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변했습니다. 마치 잔뜩 흐렸던 하늘이 맑게 갠 것처럼 아이가 확 변했습니다. 한때는 그 아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고통이 느껴지곤 했습니다. 지금은 그 아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사실 그 아이는 많은 장점을 지닌 아이입니다. 수업시간에 친구들과 자주 잡담을 하거나 생각 없이 말을 툭툭 던지는 버릇을 제외하면 모범생에 가깝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떠들면 그 아이의 이름을 조용히 부르거나 잠깐 일으켜 세웠다가 앉히곤 합니다. 조금 심하게 떠든다 싶으면 앞으로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줍니다.
"우리 지수는 참 좋은 점이 있어. 선생님이 나오라면 짜증 안 내고 환히 웃고 나오거든. 그 웃음 속에는 반성의 의미도 들어 있는 거지?"
"예. 죄송해요. 앞으로는 떠들지 않을게요."
그 아이와는 이런 아름다운 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아무리 부드럽게 잘못을 지적해도 얼굴을 붉히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곤 했으니까요. 자신의 잘못을 잘 모르고 있는 아이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언젠가 그 아이에게 해준 말입니다.
"넌 네 잘못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야. 네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고칠 수 있는데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니까 너는 너대로 섭섭하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잘 모르는 아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잘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지적은 효과를 기대해볼만한 처방은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도 '역시나'였습니다. 처음에는 "선생님 너무 착하세요!"하고 생글생글 웃던 아이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출석을 부를 때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저 또한 그 아이에게 화를 내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었고, 그것을 '사랑싸움'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생산적이지 못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습니다. 그날 아침 한 학부형으로부터 항의 전화가 왔고, 그 문제로 반 아이들과 대책을 논의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한 아이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예민한 사안이었기에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가고 있다가 평소 생각 없이 말을 툭툭 해버리는 아이의 버릇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가 끝내는 버럭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사실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만큼 화가 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기엔 그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화를 내버린 것입니다. 사실 화가 나기도 했고, 화를 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기도 해서 저 자신도 제 감정 상태를 감별해내기 어려웠지만, 내심으로는 일이 잘 되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데려간 곳은 영어전용교실이었습니다. 일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아이를 교무실로 데려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료교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넌 네 잘못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야."
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잘못을 주관적으로 판단하여 단정적으로 말한 것이기에 그 아이의 처지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안다는 것을 참 중요한 일입니다. 배움의 과정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그렇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교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뒤늦게나마 제 잘못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저는 아이의 단점을 단정적으로 말해주는 대신 그날 아침 한 학부형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난 뒤부터 그 아이에게 화를 내게 된 정황까지 마치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듯이 상세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주관적 사실의 객관화하고나 할까요? 시 창작에도 그런 기법이 있습니다. 작자의 주관이나 선입견을 작품 속에 반영하지 않고 몰개성적인 태도로써 객관에 철저해야한다는 것이 <플로베르>를 비롯한 사실주의 작가들의 문학관이었지요. 저도 사실주의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날 저는 아이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더 많이 말해주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고요. 그렇게 약 10분가량 제가 먼저 이야기한 뒤에 아이에게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평소 자기주장이 무척 강한 아이였는데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보아서 그랬는지 아이는 무엇을 체험한 듯 한껏 성숙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날 아침 학부형에게 전화가 오고 난 뒤의 일련의 상황들은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누군가가 개입하여 만들어준 것도 같은, 절호의 교육적 기회였습니다. 만약 그날 제가 아이를 영어전용교실로 데려가지 않고 교무실로 데려와 아이의 단점을 단정적으로 지적하고 교정을 요구하기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에 그랬다면 그날 아이에게 이런 실증적인 사랑의 고백을 하지도 못했겠지요.
"선생님은 널 많이 사랑해. 널 교무실로 데려가지 않고 여기로 데려온 걸 보면 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