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 29일 아침, 난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전날 어디선가 보내온 문자를 보고 결심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보내는 마지막 길을 함께할 만장을 들기 위해서였다. 회사에 월차를 냈고, 집에는 내가 어디에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슬픔과 무력감... 그렇게 집을 나섰다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슬픔으로 보낸 일주일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마구 쏟아져나와도 어떻게 슬픔을 풀어야 할지 몰랐다. 정신없이 일과를 보낸후 달려간 대한문 앞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고 있던 인쇄소에 연락해 추모 스티커를 만들어 돌렸고, 고맙게도 많은 분들이 그 스티커를 어디엔가 붙여 주었다.
만장 자원봉사자는 시청 앞 광장의 한곳으로 모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엔 서로 알고 지내는 듯한 분들 아니면 나처럼 홀로인 사람들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아침밥 따위야 대수냐라고 생각했지만 김밥과 생수가 나왔다. 사람들은 말없이 그걸 삼켰다. 옆에는 민주당 국회원들의 보좌진인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냥 추모객은 앉을 수 없는 VIP석이었던 셈이다.
이윽고 만장이 나누어졌다. 나는 빨간색으로 '佛'자가 쓰여 있는 만장을 들었다. 전날 조계사에서 자원봉사하시는 분들이 만든 것이라 했다. 대나무 만장이 허용되지 않아 PVC로 만든 만장이었다. 분노할 수 있는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만장을 든 사람들을 인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사람의 물결을 헤치고 만장을 든 우리는 꾸역꾸역 앞으로 나갔다. 노제 준비로 광장앞은 부산했고, 확성기가 삑삑 거리고 있었다.
나는 프레스센터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촛불시위 때에나 열려 있는 도로 위였다. 자꾸 사람들이 뒤에서 밀었지만, 만장은 길을 만들 책임도 있기에 경찰과 같이 사람들이 나오는 걸 막았다. 옆줄 끝에 있던 사람이 담배를 빼어 물었다. 담배 연기에 눈이 아팠지만, 나 역시 담배를 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담배 피는 사람을 말렸다. 가벼운 시비가 붙었지만, 금세 담배는 꺼졌고 담배 피운 이는 사과했다.
광화문 쪽에서 운구차가 오고 있었다. 길을 호위하던 우리도, 의경들도 눈이 붉어졌다. 흐느낌 소리가 더해졌다. 이윽고 대통령의 영정이 내 앞을 지나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그렇지만 난 만장을 든 임무를 잊지 않았다. 만장을 들고 최대한 내 자리를 지켰다. 손위 동서가 바로 내 앞쪽에서 행렬을 보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못알아 본 게 다행이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난 아무말도 할 수 없다운구차가 시청 앞에 섰다. 그때 노제가 벌어졌던 것 같다. 운구행렬의 끝에 서 있었기에 난 광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 수 없었다. 크레인에서 색종이가 날렸고, 김제동의 목소리가 들렸고, 윤도현의 노래가 들렸다. 노 대통령의 육성으로 시작한 <아침이슬>을 양희은과 우리가 끝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행렬을 따라 잡아 태평로의 삼성본관 앞에서 다시 운구행렬을 따라갔다. 5월 한낮의 볕은 따가웠고 만장은 견딜 수 없이 무거워졌다. 하얀 장갑 위 팔뚝이 벌개졌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졌을 때 거짓말 같이 모든 상황이 끝났다. 서울역 앞에 도착한 것이다. 만장을 다시 모으는 트럭 위에 올려 놓고 검은 넥타이를 풀어 뒷주머니에 넣었다. 목이 너무 말라 서울역 옆의 패스트푸트점에 들어가 사이다를 마셨다.
이 모든 게 믿겨지지 않았다. 불완전한 배경으로 온전한 엘리트가 될 수 없었던 그는 바로 나였고, 나도 역시 그와 같고자 했다. 입바른 진보매체들이 비판에도 난 언제나 그의 편에 서고자 했다. 이제 그의 실패는 완전해 보였다.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아무말도 할 수 가 없었다.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올 때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침묵이 언제나 깨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