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골조까지 올린 집을 둘러 본 아내는 그날 저녁, 불고기집에 기분 좋게 회식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집이 맘에 드세요?""그럼요, 이게 우리집인가 싶기도 하고, 벌써 집을 다 지은 거 같아요. 추운데 고생 너무 하셨어요. 오늘 한 턱 낼 테니까 맘껏 드세요." "내부공사 시작되면 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텐데. 돈 아끼셔야죠." "까짓 거, 집짓기 시작할 때부터 생각 없이 시작한 일인데요. 걱정 없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되겠지요."세상만사 걱정이 없어 보이는 아내의 말을 듣고 있자니 목재를 가득 싣고 집터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아슬아슬한 바닷가 길로 접어들어 진땀을 뺐다는 운전기사 아저씨의 "되돌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쩌겠소? 그냥 왔지"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밤, 아내와 아이들은 목수들이 머물고 있는 사글세방이 비좁아 근처 암자에서 보냈고 그 다음날은 모텔에서 보냈습니다. 그렇게 동가식서가숙하면서 이틀을 머물다가 아이들과 함께 다시 공주로 돌아가는 아내가 혹여 돈 걱정으로 잠 못 이룰까 싶었습니다.
"벌써부터 자금에 구멍 나기 시작하긴 했는디 걱정하지 말어. 지붕까지 올렸으니 정 자금사정이 어려우면 시간을 두고 내가 조금씩 마무리하믄 되니께." "걱정 안 해. 공주 집 팔게 되면 500만원이 생기잖아.""팔릴 거 같혀?""이 사람 저사람 보고 갔으니까 팔리겠지."목수들 말대로 사소하게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아내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10여 년에 걸쳐 한 푼 두 푼 모아왔던 아내의 '티끌모아 태산'이 깎여나가 불과 보름 만에 바닥을 보이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갱년기 증세로 날섰던 아내, 집 보며 여유 되찾아
시골생활을 시작한 지 3년쯤 지날 무렵에도 그랬습니다. 아이들 옷가지가 흙범벅이 되곤 했던 질퍽거리는 마당에 산에서 쫄쫄거리며 흘러 들어와 세탁기를 돌리기 힘든 식수. 장마철 똥물 튀기는 재래식 화장실에 시도 때도 없이 쥐새끼들이 부엌을 휘젓고 다녔지만 태연했습니다. 10년 가까이 한 달에 60만 원의 생활비로도 끄떡 없이 잘 살았습니다. 근심걱정 접어두고 살고자 했던 내가 오히려 걱정할 만큼 태평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시골생활 10년째로 접어들면서부터 갱년기 증세가 찾아 왔고, 불편한 시골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소박한 삶을 지상과제처럼 여겼던 나를 무능력한 남편 취급할 정도로 날이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소박하게 살아왔던 시골생활을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아내였는데 모양새 갖춰 가는 집에 홀딱 반해 예전처럼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가겠노라 '대책없는' 마음자리를 되찾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대책 없는 부부였습니다. 번듯한 목조 주택을 지으리라고는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터를 구하기 전까지 보금자리를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습니다.
나는 목수들로부터 '집주(집주인이라는 뜻)'라 불리우고 있었지만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설계도면을 그린 아내가 선택한 돌 회색의 '아스팔트 싱글'이라는 것이 한창 지붕을 장식하고 있었지만 '저게 아스팔트 싱글이라는 것이로구나' 남의 집 구경하듯 멍하니 올려다 보고만 있었습니다.
윤구씨가 그때그때 필요한 건축 자재 주문서를 내밀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냉큼 건축자재상에게 돈을 송금해 주고 주문서에 빠져 있는 소품들을 구입하기 위해 철물점을 들락거리며 잔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커피나 목재를 나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다고 넉넉한 건축자금으로 여유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3000만 원으로 30평짜리, 그것도 다락방을 두 개씩이나 올리는 목조주택을 짓겠다는 자체가 무모한 짓이었습니다(다락방을 지어주겠다고 제안한 것은 윤구씨였다). 처가에서 목재며 창호를 내주고, 목수들의 팀장인 윤구씨가 인건비를 낮게 책정해 공사를 시작했다고 하지만 손에 쥐고 있어야 할 자금은 최소 5000만 원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0만 원으로 대책 없이 집짓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윤구씨 말대로 '집을 짓다보면 다 짓게 되어 있다'는 그 대책 없는 믿음이 맞아 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기초공사를 시작하면서 이제 비로소 집을 짓는구나 실감하고 있을 때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로부터 2000만 원이라는 돈이 통장에 찍혀 들어왔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돈 다발이 뚝 떨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대책 없이 집 짓는 과정에 나타난 귀한 손길들사실 집 짓기 전에 이것저것 따졌다면 여태 시작도 못했을 것입니다. 애초에 계획하지 않았던 집짓기였듯이 집 짓는 과정 역시 꼼꼼하게 계획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윤구씨 역시 공사 일정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한 일손들을 불러 들였고 그때그때 필요한 건축 자재들을 구입해서 썼습니다.
경험 많은 윤구씨 나름대로의 계획된 진행이었겠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전혀 계획서에 없던 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무계획적인 우리 부부와는 상관없이 집은 하루가 다르게 성냥개비 쌓듯 척척 완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대책 없이 집을 지어가는 과정에서 귀한 손길들이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전혀 계획에 없던 뜻하지 않은 도움의 손길들이었습니다. 전기공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애초에 전기설비업자를 따로 정해 놓지 않았는데 생면부지의 전기설비 업자를 만났던 것입니다.
본래 공주에서 건설현장 소장 일을 하던 외사촌 동생이 잘 아는 전기설비업자를 보내 주겠다고 했습니다.
"전기설비하려면 보통 평당 9만 원 정도 하는데 7만 원 정도로 해주겠데요.""거리가 멀어서...""출장 가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잘 아는 사람이니까 믿고 맡겨도 돼요.""출장비도 줘야겠지.""형 집 짓는 데 도움도 못 주고 있는데 그런 거 걱정 마세요. 출장비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나는 가능하면 어떤 일이든 비용이 조금 더 든다 해도 고흥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었습니다. 집을 짓고 나면 평생을 함께 할 사람들이니까요.
외사촌 동생은 공사 진행 상태에 따라 전기설비업자를 보내주겠노라 했지만 건설현장 소장이라는 안면 때문에 고흥까지 내려와서 싼 공사비로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 무렵 집 짓는 공사 현장을 구경하러 온 근처 암자에 사는 스님에게 사정 얘기를 했더니 잘 아는 전기설비업자를 소개해 주겠다며 즉석에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평당 10만 원 정도 한다는데 오라고 할까요?""그 정도 한다고들 하는데, 9만 원에 할 수 없을까요?.""그것도 아주 싸게 하는 거라 안하요."찜찜해 하고 있던 차에 때마침 전화 한통이 걸려 왔습니다. 집 터 다지는 일을 도왔던 굴착기 기사 아저씨였습니다.
"저번에 얘기했던 전기 공사는 어떻게 하기로 했소?""그렇찮아도 고민 중인데 잘 아시는 분이 있남유?""좋은 사람이 있는디요.""아 그래요? 평당 얼마 정도 한답니까?""잠깐만 기다려 보시요이. 내가 잘 얘기해 볼테니께."굴착기 기사 아저씨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고 전기 설비를 평당 7만 원에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굴착기 작업을 할 때 윤구씨와 신경전을 벌어가며 자기 방식대로 고집스럽게 일했던 기사 아저씨. 그럼에도 집주인 나는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몇 만원의 웃돈까지 얹어주었는데 그것이 공사비 저렴하고 사람 좋은 전기설비업자 소개로 되돌아 왔던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물질 문명 누리며 살아도 마음에 여유 없으면 무슨 소용우리 식구가 평생 살아갈 곳, 전남 고흥군 포두면에서 생활하고 있는 전기설비업자인 김 선생은 속 터질 만큼 느리게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짬짬이 집 짓는 현장에 찾아와 하루 이틀에 걸쳐 전기선이 들어갈 자리에 구멍을 뚫어놓고 며칠 후 다시 찾아와서 전기선을 넣었습니다. 전기선을 설치하는 기간만 사나흘. 거기다가 콘센트 설치하고 전등 다는 데 하루 이틀, 사나흘이면 끝낼수 있다는 전기공사가 일 주일 넘게 걸렸던 것은 한 번 찾아오면 두세 시간씩 잠깐 잠깐 일을 하고 돌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뒷일을 거들어 주는 조수도 따로 없었습니다. 하루는 아들을, 또 다른 날은 부인과 딸을 조수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말을 건네고 싶을 정도로 김 선생네 가족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이구, 오늘은 따님도 오셨네요. 고등학교에 다니나?" "대학원생인디요.""예~에!""워낙 동안이라서 술집에 가믄 민증 내놓라 안 허요.""전공이 뭐디유?.""한국사요.""우리 큰 애도 역사를 전공하고 싶다는디, 한국사를 전공하고 있다면 지수걸 교수님을 알겠네요?""말씀 들었어요. 공주대에 계신.""그 분하고 지난번에 공주에서 집단 학살지 조사 작업을 같이 했는디." 느려터지게 사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나는 김 선생 가족들이 찾아오면 기분 좋게 이런 저런 사는 얘기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윤구씨는 일의 진행이 느려 공사에 차질이 생긴다며 속 터져 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유만만한 김 선생이었습니다.
"아, 걱정 마소, 공사에 차질없이 할 테니까."집주인인 나는 김 선생에게 하루 일당을 계산해서 공사대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면글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느리게 일처리를 한다 할지라도 입주 전에 전기는 설치될 것이고 전등에서 훤하게 불을 밝히게 될 것이니까요. 훗날 벽지 도배를 할 때 콘센트 설치가 늦어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집 짓는 목수들 입장에서는 속 터질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집주인인 내겐 잃은 것 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 부부가 가진 게 쥐뿔도 없으면서 분수에 넘치는 집을 대책 없이 짓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더니 훗날 김 선생은 예상치 못했던 고마움을 베풀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외등이며 거실 천장에 매달아 놓는 큼직한 전등 등을 거저 내주기도 했습니다. 외등은 앞뒤로 두 개면 충분하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집 주변을 빙 돌아가며 예닐곱 개의 외등을 설치해 주었던 것입니다.
김 선생처럼 내가 만난 고흥 사람들은 대부분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흔히들 사람은 그 지역의 자연을 닮는다고 합니다. 대도시에 비해 교통이며 문화적인 여건이 한참 뒤떨어져 있다고들 하지만 고흥 사람들은 주변에 널린 산과 바다만큼이나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산과 강을 죄 파헤쳐 제 편리대로 물질문명을 누리며 살아간다 한들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집주인이 간섭하지 않고 목수한티 믿고 맡겨 비 안 온 거예요"
어쨌든 전기설비가 시작될 무렵 지붕을 올리는 작업과 동시에 외벽 마감 작업을 했습니다. 외벽 마감은 처가에서 가져온 나무 판때기로 폼나게 설치하기로 윤구씨와 약속이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참도 없이 힘들게 일하고 있는 목수들을 보고 있자니 차마 그 일을 요구하질 못했습니다.
"나무로 외벽을 하면 일손이 많이 들죠?""아무래도 그렇죠.""일손 많이 안들고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나요?""시멘트 사이딩으로 하면 되긴 하는데."결국 윤구씨와 상의 끝에 외벽 공사 바로 직전에 일손 많이 들지 않고 가격 저렴한 '시멘트 사이딩'을 설치하기로 결정해 곧바로 주문했습니다.
그렇잖아도 예상치 못했던 한파가 아랫녘까지 몰아쳐 목수들이 점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서울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10도 이상의 온도 차이가 나는 남쪽 바다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겨울 바다가 그러하듯 거의 매일같이 칼바람이 불어 닥쳤습니다.
지붕에서 작업하는 목수들이 미끄러져 낙상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바람이 거칠게 몰아쳤습니다. 바람만 불지 않으면 포근한 날씨였지만 차가운 바람이 체감온도를 뚝 떨어뜨렸습니다. 옆에서 잔일을 거들던 나는 재활용조차 할 수 없는 목재 쪼가리들을 골라 모닥불을 지펴놓곤 했지만 목수들은 손 녹일 틈 없이 일에 매달렸습니다.
지붕 위에서 위태롭게 작업 하는 목수들을 보면서 목수 일을 했던 막내 동생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 왔습니다. 힘겹게 일하고 있는 목수들 모두가 동생처럼 안쓰럽게 다가왔습니다. 지붕 아래에서 마냥 지켜보고 있기가 미안했습니다.
"나도 올라가 거들까요?"날다람쥐처럼 지붕 위를 성큼 성큼 걸어 다니는 윤구씨는 손을 내저었습니다.
"형님은 그냥 커피나 한 잔씩 타 다 주세요. 지붕에 올라가 작업하기 쉽지 않아요."그 이름도 생소한 '아스팔트 싱글'이라는 것으로 지붕 마감공사를 진행하고 있을 무렵 추가로 주문한 외벽 마감제인 '시멘트 사이딩'이 도착했습니다. '시멘트 사이딩'이라는 게 알고 보니 슬레이트처럼 생긴 것이었는데 적당한 크기로 재단되어 있어 필요에 따라 외벽에 잘라 붙이면 그만이었습니다. 그 크기와 두께가 일정치 않은 처가에서 가져온 목재 판때기로 작업을 했다면 윤구씨 말로는 일손이 두 배 이상 들어갔을 것이라 합니다.
'시멘트 사이딩' 작업으로 하루 이틀치 이상의 일손을 보탤 수 있어 윤구씨의 인건비 부담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공사비가 지출되긴 했지만 인건비를 턱없이 낮게 책정한 윤구씨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습니다.
돈으로 안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날씨였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고생께나 했지만 날씨 역시 우리를 도왔습니다. 지붕 공사를 마무리 하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자동차 안에서 해병대 출신이라는 김종수씨가 기분 좋게 말했습니다.
"지붕 올릴 때까지 비가 오질 않아 참 다행이었네요.""비 오면 다들 푹 쉬면 되잖아요?""그게 아니고요. 아무래도 목조 건물이다 보니 비 맞으면 나중에 집주들이 애를 많이 먹으니까요.""그러네요.""집주들이 이것저것 참견하게 되면 지붕을 올리기 전에 꼭 비가 오곤 했는데 선생님네는 비가 한 번도 안 왔잖아요. 이것저것 간섭하지 않고 목수들 한티 믿고 맡기셔서 그런 거 같아요.""사실 나도 말 많은 놈 인디, 일머리를 알아야 참견을 하죠."목수들에게는 집 짓는데 어떤 예감 같은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집주들이 몇 가지의 단편적인 지식으로 시시콜콜 참견을 하게 되면 일이 늦어지고 지붕을 올리기 전에 비가 온다던가 하는 골치거리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지붕을 완성할 때까지 바람은 심하게 불었지만 비가 전혀 오질 않아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공사를 시작한 지 보름을 넘기면서 온몸 구석구석이 욱신욱신 거려왔습니다. 나보다 몇 배나 더 힘들게 일하고 있는 목수들 앞에서는 차마 '아이고' 소리를 내지르지 못하고 꾹꾹 눌러 참고 있었는데 목수들 중에 누군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나온 신음 소리를 들었던 모양입니다.
"힘드시죠? 우리야 늘 하는 일이지만 힘드실 겁니다. 집 짓다가 치아를 몇 개나 뽑은 집주도 있습니다. 몸 관리 잘 하세요.""새집 짓는 일이 좋은 일인지 어쩐지 갈수록 헤깔리고 있는 참인디, 암튼 좋은 일이 있으면 좋지 않은 일도 찾아오기 마련 아니겠슈?"그랬습니다.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은 한 몸처럼 따라 다니기 마련이었습니다. 편하게 새 집 짓고 살겠다고 수많은 나무들로 치장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내 몸인들 온전할리 있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자업자득이기도 했습니다.
지붕과 벽체를 완성하는 것을 보면서 다시 충남 공주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매달 휴먼 다큐멘터리의 원고를 써오고 있는데 그 주인공을 미리 섭외해야만 했습니다. 공주 집에 도착해 보니 큰 아이 인효 녀석이 실실 눈치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왜 그려? 송인효 너 무슨 사고 쳤지?""컴퓨터가 고장 났어.""니 컴퓨터 저번에 고장 났다고 했잖어?""아빠 컴퓨터.""뭐? 그럼 거기에 있는 자료가 다 날아갔단 말여?" 흥분을 가라앉히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컴퓨터가 먹통이 되어 있었습니다. 모니터에 메인 화면조차 뜨질 않았습니다. 문서 파일에는 접근조차 못했습니다. 녀석이 인터넷을 통해 게임을 하다가 바이러스에 된통 당한 듯싶었습니다. 그 놈의 바이러스가 내 머리 속까지 깊숙이 파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송인효 너! 이 눔 자식이.""아빠 자료, 외장 하드디스크에 옮겨놓지 않았어?"외장 하드디스크에 옮겨 놓지 않았다면 출판을 준비하고 있는 원고 자료는 물론이고 공주 왕촌 집단 학살지에서 희생당한 유가족들을 동영상으로 담아 놓은 증언록 등의 귀중한 자료들이 죄다 날아갔을 것이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집 한 채가 뚝딱 세워져가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준비해 온 자료들이 한 순간에 뚝딱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