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문시를 적는 건 오래 전 나으리께서 쓰신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열일곱 해전의 일이겠지요. 사냥을 즐기던 나으리는 권문(權門)에 들어가기로 약조 받았으니 장차 영화가 따를 것이라 생각하고, 그걸 기념하려 사냥이 금지된 와우산(臥牛山) 인근으로 말을 달렸지요. 이곳은 소가 누운 형상이므로 사냥을 비롯해 어떤 건물도 들어찰 수 없는 지역으로 나라에선 선을 그은 지 오래 됐습니다. 나으리는 그곳 산중에서 한 처녀를 만났습니다."
와우산. 이곳은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산이다. 예로부터 풍수학인들은 이 산에 대해 우산목적 농암모연(牛山牧笛 籠岩暮烟)이라 했는데, 이것은 와우산에서 부는 모공의 피리 소리와 농바위 부근의 저녁 짓는 연기 모습이 서호팔경(西湖八景)에 꼽힌다고 감탄했다.
와우산이라 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예전에 큰 소가 있었는데 길마는 무악산에 벗어놓고 굴레는 북아현동에 벗은 다음 서강에 내려가 물을 마시고 누웠다는 것이다.
이 와우산의 소가 여물을 먹는 그릇인 구유는 하수동의 농바위이고 잔돌백이는 이 소의 쇠똥에 해당한다고 비유했으므로 풍수학인들은 소의 엉덩이 부근에 건물을 짓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했었다.
무게를 감당치 못한 소가 엉덩이를 흔들면 건물이 붕괴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이곳의 경치는 빼어나 이름 모를 선비가 천렵을 와서 쓴 한편의 시가 남아 있었다.
하늘의 신선이 내려와 와우산에 누웠는데하늘의 궁녀는 한강가로 찾아왔네민우기라는 젊은이가 이곳으로 사냥감을 찾아 나섰는데 김씨 성을 쓰는 처녀를 만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처녀의 자태가 고와 깊은 밤 담을 넘어 들어갔는데 그녀 역시 생면부지의 젊은이가 마음에 들었던지 조건 하나를 내놓았다.
"선비님께서 이 몸을 보시고 담을 넘은 건 춘정에 불과합니다. 더는 나무라지 않을 것이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그래도 선비님께서 이 몸을 은애한다 하시면 제가 쓴 시구에 답시를 쓰십시오. 그럼 선비님의 뜻을 받아들이지요."처녀가 쓴 건 이규보의 회문시였다. 민우기는 처녀의 시를 뒤집어 답시를 썼다. 그 밤을 함께 지내고 헤어질 시각이 되자 민우기가 말했다.
"내가 올해 무과(武科)에 응시하려는 데 급제하는 대로 올 것이니 기다려 주시오."
그 해 무과에 응시한 민우기는 낙방했다. 그 다음 해도 마찬가지였고, 세 번째 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무과는 포기하고 권문(權門)에 손을 써 그쪽 일을 하게 됐다. 그러는 사이 세 해가 흘렀고 와우산에 두고 온 처녀는 오랜 기다림으로 병을 얻어 생사를 헤맸다. 자신의 병이 악화되자 그녀는 남동생을 가까이 불렀다.
"내가 천하에 둘도 없는 난봉꾼 민우기란 놈에게 속아 몸과 마음을 망치고 이제 병을 얻어 속절없이 죽게 됐다. 저승으로 가기 앞서 너에게 한 가지 당부하려 한다. 네가 나와 육친의 관계니 나를 위해 희생할 수 있겠느냐? 우리 집안은 큰 오라비가 있으니 대가 끊길 염려는 없다.""그렇게 할 테니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다른 말은 할 필요가 없다. 문갑을 열면 봉함된 서찰이 있을 것이다. 그걸 운니동(雲泥洞)에 있는 이공공(李空空)에게 가져가면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다."
처녀가 세상을 뜬 뒤 남동생은 편지를 들고 운니동의 이공공을 찾아갔다. 운니동, 이곳은 내시들이 사는 동네였다. 권좌에 앉은 제왕 곁에 서 있다가도 현실로 돌아오면 진흙 밭을 뒹군다하여 운니동이란 명칭이 붙었다.
이곳에 사는 이공공은 이씨 성을 쓰는 내관으로 사내의 양물과 고환 둘 다 거세되었다는 뜻으로 '공공'이었다. 이공공은 처녀가 쓴 서찰을 읽어보더니 자신의 집에 거하는 걸 허락해 주었다.
흥미로운 건 장안에 사는 여인들이 궁인이 되고자 이공공의 집을 자주 찾아왔으므로 도성 밖 소문은 그런 대로 들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씨 집안에서 얘기 잘하는 서생을 찾는다는 말에 길을 나선 게 그의 아들 정태현을 만나게 된 동기였다.
"책사(冊肆)께서 들어 알겠지만 저의 아버님은 기이한 얘길 좋아하는 편이지요. 어떤 때는 얘기꾼을 불러 자신이 알고 있는 걸 들려주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서생께서 얘기만 한다고 이곳에 들리진 마십시오. 제가 뵙자한 것은 이 놈의 마음에 은애하는 처자가 있기 때문이오. 바로 민우기 대감의 며느리요. 아들은 과시를 치고 돌아오다 말에 치어 목숨을 잃었고 홀로 별당에 기거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여인의 마음을 얻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방법은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쓰면 당장 걸립니다. 그렇잖아도 시생은 그 집에 볼 일이 있어 자주 들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언젠가 얼굴을 보았더니 미색이 몹시 뛰어나더군요. 그곳에서 일하는 종년들 말을 들으니 평소 책 읽는 걸 좋아한다니 은애하는 연시(戀詩)를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 서책을 뒤져 상대를 연모하는 연정시를 보냈는데 반응이 뜻밖이었다. 쥘부채에 시 한 구절을 적고 화답의 답시를 보내달란 내용이었다. 정도령은 그것을 음란서생 화자허에게 보여줬고 결과는 이규보의 회문시(回文詩) 답장으로 낙착됐다. 그날 담을 넘어간 정도령에게 처녀가 말했다.
"도령께선 내 처지가 어떤지를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아직은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고 이곳에 있다 해도 영원히 있을 수 없지만 언젠가는 나가게 되겠지요. 내가 도령의 청을 받아들여 평생 지아비로 생각한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나중에라도 첩실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소, 낭자."
"그럼 이렇게 하시죠. 내가 본 서책에 이틀 후가 길일이니 그날 술시(戌時)에 오십시오. 소녀가 몸을 단정히 하고 도련님을 낭군으로 맞아들일 준비를 하겠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십시오."
상황이 묘한 쪽으로 전개되자 집안 식구들은 안도한 빛이 역력했다. 민우기 대감은 아들을 잠시나마 의심한 마음을 되돌렸고, 잔뜩 독이 오른 민대감의 둘째 도령 민지운은 자리에서 몸을 솟구치며 화자허에게 삿대질했다.
"그러니까 누이 복수를 하려고 네놈이 우리 집을 출입했다는 얘기냐! 네 이놈, 보아하니 우리 아버님과 불미스러운 일로 집안을 쑥밭으로 만든 걸 보면, 필경은 내 형의 죽음에도 관여돼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시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친구라고 믿었던 정가 놈과 공모해 형수를 파멸로 몰아 떨굴 생각을 했다는 건 백 번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다."화자허의 표정은 냉랭했다.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정도령 말에 따르면, 이집 둘째 도령이 제 형수를 은애하고 있다 했소. 형님이 비명횡사했으니 손에 넣는 건 마음 먹기 달린 일이지만, 그래도 격식을 갖춰 첩실로라도 받아드리려는 건 주위 사람 눈이 있기 때문이라 했소."
"당치않은 소리! 이젠 허망한 말로 죄 없는 나를 물고 늘어지는 구나. 아버님, 이놈들을 관아에 넣어 물고를 내야 정신을 차릴 것 같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저 화자허인가 하는 놈이 정도령과 짜고 우리 집안에 똥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형수의 주검이 발견되던 날 저놈이 별당에 들어갔다 나온 것을 아버님도 아시잖습니까.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저놈이 신발까지 들고 방안으로 들어간 것을요!"
"엉뚱한 누명 씌우지 마시오. 나는 별당 아씨가 오라 하여 들어간 것 뿐이오."
"그게 이상한 일이오. 형수님이 유곽에 있는 여인처럼 치마말기를 함부로 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화자허라는 당신을 불러요?"
결론 없는 소란스러움이 한동안 계속되자 정약용이 분위기를 정리하고 나섰다.
"나도 처음엔 화자허라는 김씨 성을 쓰는 얘기꾼을 의심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 분은 아무 혐의가 없어요. 내가 알고 싶은 건 둘째 도련님의 행적이오. 사건이 나던날 밤, 둘째 도령은 어디 있었습니까?"
"집에 있었소. 책을 읽다 속이 안 좋아 바람 쐬러 나왔는데 중문 쪽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저 사람을 봤습니다."
"물론 그랬지요. 한데, 내 생각은 그렇지 못합니다. 별당에 있는 아씨 방에 들어간 건 둘째 도령이 먼저였소이다."
"내가 뭣 때문에 그 방에 들어간단 말이오?"
"조금 전 화자허께서 말씀하지 않았소. 도령이 형수를 은애하고 있다고. 그것을 정태현 도령에게 들었으니 틀림없을 게요."
"그래요! 내가 형수를 좋아하는 게 무에 문제란 말이오?"
"그게 문제가 아니라, 도령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하루 전 도령께선 유월이를 통해 세 자루의 황촉을 별당에 보내 직접 촛대에 끼게 했소. 그 황촉은 향초라는 것으로 본시 두 가지 성분이었소. 하나는 미초(媚燭)라 하여 초의 심지에 음성의 강력한 흥분 효과를 묻힌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통 효과를 나타내는 마비산 성분이 있는 것이었소. 도령께선 유월이로 하여금 그것을 별당에 꽂게 했는데 사건이 난 직후 그 초들이 사라졌소. 도령은 이 일을 어찌 생각하오?""그런 초가 있는지 모르나 난 아는 바가 없소이다."
"물론 그렇게 말할 것이오. 황촉을 도령이 가져갔으니까."
"내가 왜 그것을 가져갑니까?"
"별당의 사인은 해부를 함으로써 밝혀졌소. 우리 생각은 그렇소이다. 범인은 별당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으나 응하지 않자 곧장 난행으로 돌변했소. 쥘부채에 회문시 한 구절을 적어 다시 갖다놓은 것이오. 별당은 정도령이 갖다놓은 것이라 생각하여 그걸 펼쳐 읽다 독극에 중독됐소."
정약용의 눈짓을 받은 관원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민지운의 몸에서 쥘부채를 찾아냈다. 거기엔 '낭신박여운(郎信薄如雲)'이라 끼적여 있었다. '님의 약속 믿음없기 뜬그름 같다'는 내용이다."
민지운은 섬뜩할 정도로 웃음을 터뜨리더니 차가운 어조로 뱉어냈다.
"내가 그년을 본 건 형님보다 먼저요. 어느 날 형수 신분으로 들어왔으니 마음에 담은 생각은 잊어버렸소. 그런데 형님이 돌아가신 후 내 마음을 전했더니 당찮은 시구를 끼적이며 답시를 달라는 게요. 그년의 생각대로 글을 못 써오자 이 얘길 전해들은 정가 놈에게 마음을 쓰기 시작했소. 어디 그뿐이오. 화자허란 놈도 그년의 은밀한 곳을 파고들었을 거요. 며칠 전 정가가 쥘부채에 답시를 가져오자 그년은 이틀 후 몸을 허락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돌려보낸 걸 보았소이다. 해서, 내가 정가가 준 것이라 하여 쥘부채를 줘 중독시켰소. 나는 다음 날 유월이에게 황촉을 꽂게 하고 별당에 들어갔는데 그 못된 년이 독극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내겐 죽어도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저 화자허인가 반쯤 허리 부러진 작자나 정가 놈의 어디가 좋아 그런지 몰라도 그런 년을 살려둘 수는 없소이다!"불쑥 자리에서 일어난 화자허가 자신의 바지춤을 밑으로 내렸다. 덜렁한 물건이 흔들려야 할 곳이 여인네처럼 밋밋했다. 그는 이공공처럼 양물과 고환을 거세한 환자(宦者)였다.
[주]
∎항인(行人) ; 관아에서 길을 안내하는 사람
∎책사(冊肆) ; 서점이라는 뜻이나 얘기꾼으로도 사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