 장군이 크게 노해 다시는 고개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꾸짖은 뒤 여우들의 극성은 구경할 수 없게 됐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보덕암은 이곳 고개에서 연주암 쪽으로 오르는 중도에 있었다. 길을 지나던 장사꾼이 고개 중간에서 상처입은 상헌을 발견하여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근방에 도적떼가 득세했으므로 이 일은 관아에 보고돼 관원들의 방문을 받았다. 상헌을 찾아온 정약용은 상처 등을 훑어 본 후 몇 가지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김 선비께서 도적을 만나 물건을 빼앗기고 이렇듯 상처까지 입었다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말하기 싫다 하여 잠잠해 질 수 없으니 번거롭더라도 사실대로 말씀하십시오."

상헌은 짜증부터 냈다. 자신이 그런 지경에 빠진 건 운수가 나빠서지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관원 나으리의 노고를 모르는 건 아닙니다. 알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요. 나는 할 말 없으니 그냥 돌아가십시오."

정약용은 말이 통하지 않은 탓에 부득이 그 자리를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상헌씨의 흉부(胸部)를 찌른 칼은 모양이 여느 것과 달랐다. 끝이 뾰족한 날붙이가 아니고 초승달(☽) 형태의 상흔을 남겼다. 칼의 용도는 가정집이나 음식점 등에서 쓰는 게 아니고 칼끝이 이런 모양을 이룬 건 무엇을 새길 때 사용하는 조각도였다.

'가만, 이런 조각도를 흉기로 쓴 걸 어디서 본 적 있는데?'

정약용은 한동안 그것만을 생각했으나 가닥을 찾지 못하자 관아로 돌아왔다. 그는 두 해 전에 있었던 미제(未濟) 사건의 조사기록을 펼쳤다. 범행으로 추정된 인물은 흔히 올빼미라 부르는 강변칠우(江邊七友)였다.

그들은 어수선한 시기에 공부 대신 엽색(獵色)을 목적으로 부녀자들을 연쇄적으로 성폭행 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세 해 전에 있었던 이상용(李喪用) 대감의 애첩을 건드린 사건은 두고 두고 장안에 이야깃거리로 남아 강변칠우의 이름을 세간에 널리 알렸다.

살아 생전 치국을 빌미로 재물을 쌓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속셈으로 여기 저기 땅을 사놓았는데 그것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 이가 드물었다. 이상용이 모란(牡丹)이란 애첩과 단꿈에 젖어 있을 때 강변칠우라는 올빼미가 침입했었다.

얼마나 대담한 놈이기에 영감이 잠을 자는데 그곳에서 모란과 사랑놀이를 즐겼겠는가. 잠에서 깨어난 이상용이 소리 질러 아랫 것들을 부르자 그의 가슴에 조각도를 안기고 유유히 사라진 인물이 강변칠우였다.

검안서에 그려진 형태가 반달이었다. 이상용이란 인물이 세상의 지탄을 받았으므로 사건은 시간을 끌지 않고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조각도를 흉기로 쓴 흉한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정약용은 그 점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검시기록을 점검하던 정약용의 시선에 거치적거리는 건 공덕암(功德庵)이란 암자에서 일어났던 치정 사건이었다. 이곳에는 수인(垂仁), 수연(垂淵), 수명(垂明)이란 세 비구니가 아랫동네를 탁발하며 신도들을 끌어 모으며 암자를 운영했다. 가장 연장자는 수인(垂仁)으로 스무 살 남짓으로 뵈는 두 여승과는 달리 예순이 넘어 뵈는 중후함이 있었다. 한때 포교활동을 통해 그의 법술이 부녀자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자식 낳는 비방을 깨우친 그들의 도움으로 공덕암이 생겼다.

아마 다섯 달 전이었을 것이다.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지평 벼슬에 있는 김찬우(金燦憂)의 다급한 연락이 전해졌다. 그의 조카 김규수가 극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은 일이 벌어졌다. 고향 음성에 있을 때도 몸이 약해 약봉지를 몸에 달고 살았던 터라 새삼스럽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 한양의 솜씨 좋은 의원들이 있는 곳으로 와 건강을 회복하겠다는 생각이 바뀐 탓인지 하루아침에 독약을 털어 넣었다.

김찬우는 죽음을 자초한 이유가 궁금했다. 연락을 받은 송화가 세세히 검사했지만 타살 근거는 없었다. 김규수의 몸안 구석구석을 닦아낸 후 준비해간 법물(法物)을 입안에 찔러 넣자 법물은 순식간에 검게 변했고 항문에서도 피가 쏟아진 상태였다. 약간 부어오른 배를 눈여겨보며 송화는 검험을 마치고 정약용을 향해 돌아섰다.

"이 처녀는 지나친 교접으로 하복부에 상처가 심합니다. 생각해보면 도둑을 만나 겁간 당했거나 어느 몹쓸 인간을 만나 필설로 형언키 어려운 일을 당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이 이 처녀의 자살과 관계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체를 보면 양쪽 손목을 강하게 누른 흔적이 역력했다. 그녀의 물건 중에서 유서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숙부에게 죄송하다는 내용으로 자신의 허물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시형도(屍形圖)가 작성되자 정약용은 일행들을 데리고 공덕암을 찾아갔다. 그곳엔 행세깨나 하는 장안 부호들 아낙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기거하고 있었고, 그들은 주지 스님의 법술을 새삼 경탄했다.

주지 스님은 관원들이 닥치자 그들을 객방으로 안내하며 김규수의 자살 소식에 담담한 표정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목숨을 끊은 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여러분들이 보다시피 이 암자의 각 방엔 아미타여래의 소상(塑像)이 있습니다. 공덕을 올릴 때는 어느 누구도 나오거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밖에서 문을 잠그지요."

김규수가 머물렀다는 방 중앙엔 30센티 가량의 소상이 있고 그 중앙에 향을 사르는 향로가 있으며 오른쪽 구석에 간단한 이부자리가 놓여 있었다. 그날 이곳을 불심검문하여 찾아낸 것은 물건을 넣어두는 반닫이였다. 그곳엔 사내의 양경을 본뜬 물소 뿔로 만든 각선생(角先生)과 금전출납부 등이 있었다.

이날 관원들의 시선을 끈 것은 금전출납부 같은 책자 안에서 발견된 수십 장의 손수건과 그 옆에 있던 연월일시를 적은 원홍 수첩(元紅手帖)이었다. 이것은 김규수가 누군가에게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는 증거였다.

[주]
∎각선생(角先生) ; 사내의 생식기를 본뜬 물건
∎원홍수첩(元紅手帖) ; 처녀의 첫 경험을 기록한 수첩


#정약용, 추리, 명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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