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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 <부모> 김소월

 어머니날에
어머니날에 ⓒ 영화, 가고파

김소월 시인의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 알아보랴'라는 시구처럼, 부모님에 대한 은혜와 사랑을 살아 계실 때 깨닫기는 정말 어려운 것 같다. 해마다 돌아오는 '어버이날'. 이젠 찾아뵙고 인사드릴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것이 너무 쓸쓸하다. 왜 진작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나는 효도를 하지 못했을까.

누군가 부모한테 하는 효도는, 그 부모가 하는 효도를 그대로 본받아 배운다 했으나, 나의 부모님은 지극한 효성심을 가진 분들이셨는데, 난 돌아가신 부모님의 효성심의 십분의 일도 가지고 있지 못하니, 이런 말도 사람 나름인가 보다.

이렇게 눈이 부시게 환한 5월이 되면, 어머니께서 맛있게 끓인 된장찌개가 올려진 둘레상에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식사를 했던, 그 어린시절이 정말 그립다.

가끔 어린 시절 그 구수한 된장찌개의 맛을 잊지 못해 여러가지 재료를 넣고 어머니의 솜씨 흉내내지만 내가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어머니의 된장찌개 맛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그것은 내가 끓이는 된장찌개는 항상 '슈퍼마켓용 된장'이 들어가서일 터.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이렇듯 따뜻하고 구수한 것만 있진 않다. 어머니가 주로 드시던 깡보리밥에 얽힌 아픈 추억도 있다. 어머니는 구수한 된장찌개도 잘 끓이셨지만, 삼층밥(위에는 쌀을 앉히고 중간에는 보리쌀과 쌀을 약간 섞고 맨 밑에는 순 보리쌀)도 잘 지으셨다.

어머니가 짓는 삼층밥은 어떻게 보리쌀과 흰쌀이 하나도 뒤섞이지 않았을까 지금도 신통하다. 맨 위에 앉힌 쌀밥은 항상 이가 성치 않는 할머니께 드렸고, 그 다음엔 아버지, 그 다음엔 쌀과 보리를 반반 섞어 우리 형제들에게 주셨다. 그리고나면, 가마솥의 맨 밑에 깔리 깡보리 누룽지밥은 항상 어머니 차지셨던 것이다.

내 어릴 적(60년대 초반)에는 쌀이 아주 귀했다. 귀한 쌀밥을 할머니,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에게 밥 다 퍼주고,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씀 하셨던 것이다.

"난 속이 불편해서 못 먹겠다. 너희들 많이 먹어..."

어머니는 속이 거북하다고 보리밥숭늉만 드셨다. 그런데 나는 철이 어느 정도 들 때까지도 내 어머니는 속(위장)이 불편해서 식사를 못하신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다. 요즘은 일부러 건강을 생각해서 먹는 보리밥. 된장찌개에는 쌀밥보다 사실 깡보리밥이 좋다. 어머니께서는 날마다 보리쌀을 삶아 '보리밥 바구니(보리쌀은 딱딱해서 한번 삶아서 밥을 해야 한다)를 시원한 뒷마당의 처마 밑에 매달아 두셨다.

이 보리밥 바구니가 텅 빈 것은 집에 먹을 쌀이 없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마치 냉장고가 텅 빈 것처럼…. 

 어머니
어머니 ⓒ 영화, 가고파

어머니는 살림이 조금씩 나아졌을 때도 늘 '보리밥 바구니'만은 귀하게 챙기셨다. 생각하면 어머니께선 돌아가시는 날까지 흰 쌀밥을 몇 번 드셨을까 싶다. 철없는 자식들은 어머니 생일날이 되어 어렵게 받은 흰 쌀밥 그릇 앞에 두고 서로 먹겠다고 다투곤 했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쌀을 씻으시다가도 하수구에 쌀이 흘러들어갈까봐 항상 조심하셨다. 그런 어머니께선 식사시간에 참 엄하셨다. 함부로 밥알을 흘리고 밥을 먹다가 남기면 종아리 얻어 맞는 일은 예사였다.

그랬던 어머니셨지만, 집안에 모처럼 찾아오는 손님이나, 탁발승, 그리고 걸인들에게는 정말 후하셨다. 아무리 어려워도 밥을 하실 때는 한숟가락씩 성미(聖米)를 모아두어 그걸로 시주를 하셨다.

그 당시는 6.25 전쟁은 5-6년 정도 지났으나 걸인 행세를 하는 상이군인들 상당했고, 아침이면 밥동냥 얻는 아기 업은 아낙들도 많았다. 그렇게 아침마다 찾아오는 걸인들에게 어머니는 항상 정성껏 밥상을 차려 주셨다.

 어머니의 바다처럼 넓고 큰 사랑...그때는 몰랐었네.
어머니의 바다처럼 넓고 큰 사랑...그때는 몰랐었네. ⓒ 영화, 마부

철없는 시절의 나는 이런 선부인(돌아가신 자기의 어머니를 칭함)의 행동 이해가 잘 안되었고, 도시락 반찬에도 잘 넣어주지 않던 계란프라이를 '걸인의 상'올려주었을 때는 솔직히 어머니가 밉기까지 했다. 지금은 어머니의 크고 넓은 바다 같은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내 어머니는 내 자식이라고 해서 끔찍하게 여기는 요즘의 '엄마'와는 다른 '어머니'셨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쳇말로 정말 나에게는 '쿨'한 어머니셨던 것이다. 그래서 내 어린 마음에 나의 어머니 말씀처럼 나는 '영도다리(그 당시 우는 아이를 달래는 말로 많이 썼다) 밑에서 주워 왔구나 하고, 어머니의 회초리 얻어 맞을 때마다 정말 고아처럼 서럽게 울곤 했던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처럼, 나의 어머니는 여자이셨으나, 한평생 어머니의 길로만 걸어오신 분이시다. 그래서 어머니의 일생을 생각할 때마다, 파랗게 물결치는 보리밭에의 가난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보리피리 불면 온종일 는개 내렸지.
늙은 아버지 젖는 줄 모르고
입술이 부릅트도록 보리피리 불었지.
저녁이면 몸이 무거워
돌아눕지도 못하는 아버지 등에 업혀
필리리 보리피리 불면,
찰랑찰랑 내 옆구리로 낙동강이 흘러나와
필리리 필리리 보리 피리 소리에
황포돛배도 떠나고 필리리 필리리
짝 잃은 고무신 짝들이 떠내려 갔다.
상행선 기적 소리에 주먹밥 뭉쳐 들고 떠난
그 강이 할머니 비녀처럼 흐느끼며 흘러갔지.
필리리 필리리 보리 잎새 닿도록 피리를 불면
막걸리 술에 취해 잠든
아버지의 무덤 위에 안개보다 슬픈 는개 내렸지.
가난이 문둥이 보다 서럽다는 보리밭을 밟는
엄마 곁에 민들레처럼
노랗게 시들은 내 동생
보리밥 바구니에 담겨 멀리 멀리
그렇게 강물따라 떠나갔지.
 -<보리밥 바구니>송유미


#부모#어머니#보리밥#예찬#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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