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러일전쟁,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아시아 각지에서 식민지 침탈을 위해 줄곧 남의 땅을 전쟁터로 삼았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 말기 태평양 전쟁의 격화 속에서 사이판 함락과 동시에 점차 수세에 몰려 본토 자체가 미군의 공습을 받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대본영(구 일본군 최고통수사령 기관)은 본토공습에 대비할 목적으로 주요 군사시설과 공장의 지하 피난을 계획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사례가 나가노현에 있는 마쓰시로 대본영이다.
일본은 주요 정부시설과 천황의 거처를 옮길 수 있는 비밀 갱도를 파기 위해 약 1만 명의 노동자를 동원했고, 그중 7천 명이 징용된 조선인이었다. 이처럼 정부시설 및 주요 군사시설과 공장을 안전하게 옮기고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비밀갱도 파기 작업은 일본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고, 군사도시 나가사키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3월 30일,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의 상황을 증언하는 잔존 구조물인 구 '미쓰비시 중공업 어뢰제작소 스미요시 터널 지하 공장'(통칭 미쓰비시 병기 스미요시 터널 공장)이 일반에 공개됐다. 나가사키시 스미요시쵸(住吉町)에서 아카사코 잇쵸메(赤迫1町目)까지 산 허리를 굴착해서 6개의 굴을 파낸 '스미요시 터널 공장'은 굴착 과정에서 적게는 800명, 많게는 약 1000명에 이르는 조선인 노동자가 강제동원됐다. 시가 주최해 만든 나가사키 시내의 공식적인 원폭피해 관련 유적으로는 전후 65년 만에 최초로 "강제적으로 동원된 사람도 있고"라는 표현이 굴 입구 안내판에 기재됐다.
미쓰비시 병기, '터널공장' 계획
일찍이 가톨릭 신앙 전파와 서구 문물 교류의 접점으로 번성했던 나가사키는 군수기업 미쓰비시를 중심축으로 군사도시화되면서 점차 전쟁의 광풍에 휩싸인다. 1944년 8월부터 나가사키도 미군의 공중폭격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이에 공장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 무기 생산을 계속하기 위해 미쓰비시 병기는 '터널 공장'이라는 지하 굴 형태의 공장을 계획한다.
높이 3m, 폭4.5m, 길이 300m, 약 12.5m 간격으로 줄지어 선 6개의 터널이 만들어진 것이다. 원자폭탄이 떨어질 당시 이미 완성됐던 1, 2호 터널 내에는 미쓰비시 병기의 직원과 노동자, 여자 근로 정신대, 동원 학도 등 약 1000명이 해군어뢰를 만들기 위해 주·야간 교대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은 나가사키 시내뿐 아니라 현 내외 곳곳에서 동원됐다. 3, 4호는 굴을 파는 작업은 완료돼 있었지만 아직 미사용 상태였다. 그리고 5, 6호는 조선인 노동자 800~1000명이 터널을 파는 공사에 동원되고 있었다.
당시 내각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첫째, 특히 긴급한 시설은 터널을 유용하거나 새로운 지하 시설을 건설하여 이설할 것, 둘째, 군관민을 종합적으로 동원하여 다른 사업보다도 우선적으로 행할 것, 셋째, 필요한 장소의 노동력은 관민의 조직적인 헌신을 강력하게 지도하여 확보할 것. '관민의 조직적인 헌신을 강력하게 지도'한다는 것은 강제적으로 노동력을 동원한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다. 따라서 '강력하게 지도'하기 위해 공장장은 군인이 맡았다.
나가사키에 있었던 공장들도 분산돼 옮겨졌으며 당시 어뢰를 만들고 있던 미쓰비시 병기 제작소도 오오하시 공장 기계 일부를 이 스미요시 산 중턱 터널안으로 옮겨 온 것이다. 일반 견학자에게 공개되기 시작한 스미요시 터널 보존현장의 안내판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터널 안은 버팀목도 콘크리트도 없이 바위가 드러나 있었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해군 소장이 공장장이었으며, 공장 안에는 작업을 감시하는 감시원이 있었는데 매우 엄격했다. 터널 앞쪽에는 기계를 놓고 작업을 했으며, 안쪽에서는 굴착 작업이 병행되어 발파 시에는 화약 연기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전시 중, 항구도시 나가사키에는 해군의 병기생산을 위한 미쓰비시의 공장이 모여 있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의 발단이 된 일본의 진주만 폭격 당시, 일본 해군이 사용했던 항공기용 91식 어뢰도 미쓰비시 병기 오오하시 공장(현재 나가사키 대학)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당시 미쓰비시의 무기 생산에 동원되었던 노동자의 연령은 대부분 10대의 소년, 소녀와 20대의 앳된 청춘이었고, 24시간 체제로 2교대 혹은 3교대 근무를 하며 월 평균 80개의 해군 항공기용 어뢰를 생산했다고 한다.
"싫었지만 일본에 가도록 강요당한 것"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발행한 <원폭과 조선인 제5집>(1991)을 보면, 양친과 형이 스미요시 터널 공사 현장과 그 부근에서 피폭을 당했다는 유금석씨의 증언이 실려 있다. 유씨에 따르면, 이미 고인이 된 부친 유영근씨는 1943년 한국에서 결혼해 그해 말, 징용으로 나가사키 터널 공사 현장에 이끌려 갔다.
그의 아내 석임순씨도 함께 나가사키로 왔다.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몇 달 전, 유금석씨의 형(장남)이 태어났고 세 가족은 다행히 생명을 구하여 해방 후 즉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유영근씨는 원자폭탄 피폭의 후유증으로 1972년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인 유금석씨(피폭 2세)도 "만에 하나라도 후세에 방사능의 후유증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석임순씨도 <원폭과 조선인 제6집>(1993)을 통해 2년 뒤, 생생한 증언을 술회했다. 1943년 11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석임순, 유영근씨 부부에게 현지의 경찰관이 낯선 일본인 한 사람을 데리고 찾아왔다. 그리고는 "일본에서 일할 사람을 모으고 있다. 터널을 파는 공사현장에서 일하면 20엔을 벌 수 있다"며 유씨를 채근했다. 석씨에게는 "목면으로 군인의 옷을 만드는 일을 하면 20엔을 준다. 일본에 가지 않겠나"라고 강권했다.
그러나 증언자 석씨는 "우리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일본행을 정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가지 않으면 남편 가족이 관청직원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 같아서, 절반은 싫은 기분으로 일본에 가도록 강요당한 것"이라 말했다.
석임순씨 등이 스미요시 터널 굴착 작업장에 왔을 때는 이미 터널 두 개가 완성되고, 세 번째 굴을 파고 있었던 시기였다. 석씨는 한국에서 올 때는 목면으로 옷 만드는 일을 한다고 듣고 나가사키에 왔다. 하지만 실제 그녀에게 맡겨진 일은 조선인 노무자들의 식사를 맡는 취사부였다. 그녀와 남편이 도착한 함바는 2층짜리 허름한 목조건물이었는데 말이 2층이지 2층은 다락방 같았고, 1~2층을 합하여 30~50명 가량의 조선인이 합숙하고 있었다. 옆에는 비슷한 구조의 함바가 또 2칸 있었으나 외부와는 교류가 금지돼 있었다고 한다.
석씨는 스미요시 터널 굴착 작업 현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자주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켰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터널은 확실히 산의 양측에서 파들어갔던 것을 아닐까요. 파진 터널이 국철의 기차의 창에서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큰 텐트를 쳐서 눈가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남편도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일본인 인부들이 (학도동원의 학생일지도 모름) 터널에서 옮겨낸 바위나 토사를 트럭에 싣고 레일 위를 달려, 넓은 도로와 철도 선로 사이에 있는 넓은 밭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 감독을 하는 사람은 매우 엄격한 태도로 명령을 하거나 지도를 했습니다."
조선인 노무자들은 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이 이미 패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 길이 없었지다. 하지만 미군이 공급이 격화됐으므로 공습경보와 경계경보가 자주 발령돼 그때마다 부근 방공호에 들어가고 나오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석씨는 함바 노동자의 식사를 준비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식재료가 나날이 궁핍해져 가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주식은 밀가루가 조금이고, 그다음은 대두박(콩깻묵)뿐으로 부식물은 대근, 소의 내장, 고등어 등이었다. 석씨는 때때로 산에서 남몰래 산나물을 따다가 그것으로 반찬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먹이기도 했다.
석씨는 1945년 5월 30일, 함바 안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남편은 터널 공사현장에 나가 있어서 혼자 출산을 했는데, 어느 날 아이에게 젖을 물리려고 가슴을 풀어헤치고 있자니
'나쁜 주인'(함바의 주인으로 추정됨)이 석씨의 가슴을 철봉으로 찔렀다고 한다. "지금도 그 남자를 죽여 버리고 싶다"라고 말하는 석씨. 그의 회상 속에는 이국 땅에 끌려와 자유를 잃고 굶주리며 성추행까지 당해야 했던 한반도 여성들의 분노가 담겨져 있다.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키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당시, 이곳은 폭심지로부터 2.3km 북쪽에 위치한 탓에 큰 피해는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터널 바깥에서 작업하고 있던 사람들은 강렬한 폭풍으로 날려가 부상당하거나 심한 화상을 입었다. 피폭 직후에는 미쓰비시 병기 오오하시 공장과 인근의 노동자 숙소에서 터널 안으로 많은 피난자들이 몰려왔다. 터널 내에서 작업했기 때문에 생명을 구한 이들은 나중에 오오하시 공장에 피폭자 구조 활동으로 동원되어 나갔다.
충청남도 출신인 김정기씨도 만 17세 무렵에 일본으로 강제연행 당해 이곳 스미요시 터널 굴착 공사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아카사코 잇쵸메 측에서 굴착한 돌을 옮기던 중, 원자폭탄을 만나 양손과 다리에 화상을 입고 허리에도 강력한 충격을 받았다.
65년 만에 스미요시 터널 공장 일반인에게 공개
전후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던 스미요시 터널 공장은 철책을 치거나 자물쇠를 채워 일반인의 견학을 금지하였으나, 약 3개월 전부터 65년 만에 일반에게 드디어 공개 견학을 허락했다. 일반에 공개된 날에 맞추어 한국인 원폭피해자 김종기씨가 나가사키를 방문했다.
1990년에도 한 차례 스미요시 터널 공장 터를 방문한 바 있는 김 할아버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함께 피폭을 당해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면 쓸쓸하고 슬퍼진다"(나가사키 신문 2010.3.31)고 회고했다. 터널 입구 설명판에 쓰인 "강제적으로 동원된 사람도 있고"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연행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강제의 의미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나가사키시에 있는 피폭 유적 안내판에 조선인 노동자에 대하여 '강제 동원'이라는 단어가 명기된 것은, 시민운동가들이 자비로 세운 '조선인 원폭희생자 추도비'를 제외하고는 이번이 첫 번째다. 원자폭탄 투하의 폭심지에서 가까이에 자리해, 전원이 즉사한 우라카미 형무소 나가사키 지소의 중국인이나 조선인 수형자(혹은 미결수)에 대해서도 그 유적지 안내판에 '강제동원'임을 확실히 표시하라는 나가시키 지역 시민운동가들의 줄기찬 요구가 있어 왔다.
나가사키시, 한국인 강제동원 인정 안 해
그러나 시 측은 거부로 일관하고 있다. 모든 인원이 강제동원이라 할 수 없고, 강제동원이라는 단어를 명기하면 우익의 테러 표적이 되며, 모든 안내판에 일일이 자세한 설명을 다 기재하는 대신 총괄적인 내용만 기재하면 충분하다는 것. 하지만 현지 시민운동가들은 스미요시 터널 공장 터 안내판에 애매한 표현이지만 "강제적으로 동원된 사람도 있었다"라고 명기한 것은, "명백한 증언과 자료가 남아 있어 (그 사실을) 회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가사키 원폭피해자 출신의 일본인 평화운동가들이 중심이 돼 결성된 '나가사키 증언모임'의 사무를 맡으며, 스미요시 터널의 보존 공개운동을 펼쳐온 모리구치 마사히코씨(71)는 스미요시 터널 공장 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국에 의한 일본의 원자폭탄 피폭 피해 사실을 전하는 유적이 아니라,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정책,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얼마나 큰 피해를 끼쳤는지 알고 반성하는 의미의 장소로서 메시지를 전파하는 곳이어야 한다. 비참한 전쟁의 이면에서 폭리를 취한 미쓰비시 중공 등의 군수산업의 전쟁책임을 돌이켜보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이곳은 조선인들이 끌려와서 굴을 파는 데 동원되었으므로, 조선인에 대한 언급과 설명이 더 보완되어야 한다.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이 장소를 남기고 보존하며,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서 견학해야 하는 이유다."
전쟁의 광풍 속에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수시설을 보호하고 무기를 더 안정적으로 생산해내기 위해 만들어졌던 비밀의 터널과 그곳에 동원됐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바로 국가가 국민과 식민지 백성에게 강제했던 '전쟁'이란 것이 결국은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것과는 무관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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