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기 원사, 최한권 상사, 박경수 중사, 박보람 하사, 장진선 하사, 박성균 하사, 강태민 일병, 정태준 이병.
아직 귀환하지 못한 천안함 침몰 사고 실종자 8명의 이름이다. 동료 장병 38명은 결국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지만, 이들은 끝내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군당국은 16일 오전 8시부터 재수색에 나섰지만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이날 함미 수색 중단을 요청했다.
이날 해군 해난구조대(SSU) 대원들은 바지선 주변과 침몰 해역에서 실종자와 부유물을 찾기 위한 수상 탐색을 펼치고 있다. 시신의 일부나 소지품이라도 발견하면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국방부 조사본부 과학수사연구소의 유전자감식팀도 나섰다.
국방부는 일단 "마지막 한사람까지 찾아내겠다"는 입장이지만, 현실적으로 산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실종자 가족들도 추가 수색은 요구하지 않을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8명의 실종자들은 바닷속에서 끝내 나오지 못한다.
[이창기 원사] 동료 대신해 승선... 부하들 구하러 함미 갔을까
이창기 원사는 실종자 중 최고 선임자로, 지난 1999년 1차 연평해전에서도 속초함 전탐사로 참전해 전투유공 표창을 받았다. 천안함의 최원일 함장과 오랫동안 군생활을 함께 했고 결혼식 주례도 최 함장이 볼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그는 원래 지난 2일 준사관 선발시험을 치기로 한 터라 이번에는 천안함을 타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탐선임하사의 아이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자진해서 출동에 나섰다.
이창기 원사 가족들은 "원사는 함미 쪽에 갈 일이 없는데 아마 부하들을 구하러 갔을 것 같다"고 했다. 이 원사는 전파탐지팀장으로 주로 함수에서 근무한다.
그의 노력 덕분인지 다른 전파탐지팀장 9명은 모두 생존했다. 그러나 함미에서도 아직 이 원사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원사의 영향을 받아 해군 부사관을 꿈꾸던 조카는 사고 이후 해군 지원 시험을 치지 않기로 했다.
[최한권 상사] 가라앉는 천안함을 밝혔던 그 사람
천안함 생존자들은 구조 상황을 설명하면서 "최한권 상사에게 감사한 마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조명등을 보고 (탈출해) 살았다"고 말했다. 이 비상조명등을 정비해 놓은 사람이 바로 최 상사다.
천안함 전기장인 최한권 상사는 꼼꼼한 정비업무로 정평이 났다. 기관부 장병들에게는 엄격하고 따뜻한 선배로 알려졌다. 동료들의 탈출길을 밝혔던 최 상사는 그러나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박경수 중사] 제2연평해전 총탄 맞고도 살았는데박경수 중사는 제2 연평해전에서도 참가했다. 지난 2002년 6월 해전 당시 참수리호 보수사로 참전했다가 총탄을 맞았지만 다친 것도 모른 채 전투에 임했다. 이 공로로 그는 국무총리 전투유공표창을 수상했다.
박 중사는 이후 심각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시달렸다. 6년 동안 배를 타지 못하고 육상근무만 했다. 그의 동료에 따르면, 당시 주변 사람들이 '장한 일을 했다'며 격려했을 때도 그는 "모두 살릴 수 있었다"면서 흐느꼈다고 한다.
그는 한때 전역까지 고민했지만, 아이를 생각해 다시 배에 탔다고 한다. 승진을 하려면 항해 경력이 많아야 하는데, 후배가 먼저 진급을 하자 중압감을 느끼고 결국 배를 택한 것이다.
박 중사는 올해 늦깎이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부인과 혼인신고를 하고 초등학교 1학년인 딸을 뒀지만 아직 식도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결혼 10년째였고 이번만은 꼭 아내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줄 마음이었다.
사고 직후 아내 박아무개씨는 "제2 연평해전 때도 우리 신랑 이름이 생존자 명단에 가장 늦게 떴다"면서 "남편이 꿈에 나와서 '춥다'고 했는데 아직 살아있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고 기대를 보였다.
[박보람 하사] 통장엔 만기 다 된 '어머니 수술비' 600만 원
박보람 하사의 적금은 이번 달이 만기였다. 600만 원이 나오면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 박영이씨의 수술비로 쓸 생각이었다. 마지막 휴가에서 그는 어머니에게 "다음달에 적금 타요, 약 지어드세요"라고 말했다.
박 하사는 입대 직전 어머니에게 14k 금반지를 선물했다. 너무 작아서 새끼손가락에만 들어가는 반지다. 그러나 어머니 박씨는 "이 반지를 평생 빼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어머니의 수술 날짜는 침몰 며칠 뒤였다.
함선 안에서도 수병들의 맏형 노릇을 하면서 신망이 깊었다. 휴대폰을 자주 빌려줬는데, 가족이나 애인을 그리워하는 장병들의 통화 탓에 한 달 전화비가 수십만 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장진선 하사] "기다려줄 거지? 사랑한다"
"오늘 발표가 났다. 해군 부사관 합격했다. OO야 오빠 기다려 줄 꺼지?ㅠ 사랑한다, OO야. 나 10월 13일날 입대. 보고싶다. 잊지말아라. 사랑한다."
지난 2008년 9월 19일 장진선 하사가 미니홈피에 올린 글이다. 입대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드러나 있다. 이 미니홈피의 제목은 '기다려라 다시 돌아온다'이다.
부사관 219기로 입대한 장 하사는 쾌활하고 운동을 잘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생활 틈틈이 소형선박조종사 자격증 공부를 했고, 오는 5월에 휴가를 나와 친구들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 갈 계획도 세웠다. 설 휴가 때는 "제주도 여행 한번 가시라"면서 보너스로 받은 50만 원을 모두 부모에게 드리기도 했다.
그가 그리워하던 여자친구는 사고 이후 "'오빠는 항상 우리 OO 옆에 ♡'라고 예전에 오빠가 그랬잖아, 근데 왜 지금 내 옆에 없고 거기서 뭐하는 거야, 빨리 와, 보고싶어"라고 답글을 달았다.
[박성균 하사] "간다, 담에 보자"고 재회 약속하더니...
박성균 하사는 지난해 7월 입대했고 배를 탄 것은 두달밖에 되지 않았다. 천안함이 그의 첫 근무지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한 학기 남겨놓고 입대했지만 틈틈이 전문서적을 읽으면서 공부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간부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면서 멀미약도 먹지 않을 정도로 강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지난달 초 휴가 때는 "배 타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고, 지난달 22일 부모와의 마지막 통화에서는 "요즘 잠이 잘 안 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해군을 선택한 것도 창원 집에서 가까운 진해에 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박 하사는 지난달 11일 미니홈피 일기에 "간다. 담에 보자. 5년 뒤에 만나자. 다∼∼같이"라고 썼다. 그러나 친구들을 언제 다시 볼지 기약이 없다. 천안함은 그의 마지막 근무지가 됐다.
국방부는 지난 15일 천안함 함미 탄약고에서 발견한 시신을 박성균 하사로 밝혔다가 신선준 중사로 정정하기도 했다.
[강태민 일병] 육상부대보다 좋았던 천안함 근무
강태민 일병은 육상부대로 전출할 수 있었는데도 계속 배를 탄 것으로 알려졌다. 함정 근무 기간이 6개월이 지났지만 "가족적인 천안함이 좋다"고 했다. 그는 원래부터 배를 워낙 좋아했다. 대학(홍익대)에서도 조선해양공학과를 전공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미니홈피에서 한 선배는 "너에게 전출의 입질이 올 수도 있겠지만 조선공학도가 기관병으로서 초계함에 타는 한 절대 배를 내리지 말 것을 권장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자랑스러워 해라, 우리는 까리한 해군의 기관병이다"면서 "소총을 겨드랑이에 끼고 서해를 누비는 것이 쪽팔리는 일이 아닐 뿐더러 조선공학도에게는 절호의 찬스를 움켜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군이자 조선공학도로 배를 사랑했던 강태민 일병은 아직도 천안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정태준 이병] 100일 휴가 나와 석달치 월급 부모님께
정태준 이병은 4개월 전인 지난해 12월에 입대해 지난 2월 천안함에 승선했다. 아르바이트로 대학 등록금을 벌 정도로 의젓했던 정 이병은 넉넉치 않은 집안 형편을 생각해 군생활을 택했다. 지난해 어머니가 가슴에 생긴 종양을 제거했다. 이 수술 때문에 전세금을 빼야했다.
얼마 전 100일 휴가를 나왔다. 세 달 동안 모은 월급을 모두 부모에게 드렸고 어머니에게는 "사랑해"라고 애교를 떨었다고 한다. 이 휴가가 그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휴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태준 이병은 천안함의 막둥이 고 장철희 이병과 둘도 없는 대학 과(동의과학대 전기과) 친구였다. 장 이병은 전날 발견됐지만 그는 아직 친구와 떨어져 바닷속에 갇혀 있다.
폭발·유실로 인한 산화 가능성 높아
해군은 애초 이창기 원사는 승조원 식당에, 최한권 상사와 박성균 하사는 기관조정실에, 박경수 중사는 보수공작실에, 장진선 하사는 디젤엔진실에, 나머지 3명은 기관부침실에 각각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실종자 8명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이 사고 당시 함수 전투정보실에 있었다면 천안함을 모두 인양한 뒤 시신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절단면 부근인 원·상사 식당이나 가스 터번실에 있다가 폭발 또는 유실로 산화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정국 실종자 가족협의회 대표는 "인양 함미에서 발견되지 않은 장병들은 피폭 지점에 있다가 산화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침몰 당시 조류가 거셌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고 원인과는 무관하게 시신이 바닷물에 휩쓸려갔을 가능성도 있다.
실종자 가족들은 장병들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 산화로 처리하고 추가 수색을 요청하지 않기로 했다. 시신이라도 찾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접고 마지막까지 크게 결단을 내린 것이다.
군인사법 시행규칙 73조에 따르면 전투나 재해 중 행방불명된 장병에 대해서는 전투 종료 또는 행방불명된 날로부터 1년 뒤 전사나 순직자로 처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