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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었다. 이마에 땀이 돋고 허한(虛汗)이 일어났다. 환절기라지만 기가 약하니 계절의 변화는 상감을 괴롭혔다. 사계절의 운독(運毒)과정에서 자그맣게 만들어진 독기는 시시때때로 몸과 마음을 괴롭혔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시기는 온병(瘟病)이 극심하게 일어난다. 건강관리에 힘을 기울였지만 잦은 기침과 불면증으로 고생하자 내의원에서 내려온 이주부(李主簿)는 처방이 여간 조심스럽다.

"전하, 불기운이 왕성한 여름에서 서늘한 기후가 시작되는 가을로 접어들 때는, 따뜻한 기운 토기(土氣)가 교량역할을 합니다만 목기(木氣)가 왕성해 토기가 제 역할을 못할 때엔 일종의 독기가 발생해 괴롭힘을 당하옵니다. 전하의 건강관리에 정성을 다하고 있사오나 기가 약해지면 영신해독탕(靈神解毒湯)을 드셔야 하옵니다."
"알겠소. 이주부는 그만 물러가시오."

의원을 물리친 뒤 상감은 서안(書案)을 토닥이며 생각에 빠져든다. 요즘엔 잠자리에 들면 달갑지 않은 꿈길에 빠져들었다. 즉위 초에 전흥문의 범궐사태로 관련자들이 층층시하로 물고가 났으나 최근에 내명부 역모사건이 있었던 후론 밤마다 꿈길을 찾아와 괴롭혔다. 기가 허약해진 탓이라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문숙의를 따르던 노론 일파가 죽임을 당했는데도 나의 꿈길을 찾아와 술자릴 여는 건 무슨 뜻인가.'

희미한 안갯속이었다. 참형을 당한 노론의 수장들이 넉살좋게 술잔을 기울이며 껄껄거리는 게 자꾸만 눈에 씹혔다. 상감의 존재는 안중에 없었다. 입가에 비웃음을 깔고 눈가엔 교만함의 칼날이 번뜩였다. 아무리 꿈길이라지만 오싹 소름이 돋고 허한이 송알거렸다.

'저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시작이라 했다. 시작, 뭐가 시작인가. 저들의 뿌리가 튼실해 역모가 드러났어도 아무렇지 않단 말인가? 그렇기에 나의 잠자릴 파고드는가?'

상감은 절망했다. 자신이 보위에 오르기 전에도 삼급수(三急手) 사건이란 게 있었다. 경종(景宗) 때의 일이지만 시대를 무시하고 칼이나 독약, 폐출은 왕실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러한 일을 꾸밀 수 있는 자. 이른바 양반이라 칭하는 사대부들이다.

조선왕조가 한양에 터를 내리자 그들은 하나 둘 힘을 규합했다. 왕권을 강화하려 세조대왕이 장용위(壯勇衛)란 친위부대를 만들었듯 상감도 사도세자의 묘역을 수원으로 옮기는 등 장고의 수순을 모색했으나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명부에서 일하던 서과(徐戈)를 사암(俟菴)에게 붙여 흉중에 담긴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두 달이 흐르는 동안 신해년(辛亥年)이 다가오자 영민한 상감은 조아(朝衙)를 마치고 규장각에 올라가 뭔가를 꺼내들고 골똘해졌다.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규장각에 대한 관심이 유별났었다. 역대 왕들의 저술, 어필(御筆) · 화본(畵本) 등이 어지러이 널린 걸 볼 때마다 그걸 짜임새 있게 둘 장소에 골몰했다. 나라의 기틀을 연 초기의 규장각은 양성지(梁誠之)의 상주로 군왕이 지은 시문이나 저술은 따로 보관할 수 있는 비서각(秘書閣)을 만들었었다. 숙종 임금 땐 종정사(宗正寺) 옆에 역대 왕들의 글씨나 그림 등을 보관할 조그만 집을 짓고 규장각이라 한 게 그것이다.

보위에 오른 상감은 규모를 확대해 정규직책을 마련했다. 학문 연구와 편찬사업의 본산이 된 각신(閣臣)이란 관리다. 그들은 규장각에 머무르며 그곳에서 일어난 하루하루에 대한 일기를 썼다. 내각일력(內閣日曆)이다. 물론 공공적인 기록은 일성록에 기록했다.

획기적인 문화정책은 서얼을 등용키 위해 <서류소통절목(庶流疏通節目)>을 정해 전교를 내렸다. 정조 15년의 이때엔 서얼 출신 각신(閣臣)들이 규장각에 포진했었다. 그들의 눈엔 상감이 왜 내명부의 역모사건을 다스리지 않고 역대 제왕들의 글씨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지에 의혹이 일어났으나 정약용이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전하, 신 정약용 부르심을 받자와 대령하였나이다."
"어서 오시오 사암(俟菴)!"

분위기 파악에 밝은 각신이 옆방으로 물러나자 상감은 좀 더 가까이 오게 한 후 숨겨둔 말을 끄집어냈다.

"사암, 중원에선 문무신료가 좋은 날을 택해 난정(蘭亭)에 모여 흐르는 물로 몸을 씻는 수계사(修禊事)가 있다 했소. 오늘은 신해년(辛亥年) 첫 날이오. 묵은 때를 씻어버리고 새 날 아침, 조종(祖宗)께 고한 후 어룡정의 세수(歲水)를 마십니다. 자정(子正) 넘겨 길은 물을 마심으로써 조선이 나아갈 바를 밝히는 것이니, 오늘을 위해 왕실에선 우물 뚜껑을 활짝 열어 천지의 신께 고하고 물을 떠올렸소!"

어룡정의 세수. 그 옛날부터 제왕들은 왕실의 평안함을 기원했다. 일 년 동안 굳게 닫은 우물 뚜껑을 열어 자정이 넘으면 물을 긷고 뚜껑을 닫았다. 제왕의 우물, 어룡정(御龍井)이다. 이 물은 새해 첫날 군신이 마시는 물이니 세수(歲水)다. 만조백관이 이 물을 마시면 지난해의 좋지 않은 일은 잊어버리고 새날엔 기쁜 일만 있어 달라 기원했다.

왕가나 사대부들은 건물을 지을 때 열두 가지 동물 모형인 어처구니를 지붕에 올려 액화가 들어오는 걸 차단하고 집안이 평안하길 빌었다. 민간에선 새해 첫날 물을 마시며 모든 게 깨끗하게 정화되는 정화수(井華水)를 마신다. 어둑새벽에 길은 정성스러운 물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물은 자정수(子正水)로 인간의 정신을 맑히는 물이니, 과시를 치러 간 아들이나 서방님의 급제를 기원할 때 쓰는 물이다. 그러니 얼마나 정성스러운가. 궁에선 자정 넘어 무예별감의 진두지휘 아래 어룡정 우물 뚜껑을 열고 곱게 물을 퍼 올린다. 감로 자정수(甘露子正水)다.

그 물을 열성조께 올리고 신하들이 편전에 들어서는 조아(朝衙)가 열리면, 상감의 덕담과 함께 신하들에겐 세수(歲水)가 내린다. 더럽고 추한 것, 깨끗하게 결판나지 않은 일들, 사랑이 부족한 일들은 물을 마심으로써 세상의 때에 찌들은 오장육부(五臟六腑)에 낀 때가 씻겨나가길 바란다.

신년 첫날은 화락의 날이기에 편전에선 덕담이 필요했지만 조아(朝衙)가 끝나고 규장각에 오른 상감의 용안은 무겁게 굳어 있었다.

"이보게 사암, 과인은 보위에 오른 후에도 서로 물고 뜯는 일보다 같이 사는 상생(相生)의 법을 좋아해 내가 머무는 곳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했소. 날 죽이려 든 자에게 인과 덕으로 후은(厚恩)을 베풀었는데 저들은 그걸 기만이라 여겨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나를 능멸하고 이젠 내명부에까지 침투해 나라를 훔치고 과인을 죽이려는 계책을 쓰고 있소."

"황공하여이다, 전하."
"태조대왕께서 한양에 도읍을 연 지 4백년,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동안 벽파(僻派)들은 학문의 칼로 민초의 생활을 자르고 온갖 비리를 일삼고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방패삼고 있으니 이 아니 놀랄 일인가."

"황공하여이다, 전하."
"위정자(爲政者)는 하늘의 매서움을 깨달아야 하는 데 한양 땅에 터를 잡은 저들은 자신들이 쥐고 있는 것, 아는 것이 최고인양 다른 사람 말은 무시하기 일쑨데다 파당 짓기를 잘해 스스로의 허물이 드러나면 그걸 타인에게 뒤집어씌우는 것 역시 능란하지 않은가. 과인이 신년 첫날을 기해 규장각에 있는 건 반드시 학문 때문만은 아니오."

"하오면?"
"전임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있던 신득수(申得洙)가 시정(市政)에 나갔다 궁으로 돌아오다 궁문 앞에서 살해됐으니 이것은 과인에 대한 저들의 도전이며 벽파(僻派)의 분탕질이라 생각하오."

"그것은 성급한 판단이라 보옵니다."
"아니오 사암, 그들이 이처럼 행동한 건 내게 대한 도전이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오. 해서···."

상감의 호흡은 짧고 어투는 더욱 강경해졌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정약용을 만났으니 뱃속의 열화는 작은 화산이 돼 분출되는 건 당연했다.

"내금위장 신득수의 주검이 발견된 건 자신들만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교만함 때문이오. 그 자들은 왕권에 도전하고 마음먹기에 따라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음을 과인에게 경고한 것이오. 세상을 떠난 도승지 홍국영이 내게 그런 말을 했네. 안다(知)는 건 입(口)으로 살(矢)을 날려 상대를 상하게 하는 것이니 이거야말로 헛된 지식이니 뭣보다 벽파 무리가 규합하는 걸 막아야 왕권이 선다 했네. 저들은 과인이 볼 수 있도록 신득수의 몸을 성문 앞에 찢어놓았으니 이게 선전포고가 아니고 무엇이리!"

[주]
∎온병(瘟病) ; 염병. 온역
∎화본(畵本) ; 그림을 그리는 데 바탕이 되는 종이나 감
∎벽파(僻派) ; 조선왕조 창업을 기득권으로 삼는 보수파

덧붙이는 글 | 정조가 보위에 올라 가장 마음 아팠던 게 아버지(思悼世子)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가 태어난 건 영조 28년 3월이었고 가례(嘉禮)를 올린 것은 열 살 때인 1762년 2월이었다. 이로부터 넉달 뒤 그의 아버지가 폐서인(廢庶人) 됐다가 뒤주에 갇혀 죽는 참변이 일어난다. 이때의 상황을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閑中錄)>에 절절이 기록하고 있으나, 영조는 아들이 죽은 후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세자의 위(位)를 회복해 사도세자란 시호를 내렸다. 이것은 영조가 범한 씻지 못할 과오로 당파싸움의 희생이었다.
기록을 들춰보면, 동궁이 대리청정할 때 조정은 세자파와 부왕파로 양분돼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양자 간의 갈등과 모함은 영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부자 사이를 이간시켰다. 영조가 진노한 직접적인 계기인 나경언의 상소는 김한구(金漢耈)와 홍계희(洪啓禧) · 윤급(尹汲) 등의 사주를 받은 데서 비롯돼 동궁은 뒤주 속에 갇히고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 배고픔과 울분을 삭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탕평책(蕩平策)을 내세운 영조도 그들의 농간에 좌우되고 만 것이다.
동궁의 죽음으로 모든 건 끝난 것인가? 아니었다. 음모와 모함은 세손과 영조 사이에 다시 꿈틀거렸다. 영조의 나이가 일흔이 넘었으니 왕이 죽은 뒤 자신들의 목숨을 도모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그들은 살얼음 위의 모의를 그치지 않고 자나 깨나 세손의 비행을 찾아 날(刃)을 세웠다. 그렇기에 동궁이 죽고 나서 14년 동안 세손은 긴장과 공포의 칼날 위에서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영조가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뒤를 세손으로 잇게 하자 동궁을 죽음으로 몰아간 정후겸 · 홍인한 등은 세손까지 제거하려는 음모를 끊임없이 획책했다. 그러나 영조가 재위 52년만인 1776년 3월, 여든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조정의 세력판도는 달라졌다. 정조가 탕평책을 주장한 것과는 달리 벽파(僻派)는 시파(時派)를 공격해 자신들을 물어뜯을 수 없도록 송곳니를 공격했다. 큰 가지가 잘려나갔어도 그들은 그침 없이 정조를 위협해 댔으니 왕은 마침내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추리, 명탐정,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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