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주도했다는 사람들이 나중에는 유신지지 성명을 내고, 이승만 대통령 지지하는 데모했던 사람들이 4·1 훈포상을 받고… 벌써 50년이 됐지만 4·19와 관련해서 왜곡돼서 알려진 사실들이 너무 많아요."
올해 72세가 된 홍영유(고려대 법학과 58학번)씨는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뜻깊은 일을 하기로 했다.
4·19혁명의 시발점인 1960년 2월 28일 대구 고교생들의 의거부터 같은 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까지 역사적 사건들을 재구성하는 작업이었다.
홍씨가 쓴 10권 분량의 <4월혁명 통사>에는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1960년 고려대 학보 <고대신문> 취재기자였던 홍씨는 서울대 출신의 안동일 변호사와 함께 그 해 7월 '최초의 4월혁명사' <기적과 환상>을 펴냈는데, 이번에 <4월혁명 통사>를 펴냄으로써 4·19에 대한 기록 작업을 50년 만에 완결하게 된 셈이다.
<4월혁명 통사>에는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반독재투쟁이라는 후세의 평가와 달리 60년 4월 19일 발포 이전까지 거리에서 정권 퇴진 구호가 나오지 않았다는 증언들이 담겨 있다.
특히 고려대 4·18 시위 분위기에 대해 "정권 퇴진 어쩌고 하는 얘기가 있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지금 와서 하는 소리지, 당시에는 감히 입에 뻥끗도 못 하던 소리였다"(김면중, 철학과 57학번), "내가 '민주 역적 몰아내자'는 구호를 하려고 하니 너무 과격하니 부드럽게 하자는 제의가 있었다"(김영표, 농예화학과 55학번) 등의 증언은 당시의 생생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당대에는 없다가 갑자기 나온 자료들이나 '4월의 진실'과 일치하지 않은 주장들을 검증하는 것도 홍씨가 주력했던 작업이다.
대표적인 것이 2005년에 발견된 서울대 학생들의 4·19 시국선언문 전문이다. 45년 만에 발견된 선언문에는 "진흙 같은 긴 밤의 계속과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사를 보라!" 등의 문구가 들어있는데, 4·19 당시 서울대 학보에 실린 선언문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가 최근 갑자기 튀어나왔다고 한다.
"1960년 3월11일 청주에서 야당을 비난하는 고등학생들의 관제 시위가 열렸는데, 훗날 역사서에는 이 시위가 마치 4월혁명의 단초인 것처럼 잘못 기술된 예도 있다"고 홍씨는 전했다.
4·19 이전까지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는 활동을 했던 학생회 간부들 중 일부가 4·19 이후 '혁명의 주역'으로 행세하는 것도 홍씨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다.
4·19 이전에는 "이승만 박사를 받들고 이기붕 선생을 그 보필자로 받들어야 한다"는 전국대학생구국총연맹이라는 단체의 성명서가 발표된 일이 있었는데(1960년 2월 29일자 서울신문 광고), 이 모임의 발기인 대표 10명 중 2명은 1963년 4월 박정희 정권이 수여한 4월혁명 훈포상자 명단에 포함됐다.
같은 해 3월10일에는 '전국대학생학술연구회'의 이기붕 지지 성명서가 발표됐는데, 105명의 서명자 중 6명이 4.19 서훈을 받았다고 한다.
서울대 안병규·윤식, 고려대 김충수·박찬세·손진영·이세기, 중앙대 유용태 등 이른바 '4·19 혁명 당시 학생대표' 일부가 1972년 11월18일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사실도 홍영유씨는 책에서 빼놓지 않았다.
홍씨는 "1960년 학도호국단 간부로서 학생 시위를 막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 군사정권이 주는 4·19 훈포상 받고 3선개헌과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서에 서명한 일도 있었다"며 "내 얘기가 설령 야사로 남더라도 4·19의 이러한 껍데기를 벗기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홍씨는 자신의 책을 한국학 또는 동양학이 개설된 세계 각국의 도서관 150곳과 국내 대학교, 중·고교 도서관 450곳 등에 기증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