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농사 본능이 뼛속에 각인되어 있다. 사는 것이 바빠, 때론 사는 것이 힘들어 잊고 있지만 언젠가는 뼛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솟아 올라 행동을 지배한다. 그것은 길어진 꼬리뼈처럼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불쑥 오미자 밭을 샀다. 텃밭농사를 풀 반 고추 반으로 지어 본 적이 있을 뿐인데 천 평이나 되는 밭을 사 버렸다.
초보 농사꾼이 오미자 밭 천 평을 사버렸다
"오미자 농사는 양복입고 지을 수 있어요." 이 소리에 홀딱 넘어가 사 버렸다. 100㎞를 오고 가기 시작했다. 주중에는 도시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시골에서 오미자 농사짓는 생활이 시작됐다. 예전보다 바빠졌다. 토요일이면 뒹구는 게 일과였는데 이젠 밭에서 일한다. 우리 밭은 유기농 밭이라 풀도 얼마나 튼실한 지 우리가 풀 농사를 짓는지 오미자 농사를 짓는지 헷갈릴 판이다.
시골 어르신들은 오며가며 농사 훈수를 둔다.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다. 이 말 듣고 이렇게 하면 이게 좋지 않다 하고, 저 말 듣고 저렇게 하면 저게 좋지 않다고 한다. 훈수를 무시하기도 힘들다. 잘 몰라서 우리가 물었는데 애써 답을 해준 분들의 성의에 대해 요즘 말로 '생깔' 수가 없다.
그리고 외지인이 귀한 곳이라 어르신들은 우리로 인해 물 만난 물고기가 되셨다. 세상에 제일 신나는 것 중 하나가 아는 체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버스기사가 버스가 고장 났을 때 손에 기름 안 묻히고 차 고치는 방법이라며 '누구 차 고칠 줄 아는 사람 없어요?' 하고 버스 승객을 향해 소리치면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겠나!
그래서 낸 결론이 올 한 해에는 마을 분 모두를 스승 삼아 이 방법 저 방법을 다 써 보기로 했다. 한 줄은 이 사람 말대로, 또 한 줄은 저 사람 말대로. 지금 내 밭은 두더쥐가 낸 사방팔방 길과 합쳐져 머리에 꽃꽂고 배실배실 웃으며 "여기가 동막골이래요~" 하는 처자 모양이다.
풀 천지 우리 밭을 보시더니 앞집 할머니가 "이 밭은 팔자가 그런 모양이다" 하신다. 시골어르신들은 풀 반 작물 반으로 짓는 유기농 농사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때 맞춰 약을 치지 않고 화학비료를 주지 않는 농사법도 좋아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땅바닥은 제초제를 뿌리더라도 명경같이 말갛게 해 놓아야 "그 사람 열심히 농사지으니 귀농 성공 하겠네" 하고 믿어 준다. 지금 우리는 그 곳에서 반푼이 농사꾼이다.
오랫동안 거의 해 보지 않았던 농사일이라 천 평 농사는 만만하지 않다. 토요일 일하고 집으로 오면 어깨, 허리 등 안 아픈 곳이 없다. 에구구구. 소리가 절로 나오고 새벽에 잠이 깨면 이 생고생을 어찌하노 싶어 잠이 안 올 지경이다. 도시에서 자라 벼포기와 보리도 가르쳐 줘야 알던 남편은 뜬금없이 마누라 따라 농사일를 처음 시작했다.
농사는 뒷전인 남편, 상주 화북까지 유람가나
남편은 농사는 뒷전이고 변화된 삶에서 생기는 새로운 일이 재미있기만 하다. 100㎞길을 무슨 유람 가듯이 이리 뱅뱅 저리 뱅뱅 돌아가니 마음 급한 내가 홧병이 날 지경이다. 절기 따라 밀려오는 농사일을 다 쳐내지 못해서 맘이 급한데 천하태평형인 남편은 하루는 이 길, 또 하루는 저 길 하는 식으로 상주 화북 가는 길을 매 번 바꾸면서 간다.
참자, 참자, 참자 속으로 되뇌다 사월 초파일에는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법주사 외통수 길로 들어가더니 초파일 인파에 길이 막혀 고생하다 결국 정이품송 앞에서 차 돌리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렇게 돌고 돌아 가면 아침에 나선 길인데도 오미자 밭에는 한시나 두 시에 도착이다. 그럼 언제 밥 먹고 언제 일하나? 그리고 무슨 길이 이리도 많은지 대전에서 상주 화북까지 갈 수 있는 길의 경우의 수가 어림잡아 삼십은 더 될 것 같다. 남편이 마음을 바꾸먹지 않음 갈 때마다 새로운 길로 가야 할 판이다.
봄철, 일주일 만에 보는 밭은 못 알아 볼 정도로 달라진다.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정신이 없다. 두렵기조차 하다. 베어 낸 오미자 새순 받을 그물도 치지 못했는데 오미자는 아랑곳없이 줄기를 쑥쑥 키우고 있다. 농사꾼이 직업 정신으로 일하는 줄 알았더니 절기 따라 해야 하는 농사일이 농사꾼을 밀어붙여 쉬지 못하고 일하는 것 같다. 거름 줄 일이 밀려오고, 풀 벨 일이 밀려오고 다음에는 가지 순 정리 할 일이 밀려온다. 이렇게 파도처럼 농사일이 밀려온다.
마음을 비웠다, 적자만 면케 해다오
첫 농사에서 500만 원 흑자를 내려고 했는데 마음을 비웠다. 제발 적자만 면하게 해 달라고 오미자 꽃 붙들고 열심히 빌고 있다. 오고 가는 경비가 만만치 않다. 고속도로비, 유류비, 밥값을 합치면 아무리 못해도 4만 원이 든다. 거기다 외지인 입성이라 동네어르신들 조금 챙길 량이면 7~8만 원이 훌쩍 넘어 든다. 아이를 한 명 입양한 것 같다. 아이들을 붙들고 "공부 잘 한다고 인생 행복한 것 아니다"며 과외를 그만 두고 그냥 혼자 할 수 있는 만큼 하자고 작업을 걸 지경이다.
이제 시작이다. 뭐든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겪는다. 도시인의 선무당식 농사가 우리 삶을 좀 더 복되게 하면 좋겠다. 이 글이 농사 본능을 누를 수는 없고 배우자는 귀농을 반대하는 분들에게 우리처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아님 이럴 땐 우리처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우리를 통해 배우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