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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파업으로 장기간 결방 중인 <무한도전>.
MBC 파업으로 장기간 결방 중인 <무한도전>. ⓒ MBC

요즘 기운이 없어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때때로 초점 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멍하게 바라볼 때도 있고, 입맛이 없어 밥을 먹어도 입안이 까끌까끌하다. 주변에선 "봄 타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생전 그런 거 모르고 살아오다 이제 와서 무슨…, 그것도 아닌 듯하다. 대체 뭘까? 이렇게 맥이 축축 늘어지는 이유가.

한참을 생각해보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렇지!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무릎을 철썩 때렸다. 책상 위의 달력을 쥐어 들고 날짜를 따져봤다. 하나, 둘, 셋…, 그랬다. 벌써 MBC <무한도전>을 못 본 지 3주나 된 것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0분부터 1시간 10여 분 남짓 하는 시간동안 낄낄거리며 정신 못 차리게 웃다 보면 어느새 한 주 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리곤 했다. 그렇게 내 삶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해주던 <무한도전>이 천안함 사태와 MBC 언론노조 파업으로 벌써 한 달 가까운 기간 동안 방영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KBS <해피선데이>나 SBS <강심장> 같은 타사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천안함 사태의 추이에 따라 결방되기도 했다가 방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MBC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천안함 사태와는 관계없이 지난 5일 노조의 총파업 이후부터 대부분 결방됐고, 예능 프로의 방영 시간에는 스페셜 프로그램들이 대체 편성됐다.

MBC 언론노조는 왜 파업을 선택했을까?

노조는 왜 파업을 했고, 어째서 파업은 장기화됐을까? 문제의 원인을 하나하나 짚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MBC의 정치적 독립'이란 답이 나온다. 노조와 김재철 사장 사이에 쟁점이 되고 있는 두 가지 문제, 김우룡 전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 이사에 대한 고발과 황희만 부사장 임명 건의 철회는 결국 MBC가 정권에 휘둘리지 않고 공영방송으로써의 독립성을 갖추는 데 꼭 필요한 조건들이다.

현 정권의 방송 장악을 위한 행보가 어디 어제 오늘 일인가. 정연주 사장이 임기도 채우지 못한 채 낙마하고 이병순->김인규 사장 체제로 들어선 KBS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KBS <미디어포커스> <생방송 시사투나잇>같은 진보적 성향의 시사 프로그램들이 연달아 폐지되고, 윤도현, 김제동 같은 정권에 호의적이지 않은 연예인 MC들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프로그램에서 쫓겨나야 했다.

MBC에서는 또 어떠했나. 클로징 멘트로 전 국민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줬던 신경민 앵커가 <뉴스데스크>에서 돌연 하차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1위에 수년 간 꼽혀온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는 자신이 7년 동안 진행해왔던 시사 프로 <100분 토론>의 진행자 자리를 떠나야 했다. 당시 MBC에서는 그의 고액의 출연료가 부담되어 하차를 결정했다는, 실로 궁색한 하차사유를 내놓았다.

MBC의 대주주인 방문진에 의해 엄기영 사장이 내몰리듯 사퇴하고 고대 출신의 친 MB계 인사인 김재철 청주 MBC 사장이 신임 MBC 사장으로 선출됐을 때, 노조는 이에 불복하고 그의 출근저지 투쟁에 나섰다. 그랬던 노조의 투쟁이 3일 만에 철회됐던 건 '낙하산 인사' 논란을 빚었던 윤혁 TV제작본부장과 황희만 보도본부장의 임명 건에 대해 김재철 사장이 노조의 의견을 수용해 두 사람의 보직을 특임이사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불씨 되살린 김우룡 전 이사의 '큰 집 조인트' 발언

 MBC 사장 및 임원인사에 권력기관이 개입했다는 김우룡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인터뷰가 공개돼 파문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MBC 본사에서 김재철 MBC 사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김우룡 이사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MBC 사장 및 임원인사에 권력기관이 개입했다는 김우룡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인터뷰가 공개돼 파문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MBC 본사에서 김재철 MBC 사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김우룡 이사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일단락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던 노조의 투쟁은 그러나 의외의 곳에서 불씨가 되살아나고 말았다. 시사월간지 <신동아> 4월호에 김우룡 전 방문진 이사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고, "좌파에 휘둘리던 김재철 사장이 큰 집에 불려가 조인트 맞고 깨진 뒤 좌파 정리했다"는 그의 인터뷰 내용은 이내 '큰 집 조인트' 파문으로 확대됐다.

공영방송의 사장이 '큰 집'에 불려가 '조인트'를 맞고 깨졌다? 정권의 방송 장악 의혹의 실체가 드러났다고 봐도 무방한 이 발언을 놓고 MBC 전체가 들끓자 김재철 사장은 3월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김우룡 전 방문진 이사와 해당 기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발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민사 소송까지 걸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소송은 이행되지 않았다. 거기에 한술 더 떠 김재철 사장은 천안함 사태로 안팎이 어수선하던 지난 2일 낙하산 인사로 문제가 됐던 황희만 특임이사를 부사장에 임명했다. 기자회견 자리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이행하기는커녕 노조와 했던 약속을 불과 며칠 만에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버린 김재철 사장의 행동에 노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총파업 체제로 돌입했다.

지난 5일부터 시작된 총파업도 벌써 3주째, 장기전에 들어섰다. 드라마를 제외한 대부분의 예능 및 시사·교양 프로그램이 제대로 전파를 타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러나 노조와 김재철 사장의 입장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하여 좀처럼 돌파구를 찾기 어려운 지경이다. 무엇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김재철 사장의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된 문제인식이다.

김재철 사장의 잘못된 문제인식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롯데시티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연 김재철 사장은 작금의 파업 사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황희만 특임이사의 부사장 임명건에 대해 그는 "회사 운영을 해보니 부사장과의 업무 분담 필요성이 느껴졌고, 황희만 부사장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다"면서 "인사권은 사장 고유의 권한이며, 지난 번 논의 때에는 '보도본부장'이 안 된다는 것이었지 '부사장'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기막힌 해석이다. 노조가 황희만 보도본부장 임명에 반대한 건 그것이 '낙하산 인사'라는 점 때문이었지 자리 때문이 아니었다. 낙하산 인사를 보도본부장이란 요직에 앉힐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었다. 그런데 보도본부장보다 더 중요한 자리인 부사장에, 낙하산 인사로 논란이 됐었고 그에 김재철 사장 본인이 임명을 취소하고 특임이사로 발령 냈던 사람을 앉힌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또 김재철 사장은 김우룡 전 방문진 이사에 대한 고소건에 대해서도 노조가 파업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진행시키지 않겠다는 대답을 내놨다. 그는 "김우룡 전 방문진 이사의 발언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이 나 자신"이라며 "고소를 해도 내가 하고, 고민을 해도 내가 가장 많이 하고 있다, 송사라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닌 만큼 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은 고소보다 중요한 현안이 많다"고 덧붙였다.

이 또한 한참 잘못된 생각이다. 김재철 사장은 김우룡 전 이사의 발언을 개인의 명예훼손 문제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소위 큰 집 조인트 발언 문제의 본질은 정권의 방송 장악 의도에 있다. 노조가 김우룡 전 이사에 대한 고소를 촉구했던 건 소송을 통해 법정에서 정권의 MBC 장악 의도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 현안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MBC 파업, 믿고 기다리련다

 지난 7일 오후 여의도 MBC본사에서 열린 전 조합원 총파업 집회에 참석한 노조원들이 'MBC를 지키고 싶습니다'는 구호가 적힌 흰수건을 들고 국회앞까지 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지난 7일 오후 여의도 MBC본사에서 열린 전 조합원 총파업 집회에 참석한 노조원들이 'MBC를 지키고 싶습니다'는 구호가 적힌 흰수건을 들고 국회앞까지 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 권우성

김재철 사장은 현 사태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야 한다. 노조만이 아니다. 국장급인 84년 입사자들이 김재철 사장의 결자해지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고, 부장급인 85·87년 입사자들도 이에 뒤따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특히 통상적으로 사측으로 분류되는 TV제작본부 소속 보직부장들까지 김채절 사장에게 사태 해결을 촉구하고 나섰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입장에 반대하고 있는 것일까.

노조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공영방송이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는, 아주 기본적이고 당연한 권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공영방송이 시청자에게 이행해야 하는 당연한 약속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공영방송의 사장이 큰 집에 불려가 조인트 맞고 깨져 좌파를 정리했다는 믿기지 않는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공영방송의 대주주인 방문진 이사의 입으로부터 듣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무한도전> 시청자 게시판에 파업을 지지하며 방송을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다는 응원의 메시지가 빼곡하게 올라오는 것은, 시청자들도 이 참담한 현실이 조금이라도 바뀌길 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PD수첩>이나 <무한도전>같은 정권에 호의적이지 않은 프로그램들이 언제 어떻게 될지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기운이 나질 않더라도 참고 기다리련다. <무한도전>이 다시 방영하는 그 날까지.


#MBC 파업#무한도전#김재철#김우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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