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덧문이 맞물린 사이로 빛이 새는 걸로 봐서 날이 밝은 게 분명하다. 천장이 높은 실내는 한여름 낮의 온도를 낮추고, 유리창에 덧달린 두터운 나무창은 뜨거운 태양빛을 가려줄 것이다.
나는 남편과 아이를 깨우지 않고 홀로 나선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호텔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동안 발소리는 붉은 카페트에 조용하게 스며든다. 온통 짙은 마호가니 빛깔의 고풍스러운 호텔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터넷 삼매경에 빠져 있는 프런트 매니저는 어쩐지 어색해 보인다. 그는 의외로 레옹을 닮았다. 가벼운 아침 인사도 서로 주고받았다. 굿 모닝.
비가 내렸는지 골목의 바닥은 촉촉하게 젖어 있다. 햇살도 아직은 순하다. 뜨겁던 전날, 바글거리던 관광객들은 게으르게 꼭꼭 숨은 아침 시간이다. 작은 광장의 벤치에는 밤차를 타고 베네치아에 도착한 젊은 여행자가 커다란 배낭에 팔을 기댄 채 뭔가를 보고 있다. 아마도 물길이 복잡하게 그려진 베네치아 지도겠지.
좁은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물길이 나타나고 물길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가 나타나고 다시 골목, 물길, 다리, 골목….
물가에 천막 어시장도 섰다. 아침에만 반짝 서는 어물전이리라. 홀가분한 아침 산책이다. 챙겨야 할 가방도 없고 물통도 없고 딸린 가족도 없고 돈도 없고. 챙겨서 나온 것이라곤 오로지, 요즘 애들 핸드폰 화소만도 못한 400만 화소의 올림푸스 디카 하나.
골목 상점들의 유리창 너머에는 베네치안 글라스가 반짝거리고, 값싸고 질 좋은 가죽제품들이 관광객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화려하고 독특해서 눈길을 끄는 것은 카니발 가면들이다. 2월 카니발이 열리면 이곳은 화려한 의상에 각종 가면을 쓴 사람들로 넘쳐난다고 한다.
그 옛날엔, 한번 시작했다 하면 6개월 동안이나 카니발이 계속되었다니 르네상스 시절 상업 도시로 번창했다는 베네치아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다. 그때만큼은 온갖 금기와 차별로부터 해방되어, 내가 아닌 척, 귀족이 되기도 하고 교황이 되기도 하고, 은밀한 사랑이나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색상이나 금박이 화려하고 아름다울뿐 아니라 그 뚫린 눈은 깊이를 알 수 없어 한층 더 신비로운 베네치아의 가면을 하나 사지 못한 게 후회된다. 아직 가야할 길이 먼 여행자로서 가면을 모시고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또 우리나라처럼 전국 어디를 가나, 등긁개, 뿅망치, 나무 주걱 등 똑같은 기념품을 파는 것처럼 베네치아의 가면은 이탈리아 어디를 가도 흔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자주 볼 수도 없거니와 있다 해도 베네치아의 가면처럼 다양하고 아름답지 않았다.
여행에는 후진이 없다. 그곳에서 먹지 않고 그곳에서 보지 않고 그곳에서 사지 않으면 다시 기회를 잡기는 쉽지 않다. 전날 베네치아에 도착해,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을 보았을 때 우리나라의 조악한 여관건물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느꼈었다. 지방의 역 주변, 어설프게 서양 건축 양식을 흉내낸 러브호텔들 말이다.
그러나 아침에 다시 보니 새삼 느낌이 다르다. 물결이 찰랑거릴 때마다 이끼가 드러나는 건물들은 바래고 바랜 빛깔이 그윽하다. 벽 귀퉁이며 모서리가 낡을 대로 낡아 벽돌로 쌓아올린 흔적이 그대로 보이도록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빈티지가 따로 없다. 낡은 것이 주는 편안함, 오래된 것이 주는 안정감. 하나가 낡으면 지저분해 보이지만, 낡은 게 모여 있으면 예술이 되고 역사가 되고 사연이 된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빈티지가 유행이다. 사람들은 낡고 오래된 걸 좋아한다. 낡고 오래된 게 더 비싸고 구하기도 힘들다. 레트로 라디오, 레트로 선풍기, 레트로 전화기, 오래된 책, 오래된 도자기, 오래된 가구, 더 더 빛바래고 오래된…. 사람들은 모든 오래된 것에 값어치를 두고 열광한다, 딱 하나만 제외하고. 오래됐으면서도 그 가치로부터 소외된 유일한 것, 오래된 사람.
이즈음 부쩍 나이 들어가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과자 부스러기가 목에 켁켁 걸리게 되고, 자꾸 남의 일에 참견하게 되고, 버리지 않고 모으고, 생각과 나오는 말이 어긋나고, 도덕적인 덕목을 강조하고, 젊은 애들 유행 패션을 받아들이기 때로 힘겹다.
주변으로 밀려날까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스스로 자꾸 검열하는 작은 버릇들도 생긴다. 혹시 체취가 나는 건 아닐까, 주책을 부리는 건 아닌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은 아닐까, 무엇보다도 의식되는 건, 이중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은 건 아닌가.
뿐이랴. 슬그머니 비굴해지기도 한다. 굵고 짧게 살겠다던 패기는 어느덧 사라지고 가늘고 길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 핑계로.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게 현명하다고 부추긴다, 가진 걸 잃게 될까봐.
만일 내게 카니발 가면을 쓸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어떤 가면을 선택할까. 귀족도 왕비도 다 소용없다. 꽃 같은 청춘의 냄새가 폴폴 나는, 화장기 하나 없어도 싱그럽기만 한, 무엇이라도 두려움 없이 꿈꿔 볼 수 있는, 내 양심에 망설임 없이 순응하는, 덜 매끄럽고 덜 닳아빠진, 그런 젊음의 가면 하나면 족하다 싶다.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으로 혼자 실실 웃으며 서둘러 호텔로 돌아온 아침 산책이었다.
덧붙이는 글 | 2009년 8월, 2주 동안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