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안타까운 일들이 계속되는 요즘이다. 하늘도 가슴 아픈지 좀처럼 따사한 봄볕을 허락하지 않고, 야속한 찬바람이 계절을 점령한다. 달력의 날짜는 봄을 말하지만, 좀처럼 제 빛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봄날이 아쉽고 야속하다.
그래도 낮이면 조금씩 제 계절을 허락하지만, 해가 기울면 매정하게 시린 바람이 되어 속살을 파고든다. 이쯤 되면 몸도 마음도 헛헛함을 가눌 수 없다. 어린 시절 가졌던 '왜 어른들은 쓰디 쓴 술을 마실까'란 궁금증이 자연히 풀릴 수밖에.
그렇게 들이킨 몇 잔의 씁쓸함은 다음 날 텁텁해진 입맛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무언가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이것도 별로, 저것도 그저 그런 갈등의 연속. 그렇게 결국 점심시간을 넘기고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 며칠 전 오후였다.
많지 않은 반찬, 하지만 하나하나에 배어든 정성과 자부심
"상호가 전라도 시골집이네. 정말 전라도 사람이 하는 걸까?"
기쁨 반, 의심 반의 목소리로 일행이 외친다. 끼니를 해결하려고 주변을 살피다 호남지역의 지명이 들어간 식당을 찾은 경험, 누구라도 한 번쯤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지명이 들어갔다고 100% 맛 집인 것은 아니다. 타 지역 출신자들이 간판만 남녘의 향취를 풍기게 걸어놓고, 맛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기도 파주시 통일로 주변 외딴 식당, 맘먹고 찾지 않는 이상 잘 보이지도 않는 곳. 게다가 창고형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식당. 왠지 미심(?)쩍지만 점심때를 훌쩍 지나 오후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다. 민생고를 계속 미루어 둘 수만은 없는 상황.
점심 식사 손님이 다녀간 시간이라 그런지 실내는 한적하다. 빙긋 웃는 주인아줌마의 음성에서 남쪽 사투리가 묻어난다. 안심이 된다. 이젠 무얼 먹을까. 담백한 것을 시키려다 매섭고 찬바람을 많이 탔더니 무언가 진득한 것이 당김을 느낀다. 감자탕 작은 것(1만 5천원)과 보쌈 정식(7천원)을 시켰다.
잠시 후 깔리는 밑반찬들, 왠지 전라도 밥상이라고 하면 한가득 내어줄 듯한 인상이다. 그런데 기대만큼 여러 가짓수는 아니다. 아무튼 물김치를 한 입 떠 마셔본다. 이거 무슨 맛인가? 부드럽게 밀려오는 싱그러움. 맑다, 입 안을 쾌청하게 하고 목 안이 시원해진다. 사이다 등의 감미료 향이 아니다.
"이게 무슨 맛 이죠? 무엇으로 간을 한 건가요."
메인음식이 나오기 전이지만 궁금함을 감출 수 없다. 주인은 배시시 웃더니 새우젓간이라고 일러준다. 강경 장터에서 가져온단다. 문득 아버지의 고향(충남 서천)에서는 물김치에 새우젓 간을 치는 것을 최고로 여긴다던 말씀이 생각난다. 그렇구나 싶다가도 어떻게 비린내가 나지 않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곁들여 나온 호박무침은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다. 일부러 흐느적거리도록 볶지 않은 듯하다. 역시 새우젓 간이다. 주인은 아직 덜 익었다고 걱정하던 파김치도 상큼함이 터져 나온다. 무생채 나물도 향긋함을 더해준다. 이어 도톰함을 넘어선 두툼한 굴비가 바다 향을 전한다. 이 정도 두께는 돼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젓가락이 춤출 수 있지 않을까.
맛나다. 알싸한 향이 밥상 끝에서부터 확 밀려든다. 보쌈백반이 등장한다. 식사로 주문했는데, 안줏감으로 충분할 정도로 넉넉하다. 기타부위 하나 안 섞인 질 좋은 오겹살이다. 잡냄새 없이 부드럽게 삶아낸 내공이 보통 아니다.
나주에서 배운 어머니의 손맛으로, 매일 다른 반찬을
압권은 곁들인 묵은 김치다. 흔히 보쌈고기에 딸려 나오는 달달한 김치도, 대충 더운 온도에 삭혀낸 공장용 묵은지도 아니다. 깊고 서늘함이 느껴지는 남도 김치의 그 맛이다. 양념무채가 들어가지 않은 호남 특유의 방식이다.
감자탕 역시 놀랍다. 특유의 무거운 맛을 예상했지만 담백하고 깔끔하다. 정성들인 육수, 곱고 질 좋은 고춧가루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맛이다. 고기는 또 얼마나 부드럽게 뜯기는지 젓가락을 대자 뼈만 남기고 고스란히 입으로 가져올 수 있다.
"고향이요? 전라도 나주예요. 여기서 사업하시는 오빠 회사에 밥 해주러 왔다가, 어쩌다보니 눌러 앉게 됐지요."
음식 맛에 감탄해 말을 붙이자 창밖 오후 햇살을 즐기던 주인이 슬며시 다가온다. 함께 나온 된장국의 맛도 깊다고 칭찬하자 대파·양파·다시마·멸치·생강 등을 우려낸 육수로 끊여내 잡냄새를 없앤다고 일러준다. 이어 자랑도 숨김도 없이 술술 말문이 열린다.
"고춧가루는 나주에서 직접 농사를 지은 걸 가져다 써요. 김장은 작년에 1200포기 했는데 올해 더 해야 할까 봐요. 쌀은 방앗간에서 꼭 그때그때 찧어달라고 해서 쓰지요. 삼합이고 뭐고 떨어지면 가져와요. 뭐든 미리 재 놓으면 맛이 없어요. 내가 이래보여도 음식에는 깐깐하거든요."
문득 여행 중 나주에서 먹었던 가짓수는 많지만 딱히 특출하지는 않던 백반이 생각났다. 그보다 맛있다고 하자, 아니라고 겸손해 하다가도 매일매일 반찬을 바꾸니 재료가 싱싱할 거란 이야기를 덧붙인다.
차림표에는 각종 찌개와 삼합 등이 있지만 실제 가장 많이 나가는 건 메뉴판에도 없는 5천 원짜리 백반이란다. 큰길에서나 눈에 띄지 않을 뿐, 근처 공장이나 회사에서는 아예 이곳에서 대놓고 식사를 한다고.
"올해는 이상하게 봄인데 봄 같지가 않아요. 싱싱한 나물이나 채소가 들어간 재료들로 손님들 입맛이라도 살려야지요. 사실 음식은 남쪽고향에서 배워 온 거죠. 다행히 여기 분들도 맛있다고 해 주시니 고맙네요. 우리 자매들이 다들 음식 솜씨는 좋다고 하네요.(웃음)"
무거운 발길로 먼발치에서 머뭇거리는 봄, 가슴으로도 머리로도 느끼기 쉽지 않던 봄이 시나브로 입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남녘의 햇살은 손맛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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