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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고수들의 내공이 존경스럽다
산행고수들의 내공이 존경스럽다 ⓒ 김혜원

몇 년 전,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집에서 멀지 않은 청계산에 오른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은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다른 운동은 다 해도 등산만큼은 싫다는 마누라를 어르고 달래서 돼지 몰 듯 데리고 산을 올랐다.

산에 오르는 중에도 나의 투덜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왜 내려올 산을 올라가느냐, 죽어라 걷기만 하는 게 뭐가 좋으냐, 다리가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 숨이 차다, 재미가 없다..." 결국 마누라 잔소리에 지친 남편은 정상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당신이랑 한 번만 더 산에 가면 사람이 아니다."

남편은 선전포고라도 하는 듯 비장하게 선언했지만 솔직히 나는 그 선전포고가 고맙기까지 했다. 그날 내가 그렇게 '진상'을 떨지 않았다면 남편은 매주 나를 몰고(정말 돼지 몰듯 몰아서) 산행을 다녔을 테니 말이다.

돼지 몰고 나간다? 남편이 나와의 산행을 거부한 이유

 우리집이 있는 이매저수지. 종지봉이 첫 목적지다.
우리집이 있는 이매저수지. 종지봉이 첫 목적지다. ⓒ 김혜원

운동은 모름지기 시설 좋은 스포츠센터에서 멋진 총각 코치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해야 폼도 나고 효과도 있다고 믿어온 나에게 산행이란 아무도 없는 주민자치센터 무료 운동교실에서 벽을 보고 러닝머신을 타는 것만큼이나 지루하고 재미도 없는 운동 방식이었다.

산에 오르는 길에 만난 아줌마, 아저씨들의 모습도 산행 초보인 내 눈에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평일 오전이라서 그런지 대부분 등산객들이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장년층들이었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큰 목소리로 수다를 떨기도 하고, 도토리묵에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고, 싸가지고 온 도시락들을 나누어 먹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랬는지 내 눈에는 그들이 체력을 단련하러 온 것처럼 보이지도, 자연을 즐기러 온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시간이 무척 많아 어떻게든 시간을 '죽이려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처럼 보였던 것이다.

몰개성(?)한 등산객들의 옷차림도 이상하기만 했다. 어디서 단체로 맞춘 것인지 하나 같이 똑같은 모자와 점퍼, 바지와 신발을 착용한 사람들. 등산복의 기능성에 대해 알 리 없는 나로서는 공식처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등산과는 인연을 끊고 지낸 지 몇 년. 나는 오십이 됐고 내 몸 어디에선가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벌렁거리고, 공연히 얼굴이 붉어지기 일쑤에다 별일 아닌 것으로 버럭 화를 내는 일도 잦아졌다. 무엇보다 가슴속에 돌이 얹힌 듯 답답하고 잠자리에 누워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화끈화끈 갱년기, 가슴 위에 턱하니 돌이 앉았네

그랬다. 나이 오십과 함께 드디어 나에게도 두려운 갱년기가 강림한 것이다.

몸에 변화가 오면서부터는 뛰는 운동을 할 수 없게 됐다. 조금만 뛰어도 무릎이 쑤시고 결리는 것도 문제거니와 뛸 때마다 방광에 자극이 심하게 느껴져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려야 하다 보니 혹시라도 운동 중 실수(요실금)를 하면 어쩌나 잔뜩 긴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갱년기 여성이 아니라도 출산의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운동을 할 때 요실금 패드를 사용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갱년기가 되면 증상이 더욱 심해져 운동을 할 때뿐 아니라 일상생활 중에도 늘 요실금 패드가 필요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 많은 갱년기 여성들이 이를 걱정하는 것이다.

창밖은 막 봄이 시작되는 4월. 따뜻한 햇살 아래 초록의 싹이 움트고 이른 봄꽃들이 하나둘씩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지만 갱년기 아줌마 마음에는 여전히 해빙기가 오지 않았다. 싸늘한 실내에서 담요 한 장에 의지해 낮잠을 청하려니 잠은커녕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울화가 치밀어 열이 벌컥 올라온다.

 내가 좋아하는 소나무 숲
내가 좋아하는 소나무 숲 ⓒ 김혜원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갱년기 증상이 시작된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오래 전 사 두었던 등산화를 꺼내 신었다. 늘어난 '추리닝' 바지에 바람막이 점퍼를 걸치고 야구 모자를 아무렇게나 눌러 쓴 채 무작정 집을 나섰다.

집 앞 큰길에 나오니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어디론가 길을 잡아 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작정 그들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걷기 시작한 지 십 분 만에 그들은 이미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그들이 갔을 거라고 생각되는 길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우리집 뒷산이 운동하기는 좋아. 가까운 종지봉까지 오르면 왕복 한 시간이면 충분하고 영장산까지 가면 왕복 세 시간 코스야. 아침 운동은 한 시간 코스면 충분하고 주말엔 세 시간 거리 영장산까지 다녀와도 좋지."

언젠가 남편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가다보면 종지봉이 나올 것이고 오늘은 첫날이니 거기까지만 다녀오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것도 산이 무서워 피했던 나에게는 고행에 가까운 산행이 아닐 수 없었다.

말이 동네 뒷산이지 뒷산도 뒷산 나름이라. 처음부터 가파른 경사면을 엎어지다시피 오르다 보니 5분도 못 돼 금방 숨이 턱까지 차올라 죽을 것만 같다. 산 입구에서 단 5분을 올라왔을 뿐인데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숨은 100m 달리기 한 사람처럼 헥헥거리니 내 곁을 지나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나에게 무슨 큰 병이 있나 했을 것이다.

5분에 한 번씩 쉬고 걷기를 한 시간. 남편은 30분이면 오른다는 동네 뒷산 작은 봉우리까지 오르는 데 꼭 배의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너무 힘들어 헛구역질이 나고 눈앞이 노랗게 보이기까지 했지만 신기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몸이 조금씩 산에 적응을 하는 듯했다.

어느새 목적지. 땅만 보고 걷던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니 가슴 가득 솔 향이 밀려들어온다. 솔숲에 이는 바람소리마저 청량하다. 산 아래서 올라오는 바람을 맞으니 가슴속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이 사라진 듯 깊은 숨이 쉬어진다. 여기가 정말 우리 마을 뒷산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딴 세상처럼 느껴진다.

빨간 점퍼 아줌마, 검은 모자 아저씨, 멋져부러

 드디어 영장산 정상
드디어 영장산 정상 ⓒ 김혜원

차츰 먼저 올라온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친구들과, 이웃들과,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올라온 중년의 아줌마들. 나 같은 초보는 없는 듯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잠시 스트레칭을 하고 가져온 물을 나누어 마시더니 또 다른 봉우리를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혼자 온 사람들, 부부가 함께 온 사람들, 친구들과 동행한 사람들... 사람들의 모습은 몇 년 전 청계산에서 본 그들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데 오늘 보니 그들이 그렇게 멋지게 보일수가 없다.

입은 옷도 멋지고, 쓰고 있는 모자도 멋지고, 하다 못해 두 손에 들린 지팡이(스틱)까지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모양이 단순하거나 컬러가 다양하지 못한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산행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기능성 제품이기 때문에 컬러와 디자인이 다양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수영장에 가면 수영 잘하는 사람이 멋있게 보이는 것처럼 산에 오르니 산을 잘 타는 사람들이 멋지게 보였다. 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장년층 아줌마들을 볼 때면 마음 한구석 존경심까지 우러났다.

그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시간이 남아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미리 미리 갱년기를 이길 준비들을 하고 있었거나 갱년기를 잘 이겨내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첫 번째 산행 이후 몇 번 더 도전을 한 끝에 마침내 세 시간 코스라는 영장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은 곳까지 오른 것이다. 힘든 만큼 기쁨도 크고 보람도 컸다. 몸도 많이 가벼워진 듯하고 잠도 잘 잔다. 무엇보다도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졌으니 살 것 같았다.

 내려오는 산길은 더욱 가볍다
내려오는 산길은 더욱 가볍다 ⓒ 김혜원

요즘은 집에 있다가도 갑자기 마음이 답답하고 가슴이 무거워지면 무조건 등산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아무 생각 없이 산에 오르다 보면 내 몸을 누르고 있던 갱년기 증상들을 떨쳐 낼 수 있거니와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한참 숨을 몰아쉬며 산을 오르고 있는데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라구? 산? 정말? 언니가 산엘 다 오르고... 호호호. 언니도 나이 먹었구나."
"나쁜 '기지배'. 지금 젊다고 재냐? 너도 십 년만 있어봐라. 안 오르고 배기나."


#등산#종지봉#영장산#갱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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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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