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요시위에 나간 지 햇수로 벌써 4년이 되어 간다. 현실적으로 매번 참여하는 것이 쉽지가 않아 매주 참여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나면 광화문 일본대사관으로 향한다.
수요시위에 나가리라 마음먹게 된 것은 중학생 때의 일이다. 역사, 과학 다큐멘터리를 즐겨봤는데, 8·15특집 위안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된 것이 큰 영향을 주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할머니들이 동원 당했을 때가 나 같은 어린 나이였다는 것에 더욱 감정이입이 확실히 되어 내 이야기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동원된 할머니들의 억울함,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의감에 불타던 중학생에게 이러한 현실은 엄청난 충격이었고 그 분노는 일본을 향해 있었다. 할머니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에 대해서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서 당시 대학을 가면 꼭 수요시위에 참여하리라 다짐을 했었다.
대학에 와서도 수요일 12시라는 시간이나 기회가 없어서 수요집회에 동참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와서도 풀리지 않고 가지고 있던 의문이 있었다. 왜 일제는 여성을 위안부로 동원했는가이다. 이 의문을 풀기위해 정대협에서 주관하는 세미나에도 참여하고 역사NGO세계대회 등 관련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행사에 참여하면서 나의 고민은 더 복잡해져 갔다. 한 가지 사건이 얼마나 많은 사회적 문제가 얽혀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소위 '돌을 깨는' 질문은 "왜 일본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여러 식민지 중에서 유독 한국의 여성들을 전쟁에 위안부로 동원했을까요?"라는 것이었다.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문제였는데도 나는 '생김새가 그나마 비슷해서'라는 어처구니없는 대답 정도밖에 생각해 내지 못했다.
여기에 대한 선생님의 답은 나를 충격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전쟁을 치르면 군사의 사기를 성욕으로 관리하는 데 위안부가 이용된다. 이 때 군부는 군사력이라는 측면에서 성병을 관리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 때, 유교적 가부장제가 강해 성적으로 보수적인 한국의 여성들을 택했다는 것이다.
세상은 정말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계산적이고 잔인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권위적인 가부장제라는 생활세계의 연장선상에 위안부라는 끔찍한 사건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전쟁이 일어나면 여성이 어떤 자리에 놓이게 되는지에 대한 의식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 인권의 문제는 그 사회의 문화와 역사에 관련되어 있다. 역사는 정치와 이어져 있다. 또 그 정치는 한미일동맹이라는 외교문제로 왜곡되어 있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 문제는 비단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세계 평화, 인권에 대한 문제이다. 이렇게 엉킨 실타래처럼 정말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여야 할지 막막해졌다. 그리고 더 생각을 이어나가면 인간의 본성은 원래 악한 존재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까지 뻗어 갔다. 그리고 인간사회는 진정한 평화와 정의를 맞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회의가 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설사 인류가 이상적인 정의를 구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이상향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스스로의 결론에 다다랐다. 하지만 또 거기에서 그러면 나는 어느 자리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하는 생각으로 머리는 계속해서 복잡해졌고 당장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수요집회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에서 읽게 된 책에서 '알려는 노력이나 사유하지 않음 또한 폭력이다'라는 구절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미필적 고의라는 개념과 같이 심각한 인권침해가 존재하여 사람들의 삶을 심각하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을 방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은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 굳세게도 서 있으니~ -바위처럼 중-
경쾌한 노래로 시작하는 수요집회는 참 힘차고 밝다. 하지만 그 동시에 할머니들의 상처 또한 공유되고 있어 한 순간 눈물바다가 되기도 한다. 20년이나 이어져온 수요집회는 바위같은 할머니들의 승리의 현장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만큼 어려움도 컸다.
우선 처음 정대협이 시작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치욕적인 역사를 드러내서 어떻게 할 요량이냐며 수많은 비난 전화가 빗발치기도 했고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로 자신의 경험을 공개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실제로 2005년에야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분도 계시며 아직까지 가슴속에 묻고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분도 계실 것이라 생각된다. 또 지난 16일 돌아가신 김계화옹처럼 고령이신 할머니들은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른다.
수요시위에는 종종 '이렇게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나왔습니다. 얼마나 아팠으면 이러겠습니까'라는 발언을 할머니로부터 듣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부끄러운 사람들은 이 사건을 숨기고 외면하려하고 있다.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비극은 또다시 현실이 된다. 이렇게 할머니들은 앞으로 생길지도 모르는 끔찍한 경험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매주 수요일에 나와 싸움을 하신다.
실제로 월남전에서 고통 받은 베트남 여성에게 한 할머니는 '나는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내 주장을 요구하고 있다. 당신도 한국 대사관에 항의를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광복절에나 반짝 관심이 높아지거나 민족주의적 감성으로 표심을 얻으려는 정치인의 제스처와는 차원이 다른, 보편적 인권에 대한 고귀한 정신이다. 타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이 나의 행복조건이 된다. 나는 나를 위해 수요집회에 참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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