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님들, 함께 싸우지 않아도 좋으니 죽지는 마십시오.""고등교육법 개정할 때까지 절대 텐트를 접지 않을 것입니다."1000일이 흘렀다. 무려 4년째 이어온 '텐트 농성'이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다. 지난 2007년 9월 7일 국회 앞에 텐트를 친 나이든 부부. 이들은 "고학력 노예 대학강사, 처우보다 교원지위 회복이 우선"을 요구하는 팻말을 목에 걸고 거리에 섰다. 그들에겐 매우 중요한 일상사다.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투쟁본부' 김동애(64) 본부장,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고려대분회' 김영곤(62) 분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힘겨운 투쟁을 펼치고 있는 두 사람은 부부다. 부부의 투쟁본부는 좁은 텐트 안이다. 노트북은 물론 자잘한 살림살이까지 갖추어져 있는 이곳은 투쟁본부인 동시에 살림집인 셈이다.
풍찬노숙하며 오랜 투쟁이 전개된 그곳이 다름 아닌 대한민국 정치 1번지, 대의정치 본산인 국회 앞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끈다. 이들의 이유 있는 투쟁이 6월 2일로 꼭 1000일을 맞았다. 모두가 지방선거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사이, 이들은 이날도 어김없이 '고등교육법 개정'이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 3.3㎡(1평) 남짓한 천막 앞에서 대학 내 비정규직 시간강사를 10년여 동안 해오다 최근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광주 조선대 서아무개 비정규교수를 추모하며 법 개정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거리투쟁 1000일... 생활이 되어 특별한 감회 없다"
이들 부부가 농성을 처음 시작한 것은 2007년 초가을. 당시 17대 국회에는 시간강사의 교원 지위를 회복한다는 내용이 담긴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었다. 초기만 해도 이들과 함께 한 많은 대학 강사들은 제17대 대선 등을 앞두고 있는 시기여서 한 달이면 잘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이었다.
국회에 계류 중이던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그 후 번번이 묵살됐고 해를 거듭하면서 천막 곁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은 상당수 떠났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천막을 지키며 국회 앞에서 매일 피켓을 들고 '교원지위 회복을 위한 고등교육법 개정'을 요구했다.
그러기를 반복해 어느덧 1000일을 맞았지만 부부는 "이제 생활이 되어 특별한 감회가 없다"고 말했다. 국회 앞 생활 1000일을 맞은 2일, 이메일을 통해 질문하고 답한 형식의 온라인 인터뷰에서 두 부부는 착잡한 심정을 밝혀 왔다. 오로지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시간강사의 교원 지위를 회복하는 게 부부의 한결 같은 목표다.
'일용잡급직'인 시간강사는 사용자에게 최소한의 요구도 하기 힘든 상황임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근로계약서는 구경도 못하고, 다음 학기 수업 배정을 받지 못하면 그게 해고다. 서너 대학을 돌며 닥치는 대로 강의해도 손에 쥐는 돈은 한 해 500만 원 안팎. 4인 가족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친다. 한국 대학교육의 절반을 담당하는 시간강사의 현실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제자들을 남겨 두고 시간강사들이 목숨을 끊는 비참한 사건이 근래 자주 발생하는 이유다.
지난달 25일 조선대 서아무개 강사의 자살과 관련해 김동애 본부장은 "우리의 투쟁이 고인의 절망을 덜지 못해 죄송하다"며 "고인이 된 서 강사님을 비롯해 죽음으로 대학사회 변화를 요구한 8명 강사의 영혼을 위로하고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길은 처우보다 교원지위 회복이 우선"이라고 잘라 말한다.
부부는 "국회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는 시간강사의 교원지위를 회복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즉각 의결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강사를 교원으로 회복시켜 전임교수가 일중독에서 벗어나 제대로 연구 강의할 수 있게 하고, 학생은 교원지위 없는 시간강사의 강의와 학점을 거부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대학 시간강사 문제? 돈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원지위 회복"
최근 잇따른 시간강사들의 자살과 관련해 이들 부부는 "검찰과 경찰은 서아무개 박사를 자살하게 한 임용비리와 논문대필 등의 관행의 철저하게 조사하고, 아울러 2008년 자살한 한아무개 박사 유서에 나온 임용비리와 학내 인권 침해 등을 철저히 조사해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국가는 1977년 이래 33년 동안 법적 교원지위 없이 강의 연구한 비정규직 강사들에게 손해를 배상하고, 서아무개 강사의 가족에게부터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성명에서 밝혔다. 이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선대 시간강사에게 만약 교원 지위가 있었다면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교원 지위가 없기 때문에 전임교수와 수평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4대 보험적용·처우개선 등 돈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원 지위 회복"이라고 입을 모았다. 교원 지위가 먼저고 처우개선은 교원으로서 개선돼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남편 김 분회장은 "이 천막이 있다는 것은 교원지위 회복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말해 의미를 더해 주었다.
한국사회와 대학의 모순이 가장 집약된 문제가 '시간강사'라는 시각도 분명히 했다. 김 본부장은 "박정희 정권이 1977년 저항적 지식인들을 제도권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시간강사들의 교원 지위를 박탈했다"며 "시간강사와 전임교원을 분리시킴으로써 비판적 지식인들이 대학 내로 들어가지 못하거나 들어가더라도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든 구조가 됐다"고 말했다.
천막이 거둬지는 때는 언제일까? 이 물음에 대해 이들 부부는 "법이 개정될 때까지"라고만 밝혔다. 계속되는 시간강사의 죽음에 대해 "강사 선생님들 함께 싸우지 않아도 좋으니 죽지는 마십시오, 희망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여 말했다. 한두 사람의 죽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한 걸음씩 내디딜 때 비로소 해법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정식교원으로 올리고 강사료 두 배로 준다고 해서 강의 맡았는데..."
1971년 대학을 마치고, 유학 준비로 중국어를 배우려고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에서 개설한 중국어교실 강좌를 들으러 갔다가 당시 중국어 강좌 한 기수 위였던 현재의 남편을 만난 김 본부장. 그 후 1975년 2월 두 사람이 결혼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971년 10월 15일 유신정권이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대통령 특별명령'을 내리면서 두 사람은 '수배', '도망', '야학' 등의 극한 상황에서도 학문의 뜻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교와 공장생활을 반복하던 김 본부장은 1983년 국립대만사범대학으로 유학을 가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1986년에 귀국해 한 대학의 사학과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유학할 때 아이들은 친정과 시집에 맡겨놓고, 둘째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그때 박사논문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1989년 출국해서 1991년 박사논문을 완성하고 학위를 받았다. 김 본부장은 이후 1991년 2학기부터 1999년 2학기까지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뛰었다. 그 중 한 대학에선 2학기부터 대우교수로 교과부에 정식교원으로 올리고 강사료는 두 배로 준다고 해서 강의를 맡았는데, 1999년 2학기에는 약속했던 대로 두 배가 아니라 기본 강사료만 지급된 것이 오늘의 기나긴 투쟁으로 이어진 계기였다.
이 일로 인해 인간적 모멸감을 느껴 이 생활을 계속해야 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김 본부장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민교협은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강사노조)에, 강사노조는 민교협에 가보라고 서로 미뤘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 '직위해제 및 감봉무효소송'을 시작했다. 1년 후에 법원이 소송을 기각하면서 노동부로 가보라고 해, 노동부에 가보니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시간강사에게 퇴직금을 지급한 사례가 없다'고 해 결국 본인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2004년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 발의한 고등교육법 개정안마저 2년 동안 눌러 앉아 있다가 무산되고 말았다. 그후 여러 국회의원들이 관심을 갖는 척 하더니 2006년까지 기다려도 강사교원지위 회복은 되지 않았다. 결국 2009년 6월 김 본부장은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를 결성해 투쟁을 본격화했다. 투쟁본부에는 참교육학부모, 서울대 대학생사람연대, 그리고 남편(한국교수노조 고대분회장), 대학생, 시민 등이 참여하고 있다.
대학에서 '노동의 역사, 노동의 미래'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남편은 "교원 범주에서 제외된 시간강사들의 교원지위 회복은 단지 강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생들의 학습권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며 "대학에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도록 일방적인 주입식이 아니라 창의적 토론식 교육을 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아내와 손발이 척척 맞는다. 거의 모든 실무는 그의 몫이다.
"대학사회 노예, 유령 취급받는 시간강사 제도 없애는 게 꿈"
두 부부는 늘 서로 의지하며 격려하고 뜻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함께 하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한다. 결혼 할 때 "일생을 동지로 살아가겠다"고 맹세한 두 사람은 이제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불평하지 않고 노상에서 숙식하며 투쟁하고 있다. 신명나는 대학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더 이상 대학사회에서 노예와 유령의 그림자로 취급받는 시간강사 제도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사회를 만든다는 게 그들의 꿈이다.
그러나 상황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두 부부는 투쟁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녹록하지 않은 국회 앞 텐트를 계속 지키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만 그동안 험난한 과정이 말해준다. 김 본부장이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에서 남은 여정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잘 시사해 준다.
"처음에는 천막을 쳤는데 천막은 주거지로 여겨 경찰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었어요. 텐트는 주택이 아니어서 철거하지 못해요. 텐트가 자리 잡고 있는 땅은 국민은행 소유여서 사유지에는 경찰 마음대로 철거를 못하기도 하고요. 한동안 국민은행에서 텐트를 걷어내겠다고 위협해서, 제가 강사노조 노조원들에게 말해서 국민은행에 있는 돈을 다 인출하라고 할 것이라고 맞섰지요. 최근에는 '텐트가 있는 자리에 꼭 공사를 해야겠다'며 주말을 노리고 있어요. 주말에는 집에 가서 씻기도 하고 텐트에서 있는 동안 먹을 밑반찬도 만들었는데... 이제는 주말에도 집에 갈 수가 없어요."어떤 시련이 다가올지라도 절대 몰러서지 않겠다는 당찬 각오가 묻어 있다. 국회 앞 텐트 투쟁 1000일을 맞아 2일 김동애 본부장과 실시한 인터뷰에서도 잘 읽힌다. 다음은 김 본부장과의 일문일답.
"강사님들 죽지는 마십시오, 희망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국회 앞 천막농성이 오늘(2일)로 1000일을 맞게 됐다. 그간 소회를 듣고 싶다."이제 생활이 되어 특별한 감회가 없다." - 그동안 어려웠던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우리나라 교육에 초중등 교육과 평생교육은 있으나 대학교육은 빠져 있다. 대학교육은 20년 걸친 교육의 출구이며 생애교육의 시작인데, 대학입시를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을 아는 사람들에게 유학은 선택이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 대학은 희망이 있는 곳이다."
- 국회에서 지난해 김진표 의원 등이 나서서 교원지위에 관한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발의한다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고 이를 극복하고 대학교육 정상화를 바라는 강사, 학생, 학부모의 희망을 담아 법안을 의결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오늘 지방선거에서 초중등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감을 뽑는다. 앞으로 대학교육을 담당하는 대교협 회장(대학교육위원회 또는 고등교육위원회 위원장)을 국민투표로 뽑을 수 있도록 입법해 주기 바란다. 지금까지 80%를 차지하는 사립대학의 집사에 불과한 총장들이 모여 호선으로 회장을 뽑고 자율화라는 이름 아래 대학을 무너뜨렸다."
- 앞으로도 계속 투쟁을 할 생각인지, 한다면 언제까지 할 계획인지 말해 달라."2009년 6월 한국비정규교수노조가 법 개정 투쟁을 포기하고 농성장을 떠난 뒤 단지 몇 명의 강사, 학생, 시민이 모여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를 결성할 때, '법을 개정할 때까지 텐트를 접지 않는' 단 한 가지만 정했다."
- 투쟁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인가?"대학생들이 학습권에 눈을 뜨는 것이 좋았다. 지난 5월 1일 메이데이 때 학생 100여명이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를 국회에 촉구하러 깃발을 들고 농성장으로 다가올 때가 기억에 남는다."
- 최근 시간강사의 자살로 전국의 많은 강사들이 충격에 빠져 있다.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는가?"고 한경선 박사님도 국회 앞 농성을 알았다. 그 뒤 농성을 계속하면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강사 선생님들에게 희망을 주었나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고 서 강사님은 김동애 교수의 이름을 거명하며 ''교수와 제자 = 종속관계 = 교수 = 개'의 관계를 세상에 알려 주십시오'라고 하셨다. 당신에게 희망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강사 선생님들 함께 싸우지 않아도 좋으니 죽지는 마십시오. 희망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 대학과 교육당국, 국회에 주문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텐데, 그래서 최근엔 성명도 냈다. 그들에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4대 보험과 강의료 인상을 자꾸 되뇌는데 대학교육 정상화 방안이 아니다. 대학, 교과부, 국회가 협의해 강사 교원지위 회복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의결해 주기 바란다. 더 이상 강사를 죽게 하지 마라. 더 이상 학생을 바보로 키우지 마라."
- 늘 함께 하고 있는 남편에게 그리고 가족들에게 평소 아껴온 말이 많았을 텐데, 1000일이 된 이 시점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어느 학생이 우리 두 사람이 여생을 농성장에서 보낸다는 글을 썼다. 올바른 지적이다. 농성을 계속할 수 있도록 건강하기 바랄 뿐이다. 가족들이 이해하고 도와주어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