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비가 내렸다. 대지가 촉촉하게 젖었다. 산천초목이 초록색 물을 잔뜩 머금었다. 금방이라도 초록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싱그럽기 그지없다. 바닷가에 핀 해당화를 떠올리며 '굴비고을' 전라도 영광으로 간다.
해안도로에 해당화가 피었다. 선홍빛 꽃잎이 옛 여인들의 한복자락처럼 곱다. 그 치맛자락이 해풍에 살랑살랑 일렁이는 것 같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꽃망울이 유난히 붉다. 하얀색의 해당화도 활짝 피어 조화롭다.
해당화는 아직 절정이 아니다. 하지만 바닷가를 배경으로 핀 꽃이 아름답다. 꽃도 곱다. 향기도 진하다. 자연스레 콧노래가 흥얼거려진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해당화 핀 백수해안도로는 아름다운 도로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건설교통부(국토해양부)가 선정한 '전국의 아름다운 길' 가운데 앞자리에 서 있다. 이 해안도로는 사철 아름답지만, 그 중에서도 해당화 필 때가 가장 아름답다.
해안도로는 백수읍 백암리에서 원불교 성지가 있는 길용리까지 이어진다. 해당화 꽃도 그 길을 따라 이어진다. 꽃길이 30리나 된다. 이미자의 노랫가락을 따라 찾아든 관광객들의 발길이 도로변 데크마다 서 있다. 렌즈를 앞세운 사진작가들도 간혹 눈에 띈다.
날씨는 좋지 않지만 탁 트인 바다를 보며 맡는 바다 내음은 상쾌하다. 경물도 빼어나다. 막혔던 가슴도 뻥 뚫리는 기분이다. 칠산 앞바다의 섬들도 손에 잡힐 것만 같다. 언제라도 실망시키지 않는 길이다.
동백마을로 내려가 본다. 이 마을은 영화 <마파도>를 촬영했던 곳이다. 시멘트 길이 아스팔트보다 정겹다. 바다도 더 가까워졌다. 바다를 배경으로 일렁이는 보리밭이 그림 같다. 썰물이 만들어내는 물결도 아름답다.
길섶에는 엉겅퀴와 찔레꽃이 절정이다. 늦바람 난 유채꽃도 보인다. 소소한 풍경이다. 답동마을까지 뉘엿뉘엿 걷는다. 여기저기 펜션공사가 한창이지만 도로에서 내려다 본 것과 다른 묘미를 안겨준다.
답동마을에서 나와 다시 해안도로로 올라간다. 아름다운 도로를 한번만 보고 휑- 가기엔 아쉬움이 너무 크다. 차를 돌려 왔던 길을 다시 간다. 조금 전보다 여유가 생겨서 더 좋다. 놓치고 지나쳤던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법성포구가 눈앞에 펼쳐지는 길용리까지 다시 왔다. 원불교 영산성지를 둘러본다. 이곳은 구도의 고행을 통해 진리의 깨우침을 얻은 원불교의 발상지다. 박중빈 대종사의 탄생지를 찾아가는 숲터널이 아름답다. 탄생지는 숲길 끝에 있다.
탄생지에 발자국을 남기고 영광읍 쪽으로 간다. 길은 여전히 한가롭다. 해찰하기에 딱 좋다. 음악소리도 조금 키워본다. 여유 만점이다. 순간 저만치 창밖으로 눈길을 잡아끄는 풍경이 펼쳐진다.
속도를 더 늦추고 유심히 살펴보니 꽃이다. 하얀 것도 있고 빨강 것도 보인다. 연꽃 같다. 아직은 한여름도 아니고, 게다가 올 봄엔 날씨마저 쌀쌀했다. 그런데 연꽃이라니…. 급히 차를 세운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곳으로 향한다. 연 방죽이 틀림없다. 방죽은 두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오른편은 하얀 수련(睡蓮)이 지천이다. 왼편으로는 색색의 컬러로 시선을 붙든다. 인적도 없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수련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 것 같다. 어느새 수련의 색과 향이 온 몸을 감싼다. 마음도 편안해진다. 너그러워진다. 황홀경이다. 천상의 연화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별천지가 따로 없다.
노랑 창포도 무더기로 피었다. 창포와 수련 어우러진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다. 그림의 폭이 4만여㎡나 될 것 같다. 방죽을 따라 도는 산책로도 예쁘다. 두런두런 얘기 나누며 걸으면 제격이겠다. 혼자 걸어도 좋겠다.
수련 활짝 핀 이 곳은 보은강으로 불린다. 정관평(貞觀坪)이 품고 있다. 정관평은 바다를 막아 만든 논.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후 1918년부터 1년 동안 아홉 제자와 함께 막았다는 곳이다.
방죽을 따라 거닐며 맘껏 수련을 감상한다. 절보다도 더 호젓하다. 이맘때 종교색체 짙은 영광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곳이다. 시간을 붙들어놓고 오래도록 머물고만 싶은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