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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속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점점 더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신경질적인 인상과 목소리, 사사건건 못마땅해 하면서 쉬지 않고 퍼붓는 잔소리, 주위 모든 일이 꼬투리가 되지 않는 게 없다. 거기다가 공항 대합실은 금연 구역이니 담배를 피우지 못해 더더욱 안절부절못한다. 이러니 보는 사람도 당연히 따라서 짜증이 날 수밖에.

 

어머니는 딸, 며느리와 함께 미국 여행에 나섰다가 그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꼼짝 없이 공항 대합실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누군들 일부러 비행기를 놓쳤겠는가. 어차피 그렇게 된 것, 속이야 상하지만 그래도 서로 위로하면서 대책을 세우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모든 것은 딸이 꾸미지도 않고 화장을 안 해서 그런 것이고, 며느리가 쓸데 없는 짓으로 시간을 보내서 그런 것이다. 어거지라는 것을 어머니도 분명 알지 않을까? 그러나 자기도 자기를 어쩔 수 없는, 그런 단계에 이른 것 같다. 어머니는...

 

조기 폐경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딸, 남편과 아들에게 완벽한 아내이자 엄마가 되려고 발버둥치는 며느리. 각자 사는 일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데도 어머니는 딸이나 며느리의 고달픔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어머니 자신의 가슴 속 덩어리가 너무 무겁고 아프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내내 남편의 외도로 마음 고생을 했다. 비록 남편이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그대로 남아 돌덩이처럼 굳어져 어머니를 짓누르고 있는 것.

 

시간이 흐르면서 먼저 딸과 며느리가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게 되고, 결국 어머니의 마음도 엿볼 수 있게 된다. 어머니가 남편에게 꼭 한 번 듣고 싶은 말은 그래도 자신이 '여자'였다는 말이다. 다른 여자를 찾아 떠도는 남편을 옆에서 겪어내며 여자로서의 자존감이 완전히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을 어머니의 속내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말이 또 있으랴.  

 

그러니 치매가 시작돼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는 어쩜 스스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잘라내며 피 흘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연극 시작부터 지속되던 어머니에 대한 짜증은 어느덧 공감으로 바뀌고, 어머니-며느리-딸 세 여자가 서로서로에게 거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혈연 혹은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보다는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의 고단함이 나와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확인해서이다. 아니, 바로 내 이야기다.      

 

연극이 모두 끝난 다음 출연 배우 전원과 이 연극에 자문으로 참여한 정신과 전문의 두 명이 무대로 나와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졌는데, 놀라운 것은 관객들의 자기 개방성이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별다른 거리낌 없이 자신의 고민 혹은 어려움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 적극적으로 고민을 해결하려는 긍정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 며느리, 딸의 이야기를 통해 객석에 앉은 우리가 곧 어머니이고, 딸이고, 며느리임을 뼈저리게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의 짜증으로 남까지 짜증스럽게 만드는 어머니, 젊은 시절의 상처로 여전히 아파하는 어머니, 내 아픔 너무 힘겨워 옆을 돌아볼 수 없는 어머니, 기억마저 하나 둘 잃어가는 어머니는 머지 않아 만날 나의 얼굴이다.

 

그래서 어머니께 다가가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냐고, 어떻게 그 아프고 힘든 세월 살아오셨냐고... 

 

마지막 날 마지막 공연을 봤는데, 일요일 오후 나만을 위한 외출 자체가 내게는 모처럼의 신선한 휴식이었다. 평소 아무런 제약 없이 나다니는 처지라고는 해도, 일요일 오후에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빼다니...같이 간 친구와 나, '두 아내, 아내들의 외출'은 이른 저녁식사로 이어졌다. 오래도록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연극 <아내들의 외출> (박춘근 작, 박혜선 연출 / 출연 손  숙, 이선주, 소희정, 김문식)

* 이 연극은 '2010 정신 건강의 날 기념 연극'으로 지난 4/3-4/11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아내들의 외출#정신 건강#여성 연극#모녀#며느리 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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