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곳곳마다 나무전봇대가 잘 살아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전깃줄을 머리에 이고 있지 않아도 골목집하고 한몸이 된 채 해바라기를 하거나 빨래가 얹히거나 골목덩굴이 몸을 감싸 오르곤 합니다. 나무전봇대를 타고 오른 수세미가 피우는 노란 꽃은 얼마나 어여쁘던지요. 해마다 늦여름이면 마주하는 노란 수세미꽃 이고 있는 나무전봇대를 사진 한 장으로 담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동네 분들은 나무전봇대이고 시멘트전봇대이고 따지지 않습니다. 이런 대목까지 헤아릴 만큼 느긋하지는 않습니다. 모두들 바쁠 뿐더러 힘겨운 살림살이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빠듯하고 바쁜 삶이면서 텃밭을 일구지 않거나 꽃그릇을 돌보지 않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손수 시멘트를 섞고 비벼서 집 바깥벽에 조그마한 꽃밭을 붙입니다. 이 꽃밭에는 상추나 고추나 배추도 심으나 예쁜 꽃을 심기도 합니다. 당신들 스스로 해바라기를 하며 쉬는 골목길 한켠에서 피어나는 꽃망울은 당신과 이웃과 길손 모두한테 웃음꽃을 베풀어 줍니다.
"무슨 약이라고 하는 꽃이라던데." 하면서 빨래를 널던 골목 아주머니는 꽃이름을 제대로 모르면서 예쁜 꽃을 해마다 어김없이 피워 놓고 있습니다. "이게 빨간 녀석도 예쁜데 분홍 녀석은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햇볕이 몹시 잘 들어 아주머니네 함박꽃(작약꽃)은 봉우리가 흐드러지게 벌어져 있습니다. 이웃집 함박꽃은 이제 막 봉우리가 열릴락 말락 하고 있습니다.
"요새 왜 이렇게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이 와요?" "다 아주머니처럼 이렇게 골목을 예쁘게 꾸며 놓으시니까 꽃 보러 오지요." "저번에 누군가는 여기에 와서 우리 집 빨래를 찍은 사진으로 1등을 먹었다고 하던데." "누구라도 이렇게 예쁜 집을 찍으면 1등을 안 받을 수 없어요."
억지스레 예쁘게 보이려고 하지 않으니 있는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있는 그대로 아름답기에 한동네에 살면서 날마다 들여다볼 때마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가끔가끔 길손으로 지나치며 살펴볼 때마다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56. 인천 중구 신흥동3가. 2010.5.27.12:53 + F14, 1/80초골목집 아주머니는 처음에는 당신이 마련한 작은 꽃밭에는 꽃을 심었습니다. 이 꽃들은 스스로 낸 씨앗을 둘레에 흩뿌리며 꽃밭 아래쪽 시멘트로 콱 막힌 틈새에까지 뿌리를 내리며 해마다 새롭게 줄기를 올리고 꽃을 피웁니다. 아주머니 스스로 바라거나 생각한 일은 아니지만, 자연은 아주머니가 꽃밭을 일구고 고운 꽃씨를 심은 손길을 어여삐 여겨 해마다 좋은 선물을 베풀어 줍니다.
57. 인천 중구 신흥동3가. 2010.5.27.12:47 + F16, 1/80초도시개발을 하려는 분들과 철도청 분들은 기찻길 옆에 움트고 있는 골목집 사람들이 기찻길 둘레에 텃밭을 일구는 모습을 몹시 못마땅해 합니다. 그러나 도시개발 공무원이며 개발업자하고 철도청 분들은 당신들이 낸 기찻길에서 오가는 기차들이 얼마나 큰소리를 내며 골목집 사람들을 힘겹게 했고, 기차에서 날리는 먼지 때문에 골목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시달렸는가를 살피지 못합니다. 기차는 기차대로 골목집 옆을 조용히 지나가 주면 좋겠습니다. 동네 분들이 이 메마른 땅에 흙을 퍼 옮겨 일군 어여쁜 동네텃밭에 자갈을 뿌려 망가뜨리는 짓을 저지르지 않기를 빕니다.
58. 인천 남구 용현2동. 2010.5.27.14:04 + F11, 1/80초예전 골목가게는 샷시나 쇠로 된 문이 아닙니다. 나무 널을 여럿 잇대어 붙인 널문을 만든 다음, 이 널문을 여러 줄로 붙여서 바깥막이를 했습니다. 아침에 가게를 열 때면 이 널문을 하나씩 떼었고 저녁에 가게를 닫을 때면 다시 이 널문을 하나씩 붙이고, 옆에 마련한 쪽문으로 빠져나왔습니다. 이제는 널문을 붙였다 떼는 골목가게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백화점이나 무슨무슨 마트로만 물건을 사러 다니니까요. 문닫은 지 꽤 된 동네 골목가게 널문에 동네 꼬맹이들이 우스꽝스러운 낙서를 해 놓았습니다.
59. 인천 남구 용현2동. 2010.5.27.13:24 + F16, 1/80초이 동네에 깃든 사람만 오가는 깊은 골목에 서 있는 나무전봇대는 햇볕을 곱게 받습니다. 오늘날 나무전봇대를 전기줄 얹는 데에 거의 안 쓰고 있지만, 이 나무들을 베어내지 않고 그대로 둔 모습을 보면 참 고맙습니다. 골목동네 집보다 오래된 이 나무전봇대들 가운데에는 한국전쟁에도 살아남은 녀석이 있고, 해방 무렵이나 일제강점기부터 살아온 녀석이 있습니다. 말없이 살아오며 동네를 조용히 굽어살핀 지킴이입니다.
60. 인천 남구 용현2동. 2010.5.27.14:01 + F18, 1/80초한전에서 나무전봇대를 베어내지 않아 이 나무전봇대는 골목집하고 맞붙었습니다. 전봇대 바로 옆에 집을 지으며 옥상으로 올라설 계단받침으로 나무전봇대가 쓰입니다. 그래도 나무전봇대는 좋다 싫다 따지지 않고 골목집 빨래와 함께 고운 여름햇살을 나란히 나누어 받고 있습니다. 저 멀리 새로 서는 아파트숲이 예까지 뻗으면, 이 골목집과 함께 골목전봇대인 나무전봇대 또한 숨을 거두며 흙으로 돌아갈 테지요.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