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시기록을 살피며 정약용은 한 마디 내놓았다.
"김무학은 학문도 깊을 뿐 아니라 도학에 조예가 깊었네. 정중동(靜中動)의 이치에 밝다보니 원수를 맺을만한 사람이 없었지. 그런 그가 갑자기 죽었는가 하면 몸에 나타난 상흔을 볼 때 깊은 원한이 있었던 게 분명하네."
칼을 사용해 살상하는 경우 한두 번 찌르는 것으로 끝맺지만 그의 주검은 달랐다. 상처가 깊은 데다 과다한 출혈을 일으키려 칼을 돌려 뺐으니 의원의 눈에 띄었어도 손 쓰기엔 이미 늦었었다. 정약용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서과에게 묻는다."집에 안 간 것이야?"
"가는 길에 사고가 있었습니다만 그건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으린 김무학 사건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범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게 가능했다면 너와 이런 얘길 나누겠느냐. 그 일은 참으로 이상한 사건이었다. 원한이니 치정이니 도학이니···, 어느 곳에도 이상이 없던 자인데 주검으로 발견됐으니 이상하지 않느냐. 사내가 그런 꼴을 당하는 건 두 가지다. 같은 하늘에 머리를 두르고 살 수 없는 원한이 있거나, 치정에 얽혔거나 그런 것일 게야."
김무학의 검시기록엔 그의 주검이 발견된 건 음 11월 초닷새라 적혀 있었다. 한겨울이다. 지난 해 이 날엔 눈이 내리지 않은 채 날씨만 혹한이었다. 그의 주검은 칼에 찔렸지만 피는 엉겨 붙은 채였다. 칼에 찔린 채 사람이 살해되고 나동그라진 주검이라면 타살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알지만 동기가 없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사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사헌부에 급보가 날아든 건 혜화동에서였다. 전임 판서를 지낸 민동호(閔東豪)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때마침 장인을 찾아온 사위와 딸은 뜻밖의 상황에 아연실색이었다. 사위는 성균관에 적을 둔 준재(俊才)로 소과를 치르고 진사 벼슬에 있었다. 초시에 합격한 후 곧장 성균관에 들어갔기에 관직은 얻진 못한 상태였다.
"지난밤 시생을 불러 학문에 대해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시생에게 장인 어른의 운수가 불길해 장차 수난의 기운이 있으니 처신을 바로 하라는 말씀이 계셨는데···, 이처럼 자진 하실 줄은 뜻밖의 일입니다."
이 자리엔 정약용은 말할 것도 없고 서과까지 나와 있었다. 독물에 중독돼 목숨을 버리는 일은 종종 있지만, 민간에선 쥐약이나 농사를 짓는 데 사용하는 약제를 이용하는 게 대부분이다. 이 자리는 얼핏 보기에도 비상(砒霜)과 같은 독물의 중독이었다. 주검이 있는 방은 당연히 출입을 통제했고 검험을 시작했다. 검시기록은 정약용이 맡았고 서과가 곁을 따랐다."주검의 상태는 어떠냐?"
"몸에 작은 포진이 있습니다."
"색깔은?"
"청홍색입니다."
"눈동자는 어떤가?"
"터졌습니다."
"귀는?"
"부은 채 커졌습니다."
"혀는 어떠냐?"
"혓바늘이 돋고 혀 역시 입술처럼 터졌습니다."
"복부를 살펴라."
"팽창했습니다."
"항문은 어떠냐?"
"부었습니다."
"손톱과 발톱을 살펴라!"
"입술처럼 청흑색입니다."
비로소 정약용이 나섰다. 검시기록을 든 채 죽은 자의 상반신을 살폈다. 파랬다. 다시 하반신을 살피고 나서 결론을 내렸다. 주검의 당사자인 민판서는 배가 부른 상태에서 야갈(野葛)의 독에 중독 됐다는 것이다. 이른바 독풀이다. 상반신이 파란 건 배가 부른 상태에서 독풀을 먹었다는 얘기다. 밥을 배부르게 먹고 자살을 한다? 그것도 야갈과 같은 독초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했다.
"오래 전 염제 신농씨는 모든 약초의 맛을 보다 단장초(斷腸草)에 중독 돼 목숨을 버렸다. 그게 야갈이다. 이 나라에도 얼마든지 독성이 밝혀지지 않은 풀은 있다. 강한 독성을 내뿜는 그 풀이 무엇인가도 중요하나 왜 민판서가 독풀에 중독돼 죽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무악재 아래 의원 집에서 연락이 온 것은 다음날이었다. 혼수상태에 빠진 처자가 깨어나 자신을 살려준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표시를 했다는 소식이었다. 상대의 신분이 다모(茶母)임을 알 리 없는 처자는 뜻밖에 혜화동 민판서 집의 행랑채에 살고 있는 판돌 아범의 아낙이었다. 혼인한 지 고작 두 해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탓에 처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단아했다.
"죽을 목숨 살려주어 감사합니다. 제 남편은 어찌 됐는지 궁금합니다."
아낙은 남편의 생김새를 일러주고 얘기를 틀었다. 낯선 사내들에게 끌려와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된 건 지난 해 자신이 본 일 때문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무슨 일을 보았습니까?"
아낙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점에 눈가의 찬바람을 지우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아가씨는 이씨 댁 서방님과 혼인 했답니다. 워낙 사람 됨됨이가 크고 담대해 혼인 첫날부터 친구들에게 끌려가 기방이다 어디다 돌아다니며 술을 마신 바람에 집안사람들의 걱정은 이만 저만 아니었지요. 첫날밤도 치르지 못한 신부로선 무거운 원삼과 족두리를 쓰고 온종일 방안에만 있었으니 그 고역도 무시 못할 일이었지요."얘기를 듣는 서과의 머릿속에 하나의 정경이 수놓아지고 있었다. 육중한 민판서 집 대문 앞에 부리는 노속(奴屬)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거리는 정경이었다. 노속들 입장에선 신랑의 얼굴을 본 게 아니었다.
사모관대를 쓰고 들어왔다가 유생차림으로 출타 했으니 갓을 쓰고 도포를 걸친 사내가 지나가면 '우리 서방님이 아닐까' 하는 바람에 달려가 확인하곤 했다. 날은 춥고 밤은 깊어 가는데 도무지 신랑이 나타나지 않자 민판서는 행랑아범과 두 놈의 하인을 밖으로 내보냈다.
"너희들은 서방님 얼굴을 보아 알 것이다. 이 시각까지 어디서 뭘하는지는 새삼 말해 무엇하겠냐만은 필경 과음으로 몸이 상할 것이니 서둘러 모셔 오도록 해라."
이들은 집으로 들어오는 초입에서 기다리며 이제나 저제나 신랑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날 자시가 거의 다 돼 한 사내가 술에 취해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걸어오고 있었다. 분명
'서방님이다!' 하는 느낌에 행랑아범은 하인들에게 눈짓을 나누며 냅다 그 선비를 들쳐 업고 뛰었다. 사내를 신방 안에 넣으며 행랑아범이 은근히 한마디 찔러 넣었다.
"헤헤헤, 서방님. 이런 날엔 새 아씨와 단꿈을 꾸셔야지요. 술을 드셔도 합환주(合歡酒)를 드시는 게 좋은 것 아닙니까."기름진 미소를 띠며 행랑아범은 그곳을 물러났다. 그런데 아침이 오면서 난리가 일어난 것이다.
"어둑새벽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게 아니겠어요. 한겨울의 삭풍이 스쳐가는 자리지만 워낙 대문을 크게 두드려 그 소린 몸채에도 들릴 정도였어요. 간밤에 신랑을 찾으러 나간 하인이 대문간에 달려가 밖을 내다보다 질겁했지요. 소스라치게 놀라 민판서의 방 앞으로 달려가 신랑이 바뀌었다고 했답니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지난 밤 워낙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신랑은 바람막이가 되는 대문 한쪽에 쭈그리고 누워 잠을 잔다는 것이다. 깊은 잠은 아닐 것이고 허기와 피곤기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잠시 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약간의 시간은 있었지만 해결 방도가 떠오르지 않은 민판서는 신방에 있는 사내를 끌어내 광에 가두고 대문밖에 있는 신랑의 외침은 모른 척했다. 추위와 한기에 지쳐 신랑이 돌아가면 그제야 처리방법을 생각해 볼 참이었다.
서과가 물었다. 일이 잘못돼 신랑이 바뀌었다면 사실대로 말하고 방책을 구하는 게 좋지 않았느냐였다.
"저야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요. 서방이 돌아와 이런 저런 말을 해주었을 때야 알 수 있었지요. 아마 신랑은 나중에야 이 일을 알고 그날의 일을 아는 사람을 죽일 거예요. 지금은 아씨도 살려둘지 모르지만 머지않아 반드시 나쁜 마음을 먹을 거예요. 틀림없어요."서과는 망우리에서 발견된 사내의 형상을 말해 주었다. 이미 집작하고 있었다는 듯 여인은 자신의 서방임을 선선히 수긍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 또 있을 것 같았다. 집안엔 이들 뿐만이 아니라 두 명의 하인까지 있었다. 비로소 서과는 사실을 밝혔다.
"어제 혜화동의 민동호 판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독풀에 중독 됐는데 자살을 가장한 타살이 분명해 보입니다. 사헌부에선 누구보다 사위를 의심하고 있습니다만, 성균관에서 학문을 익히고 있는 탓에 확실한 물증이 나올 때까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불원간 잡아 들여야지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신랑으로 오인돼 광에 갇힌 선비는 어찌 됐습니까? 신랑이 돌아간 뒤 목숨을 빼앗았습니까?"
"아, 그 선비님요! 김무학이라 했어요. 혼례는 이틀 후 다시 치러지고, 아가씨와 새신랑이 돌아가고 난 뒤 뒤꼍에서 죄를 논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대감께서 '논죄를 하겠다!'고 외쳤으니까요. 재갈을 풀고 그 사람에게 물었어요. 죄를 알겠느냐고요. 그러나 그 선비님은 너무 당당했어요. 자신은 이곳이 어느 기방 안뜰이라 생각했다는 거죠. 신부 차림이 이상해 나중에 깨달았지만 이미 그때는 늦은 후였어요. 사내는 당당하게 외쳤어요. 자신이 실수로 이집을 월장한 게 아니고 술에 취한 자신을 이 집 하인이 방안에 집어넣은 거라고요. 그게 어찌 자신의 허물일 수 있느냐 했지만···, 결국 그 선비님은 몽둥이 세례에 칼을 맞아 목숨을 잃고 야산에 버려졌지요. 참으로 총명하신 분 같았는데···. 자세한 걸 아시려면 아씨를 만나야 해요. 그러니 다모께서 우리 아씨를 한 번 만나주세요. 한시가 급합니다."서과는 민판서 댁인 혜화동으로 달려갔다. 신랑은 성균관에 나간 뒤였으므로 집에는 민규수 혼자뿐이었다. 서과가 그녀의 거처로 생각되는 방 문을 열었을 때, 민규수는 대들보에 줄을 늘어뜨린 채 목을 매단 뒤였다. 아래엔 한 통의 유서가 놓여 있었다.
<···참으로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가 봅니다. 혼인을 한 내가 뜻하지 않은 일로 낯선 사내에게 몸을 맡긴 후 아침이 되어서야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든 해결할 방안을 찾았으나 김무학 선비님은 자신이 목숨을 잃는다 해도 일을 옳게 처리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분은 제게 정표를 준다 하여 지니고 있던 봉황촉(鳳凰燭)을 줬습니다만 그게 화를 자초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사연을 차분하게 써 내려갔지만 내용은 참담했다. 신부의 몸에 봉황을 음각으로 새긴 초(燭)가 있음을 이상히 여긴 신랑은 당연히 닦달했다.
봉황초는 남녀가 장래를 약속하고 죽을 때까지 변치말자는 비익조(比翼鳥)가 새겨진 초(燭)였기 때문이다. 뒤늦게 당도한 정약용은 포교들을 성균관에 보내 민판서의 사위를 잡아오게 하는 한편 민규수의 주검을 사헌부로 이송시켰다.
[주]
∎봉황촉(鳳凰燭) ; 봉황촉은 미약을 사용하기 때문에 남녀가 방사를 치르고 장래를 약속할 때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