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자식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만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우리 손주 손목 잡고 금강산 구경일세
꽃 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그 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내 청춘 다 갔네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푸른 하늘 푸른 산 푸른 강물에 검은 얼굴 흰머리에 푸른 모자 걸어가네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우리 손주 손목 잡고 금강산 구경가세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양희은 '늙은군인의 노래')
지난 5일 MBC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인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에서는 오프닝 멘트와 함께 '늙은군인의 노래'가 전파를 타고 전국에 메아리쳤다.
이날 이 방송은 아직 확인조차 되지않은 천안함 침몰사고 희생자와 한주호 준위, 남기훈 상사를 추모한다는 멘트와 함께 이 곡을 내보냈고 청취자들의 '깜짝 선곡'(?)이라는 의아함과 놀라움은 어느새 심금을 울리고 말았다.
이 방송을 들은 대부분의 청취자들은 잠시나마 마음속 깊이 천안함을 생각하고 고인들을 추모하며 한소절 한소절을 따라 불렀으리라.
다 같은 생각이면 오죽 좋으랴. 방송이 나가자마자 방송개혁시민연대는 즉각 비난의 화살을 던졌다. 이 단체는 "MBC라디오가 '늙은 군인의 노래'를 내보낸 것은, 천안함 침몰사고를 이용하여 MBC 노조파업을 간접적으로 홍보하고 나선 것"이라며 즉각 성명을 발표하고 비난하고 나섰다.
또 "노조가 김재철 사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총파업에 들어간 시점에서 운동권 가요를 오프닝곡으로 방송한 것은 그 저의를 의심케 하는 것"이라며 "이는 방송의 기본적인 공공성, 공영성을 상실한 것은 물론 국민의 보편적 시청권을 무시한 방송의 폭거"라고 강력 비난했다.
고 한주호 준위와 남기훈 상사를 추모한 '늙은군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그 의도가 MBC노조파업과 연관되었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노조파업 연관성은 둘째치고라도 방송개혁시민연대의 주장처럼 '늙은군인의 노래'가 정말 '운동권노래'(?)란 말인가?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독재의 사슬이 시퍼렀던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란 말인가. '진보'라는 단어 한마디에 빨간색 덧칠을 당하고, 말 한마디 잘못 했다고 끌려가며, 대머리가 대통령을 닮았다고 방송출연 금지가 되고, 책 표지에 빨간색을 많이 썼다고 판금을 당하고, 운동권에서 많이 부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금지를 당했던 그 시절인가.
민주화열풍이 거세었던 87년 대투쟁 당시 군중속에서 많이 불리웠던 노래를 꼽으라면 '동지가' '늙은 군인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노동해방가' 등이 떠오른다. 특히, '늙은 군인의 노래'는 무의미한 악곡이 노랫말과 만나서는 일정한 매듭과 질서를 부여하고 특히 장절식 노래의 후렴구는 악곡의 반복과 대조를 이뤄 최고의 단결을 이끌어주는 멋진 곡이었다. 부르기만 해도 온몸에 전의가 불타오르는...
노래가 내포하는 이데올로기와 투쟁을 알고 불렀던가? 힘없는 이들의 소망과 언어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고, 꼭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가인양 마냥 따라 부르던 노래들. '그렇다면 이 노래들이 모두 운동권노래였구나?'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영영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난 두 군인을 위해 바쳤던 '늙은 군인의 노래'가 방송에서 틀지 못할 운동권 노래라고 인정해 두자. 그렇다면, 수십여명의 군인이 희생된 이 슬픈 난국에 연일 춤을 추며 노래하는 '티아라'와 '소녀시대'의 노래들을 먼저 금지하라. 그리고 애절하고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민들레처럼'이라는 곡으로 컬러링이 흘러 나오는 내 휴대폰도 금지하라.
프로그램의 선곡은 담당PD와 작가의 고유권한이며, 운동권 노래 또한 선곡하지 못하라는법은 없다. 아니, <늙은군인의 노래>는 운동권노래가 아니다. 진심으로 두 군인의 영전에 바치는 추모곡이다. 다시한번 조국을 위해 온몸을 바친 두분께 '늙은 군인의 노래'를 바치며, 다시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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