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5년, 그리고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조선일보> 목소리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상소의 정신으로>(2000년 3월 3일자 사설 제목)으로 싸운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의 펜은 단순한 펜이 아니라 불의한(?) 권력에 맞서 감연히 빼든 칼이요 총이었다. '비판언론' '자유언론'을 자임한 <조선일보>는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을 인정사정 없이 물어 뜯었고, 그 처참한 결과는 다들 아시는 바와 같다.
글 서두에 느닷없이 지난 10년의 감상을 덧붙이는 까닭인 즉, 28일자 양상훈 칼럼 <30년前 대통령에 "나라 지켜달라" 기원>을 보고 <조선일보>의 달라진 언어에 새삼 충격을 받아서다.
칼럼은, 제목이 시사하듯, 안보에 무능한 현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오죽 못 미더웠으면 사람들이 죽은 지 30년도 더 지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나라를 지켜 달라"고 기원했겠느냐는 것이다.
내용만 놓고 보면, 대단한 비판 강도다. <조선일보> 지면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 이명박 정부에 대해 좋은 말만 내보내던 <조선일보> 입에서 이처럼 강도 높은 비판의 말이 튀어나올 줄 그 누가 예상했을까.
이를 통해 조선일보가 비록 겉으론 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합해서 비상한 시국을 견뎌내자는 식으로 말하고는 있으나, 그러나 속으론 저들의 무능함에 치를 떨고 있음을 조심스레 가늠해 볼 수도 있을 게다.
하긴 천안함 사태 터지고나서 정부 대응이 하나라도 제대로 된 게 있었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헛발질의 연속이었고, 붕숭아학당을 방불케 하는 저질코미디의 남발이었다. 아무리 이명박 정부를 감싸고 도는 <조선일보>라도 눈에 빤히 보이는 것마저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을 터.
교묘한 편집과 어거지 기사로 독자의 눈을 잠시 멀게 할 수 있다지만, 그러나 그들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실망감만은 막기 어려웠을 것이다. 말하자면, 양씨의 칼럼은 이 대통령과 현 정부에 대한 잠재된 불만의 표출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양씨가 이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이다. 칼럼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명색이 비판글이면서도 어찌 된 영문인지 이 대통령을 질타하는 따끔한 말 한 마디 없다.
하나하나 새겨 읽으면 분명 이 대통령 잘못이고 그의 책임으로 귀결되는데도 정작 그를 꾸짖는 비판은 찾아보기 어려운 이 놀랍고 기묘한 미스터리. 이 미스터리는 우리 군의 '매너리즘'을 지적한 이 대통령의 말을 소개하면서 "이 매너리즘은 어디에서 왔을까. 인사의 매너리즘에서 왔다고 생각한다"고 자문자답한데서부터 시작한다.
양 씨는 매너리즘 인사의 대표격으로 원세훈 국정원장과 이상의 합참의장을 꼽는다.
칼럼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장은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적들과 최전선에서 맞서야 할 사람"인데도, 그러나 "이런 나라의 국정원장에 서울시 행정공무원 출신이 임명됐다"고 한다. 누가 이런 사람을 임명했는가?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러나 여기에 주어는 없다. 상기한 대로, 모든 문장이 영어로 치자면 수동태로 기술돼 있다.
칼럼에 따르면, 또한 "우리 군 작전의 최고 책임자"인 합참의장도 "합참 근무 경력 없이 합참의장으로 승진"한 케이스다. 합참은 "합참은 육·해·공의 합동작전을 지휘해야" 하므로 "합참 근무 경력이 필수"인데도 "이 기본을 무시하고" 인사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런 인사를 누가 했나?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러나 역시 여기에도 주어는 없다.
칼럼에서 이 대통령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장면은 딱 한 군데 나온다. 대통령이 충남 아산 현충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결의를 따라 "살려고하면 죽고 죽으려고하면 산다"고 썼다고 기술한 후반부다. 그나마 "바로 그 각오로 안보책임자들을 임명했으면 한다"는 말(총 20字)이 전부다.
서울 국립현충원에 갔다가 우연히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참배객들이 방명록에 '우리나라 지켜주세요' '우리나라 보살펴 주세요'라고 쓴 글들을 보았다는 말은 그 다음에 나온다. 양 씨는 이 말을 받아 "왜 국민들이 죽은 지 30년이 넘은 대통령에게 '나라 지켜달라'고 비는지 모두가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로 칼럼을 끝맺는다.
뭔가 비판은 하는 것 같은데 주어는 없는 오묘·신묘·현묘한 미스터리가 "이 대통령이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 대신 "모두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둘러댄 칼럼 마지막 문장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셈이다. 이제 '상소의 정신'은 쓸모가 없어졌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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