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서른셋의 여름,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다. 국내 증권사에 재직 중이었고 심적으로 강하지 못해, 집에는 "정리해고됐다"는 떳떳하지 못한 보고를 해야 했다. 나에게는 그리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에 더할 나위 없는 무게를 더한 것은 엄마의 반응이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정말로 짤린 거 맞아?" 엄마의 되물음으로 어머니라는 존재의 초능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슬며시 눈을 피하며, "어, 맞아(말줄임)"라는 대답밖에는 할 수 없었다.
현실 상황을 벗어나서 추구하는 꿈이 남들에겐 책임감 없이 보일 수는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꼭 아프리카에 가고 싶었다. 회사에서 다루어야만 했던 싫어하는 그 숫자들 속의 삶은 내가 생각한 그림과는 너무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내 나이에 응당 있어야 할 위치, 결혼과 직장에서의 경력을 생각하기보다 아프리카를 가고 싶어 하는 열망이 더 컸다. 인생에 꼭 이뤄야 할 꿈 가운데 아프리카가 들어 있었고, 현실적으로 구상하던 중에 '결혼하기 전에는 꼭 다녀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원래 내가 정한 루트는 이집트가 시작이었다. 그러나 요르단의 페트라를 꼭 보고 싶었다. '그래, 그럼 페트라를 보고 이집트로 배를 타고 넘어가자'고 생각했다. 이스라엘도 거쳐 가고 싶었지만, 이스라엘 비자가 여권에 찍히게 되면 이집트 다음에 있는 수단에는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된다. 물론, 요즘은 여행자들을 위해 융통성을 발휘하여 별지에 찍어주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요르단-이집트-수단-에티오피아-케냐-우간다-탄자니아-잠비아-보츠와나-남아공'이 내가 완성한 루트였다. 예상 일정은 총 3개월이었으며 여정에 따라 연장도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결국엔 돈이 떨어져 6개월 만에 돌아왔다. 2009년 8월2일부터 2010년 1월 31일까지가 나의 아프리카 여정이었다. 그렇게 난 혼자 떠났다. 아프리카 종단 배낭여행이란 이름으로...
로마인들이 살고 있는 제라시아이러니하게도, 아프리카에 와서 처음 시간을 보낸 것은 고대 로마의 유적이었다. 요르단에 있는 '제라시'는 로마제국의 번성기 때 이루어진 옛 로마제국의 유적이다. 그때 지어진 도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요르단의 최대 관광지인 페트라 다음으로 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있어 외화 획득에 한몫을 하고 있으니, 로마제국에서 침략에 대한 보상을 후대에 해주는 것 같은 아이러니를 느낀다.
뙤약볕 탓에 인해 많이 지치고 늘어질 법도 했지만 제라시의 유적은 이국적인 느낌으로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어느 유적지나 그렇듯, 현재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그 모습으로 고대의 시간을 그대로 머금고 있다. 마차가 달리던 도로와 원형경기장, 신전 등, 어쩌면 제라시는 상상의 도시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묵묵히 침묵하는 도시 속에서 나는 홀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인상적인 그 원형경기장에서 많은 사람이 오밀조밀 모여서 무언가를 관람했던 것을 상상하며 그 당시 열광적인 축제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또 원형경기장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앉아서 이 유적도시 너머의 현재 도시를 바라보았다. 나무들 너머로 보이는 현재의 도시. 그리고 바로 옆에 존재하는 유적지의 돌과 기둥들…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옛 도시와 현재의 도시가 완벽하게 맞닿아 있었다.
굳이 눈을 감지 않아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말발굽의 소리도 들리고, 왁자지껄한 상인들의 소리도 들린다. 저 멀리 끌려오는 죄인들의 모습도 보이고, 이 모든 상상이 충분히 가능한 곳이다. 그로 하여금 전율이 느껴지기도 한다. 유적이란 과연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는 돌일 뿐일까. 아직 현재는 불완전하다.
사해 여행 대신 요르단의 아이들을 만나다사실 해외에서 호텔이라 함은 우리나라에서처럼 별이 몇 개가 있는지가 중요한 그런 장소는 아니다. 영어로 숙박업소 자체가 모두 호텔이니, 물론 나라마다 조금씩 용어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호텔', '롯지',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말이다.
배낭여행자 숙소가 몰려 있는 거리의 한 호텔에 도미토리룸을 잡았다. 침대 없이 매트만 쭉 나열되어있는 모습이다. 이 숙소에서는 한국 학생들이 장기숙박을 하고 있었다.
'인터넷해외청년봉사단'으로 파견된 네 명의 우리나라 젊은이들. 한국인들이 그리울 정도로 한국을 떠나온 지 오래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딱히 한국인들이라고 관심이 가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네 명이 한 팀으로 요르단 학교에서 현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원래 계획은 나와 같은 여행객을 물색해서 비용을 절감해, 함께 사해를 다녀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같이 갈 여행객을 구하지 못해 시간을 보내다가 아이들을 따라 학교에 갔다.
원래 일행이 아니어서 쭈뼛거리면서 들어서는데 황송하게도 한국 학생들은 교감 선생님에게 나를 '한국에서 온 포토그래퍼(사진가)'로 소개해 주었다. 눈빛만으로도 교감선생님은 '포토그래퍼 박'에게 호의적이신 듯했다. 무거운 카메라와 렌즈를 들고 다닌 보람이 있다.
"머리 좀 만져봐도 돼요?" "응, 만져봐~ 뽑지는 말고."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중력에 약해지는 내 머리카락이 걱정되어 요르단의 아이들에게 대답했다. 아이들은 자기들과 다른 나의 쭉 뻗은 머리카락이 신기한지 연신 만져 댔다.
"왜 이건 안하고 다녀요?" 아이들은 자기네들의 히잡을 가르키며 왜 안하고 다니냐고 물었다. 할 말이 없다. 사실대로 '무슬림이 아니어서'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당황한 나는 아이들에게 대답했다.
"응, 더워서."하루밖에 못 본 나에게 요르단의 아이들은 과분한 관심을 가졌고, 호기심을 반짝였으며 내일도 꼭 오라고 재차 나의 대답을 요구했다. 마지못해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사실 난 하루 빨리 페트라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방문한 날 학교를 비우신 교장선생님의 '내일과 모레도 와줄 수 있겠느냐'는 간곡한 요청이 무언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여행의 첫 나라인 만큼, 내 안은 에너지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바로 대답을 못하는 내 모습을 보고 한국 학생 중 아영이라는 친구가 "교장 선생님이 사진 찍고 싶으신가 보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내 부담감을 덜어주려고 했다. 사해 일정을 같이 할 여행자를 만나면 바로 내려갈 것이어서 학교에 오겠다는 '약속'은 하기가 좀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학교 방문으로 왠지 들떴던 나의 기대감이 충족된 느낌이었다. 우리 한국 학생들의 열정적인 모습에 뿌듯했다. 뭐랄까 내가 좋아하는 단면을 가진 아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그리고 적절히 건강하게 운용되는 느낌이랄까. 열정이, 더군다나 때묻지 않은 순수한 열정이 표출되는 모습은 그지없이 예뻐 보인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그 순간에 한국 학생들과 요르단의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참 잘 어울렸다.
사실 외교적 필요에 의해 정부차원으로 파견하는 사업에 크게 감동하진 않으나, 순수한 열정과 융화되면 꽤 보기 좋은 프로젝트가 되는 것 같다. '인터넷해외청년봉사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이들에게 포토샵이나, 플래시몹, 무비메이커를 활용해 영어로 가르친다. 꽤 수준 있는 커리큘럼이라고 생각했다.
'꾸리(요르단의 'Korea' 발음) 티처'들에 대한 아이들의 이런 인상은, 나중에 이 아이들이 커서 가질 대한민국의 인상이 좋아진다 생각하면 정말 소중한 봉사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이런 사명감에 자신들의 순수한 에너지를 다해 요르단 아이들과 같은 눈빛을 발산하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 이 여행기는 지난 2009년 8월부터 2010년 1월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