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대학살의 신>을 보러가는 길, 배우 오지혜님과의 인터뷰를 신청하고 부랴부랴 발걸음을 옮겼다. 5년 전 마샤 노먼의 <잘자요 엄마>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딸의 자살을 통해 엄마와 딸의 관계를 그렸던 작품이었는데 딸 제시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예전 우노필름에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제작에 참여했을 때 처음 오지혜란 배우를 알게 되었다(인터뷰를 하면서도 이 이야기를 하니 깜짝 놀라시는 분위기다). 한석규씨 동생 역이었는데, 짧은 시간이지만 프레임의 여백을 채우는 그녀의 연기는 매력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배우인 아버지와 어머니, 영화감독이셨던 외할아버지까지, 가문 곳곳에 배어나는 '광대의 피'를 이어받은 여자. 15일, 공연을 1시간 반 남짓 남겨둔 상태에서, 쉽사리 인터뷰에 응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연습실에 들어가니 초록과 커피 빛깔이 잘 어울리는 원피스를 입고 계신다. 오늘의 무대의상이다. 마지막까지 대본에 응집된 시선을 놓치지 않는 배우 오지혜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했다.
- <잘자요 엄마> 이후 5년 만에 무대에 서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기자간담회 시간에 연기 감각을 회복하는데 기다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보기엔 너무 잘하시던데. 지나친 겸손은 아니신지요?
"잘하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프레스콜 때도 말씀드렸지만 수영이나 자전거는 한 번 배우면 20년이 지나도 몸이 기억을 하기 때문에 언제든 즐길 수 있죠. 하지만 연기는 안 그렇더라구요. 짬짬히 영화나 드라마도 했지만, 나 자신도 놀랐어요. 선배님들도 많이 잡아주셔서 도움이 되었죠. 저도 녹음을 해봤어요. 깜짝 놀랐어요.
너무 쇼크였구요. 회복하느라 오래 걸렸고 심적으로 힘들기도 했어요. 비싼 시간과 돈을 내고 오시는데 19년차 연기경력을 가진 배우로서, 관객을 실망시키면 안 되니까요. 10년 통상 연극을 딱 두 편해서 대학로에서 저를 많이 잊었더라구요. 처음엔 섭섭했는데 오히려 '관심없어 하는 분위기'라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어요(웃음)"
- <대학살의 신>에서 맡은 베로니크란 배역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다면요? 연기자로서 베로니크의 캐릭터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합니다."이 연극에 나오는 사람들은 학벌이 높아요. 물론 제가 작가이긴 하지만 상대방 남편도 변호사고, 아내 또한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구요. 제 남편은 도매상으로 성공한 사람이구요. 이 연극은 중산층 지성인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작품이에요. 물론 베로니크가 판을 크게 벌리죠. 자신의 아들을 폭행한 가해자 쪽 부모를 집으로 초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요.
합의금을 받기보단 만나서 시시비비를 따져야 한다고 말하는 쪽이죠. 교조적이랄까, 좀 피곤한 스타일이고요. 저 또한 원칙주의자의 측면이 있어요. 제가 10~30대까지 원칙주의자로 살았어요. 베로니크가 예전의 저와 많이 닮았더라구요. 물론 40대가 되면서 지금은 많이 변했죠. 연극은 아무대로 캐릭터를 과장되게 집약시키잖아요. 엉뚱하고 너무 고집스러운, 심하게 융통성이 없는 캐릭터에요."
- 원칙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계시다고 했는데요. 지금까지 사회적인 발언을 많이 해오셨는데, 배우로서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티스트란 현실을 동시대와 현실을 표현하죠. 무용가는 춤으로, 시인은 시로, 배우는 연기로 작가는 작품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현실에 관심이 없다는 게 이해가 안 가요. 김민기 선생님과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같이 했는데요(이 작품 또한 시대비판적인 면모가 강하다). 배우의 전신은 무당이에요. 산업사회 이전의 무당은 촌락의 의사이면서 종교지도자로서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역할을 했어요.
이후 분업화가 이뤄지면서 무당에게 남은 역할은 '타인의 혼을 위로해주는 일'이었어요.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배우죠. 관객들에게 '너네 요즘 이런 것 때문에 괴롭지?'라고 물어보고 자문하게 하는데요. 현실과 맞닿지 않은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작품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에요.
예전 민주노동당에 가입할 때도(지금은 탈당을 했지만)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활동한 것인데, 연예인이 가입을 하니까 혹시 정치에 관심이 있느냐고 묻더라구요. 그 와중에 많은 상처를 받았어요. 지식인으로서 활동한 것인데, 여자 배우로서 연예인으로서 (무슨 목적이 있어서는 아닌가) 해석되는 시선이 많았어요. 내가 보이고자 하는 모습과 보여지는 결과가 같을 수 없구나라는 걸 그때 알았죠.
할리우드에서는 스포츠 스타나 배우들이 사회적 논평을 안 하면 오히려 욕을 먹어요. 그만큼 사랑을 받았으면 사회에 내놓는 것이 당연한 거란 정서가 견고하죠. 이번 <대학살의 신>에 참여하게 된 것도 작품이 너무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연기를 안 하고 시위현장이나 신문 칼럼에서 보여지니까, 공연을 하는 게 '배우로서의 저'를 보여주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참여하게 되었어요."
- 배우 오지혜로 하여금 배우가 되도록 이끈 연극 작품이 있는지?"사춘기 시절에 기억되는 특별한 작품은 없어요. 아시겠지만 저희집이 3대가 영화와 연기로 일가를 이룬 가문이에요. 걷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제 주위에 배우들이 가득했고 7살부터 객석에서 부모님이 연기하는 걸 봤어요. 우리 엄마는 스타일도 멋있고 택시를 잡아도 우아하게 손을 뻣으세요. 어렸을 때, 그 모습을 보면 너무 좋았어요. 무대에 서 있는 엄마가 좋아서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 제가 만나는 모든 배우에게 묻는 공통질문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오지혜님의 배우의 존재론은 무엇입니까? "배우란 광대죠. 배우란 동시대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거울을 보지 않는 이상 자기를 보기 어렵잖아요. 연극을 보러와서 작품이 재미있다고 말할 때 그 기준은 항상 '그 안에 자기가 있기 때문이고 확인했기에 울고 웃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네가 너 보여줄게" 하며 관객들에게 자신을 바로 보도록 확인시키는 역할. 그것이 배우의 존재론이라고 믿고 있어요."
아쉽게도 짧게 허락된 인터뷰가 끝났다. 무대 위에 곧 서야 하는 배우에게 행여 에너지를 빼앗은 것은 아닌지 송구했다. 배우는 무대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연극이 관객이란 상수를 전제로 피어나는 장르이듯, 배우는 시연하는 자신의 몸과 목소리를 확인하고 '그/그녀와 함께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관객이 있기에 존재한다. 조화롭고 투명한 세상을 몸으로 해석하고 관객들과 소통한다.
개인이 연루되어 벌어지는 극 속 사건과 관계를 맺으며 감각의 그물망을 통해, 포착할 수 있는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 그것이 배우다. 배우 오지혜는 지금 이 자리에서, 현실의 우리들과 함께 소통한다. 그렇게 무대 위에서 '관객들의 영혼을 달래는' 연기의 초혼제를 지낸다. 그녀는 광대다.
연극 <대학살의 신>은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5월 5일까지 상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