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뺨검둥오리의 비극
4일, 교통사고를 목격했습니다.
저는 성낙중 작가의 조각전에 가는 중이었습니다. 헤이리 인근 성동사거리에서 신호 대기 중에 반대차선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낮게 비행하던 흰뺨검둥오리 한 마리가 우회전 하던 차와 부딪친 것입니다.
이 오리는 즉사하는 것을 면했지만 패닉상태로 인도로 올랐다가 위험한 사거리를 가로질렀습니다. 다리와 날개를 모두 동원해서 달렸습니다. 그것은 물갈퀴달린 새의 걸음걸이가 아니라 정신을 완전히 잃은, 본능의 발버둥이었습니다.
교통량이 많은 큰 사거리를 가로지르는 그 오리의 선택이 여간 조마조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위태롭게도 그 오리는 이미 모든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듯 사거리의 신호대기중인 차바퀴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바퀴가 오리를 겨눈 그 차의 운전자는 오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듯 싶지 않았습니다. 사거리의 대각선에 멈춘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신호가 바뀌고 그 차가 발진하기 전에 오리는 다시 움직여서 인접 도로변으로 올라갔습니다.
안도를 하는 순간, 그 오리는 다시 방향을 바꾸어 도로로 향했습니다. 그 뒤의 상황은 저희 차를 가로 막은, 높은 화물을 적재한 트럭에 가려 추적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그 상황에 어느 누구도 인접한 차량의 탑승자가 구호조치를 위한 움직임을 목도할 수 없었습니다.
날짐승이 날 수 없을 만큼의 심각한 손상을 입은 그 교통사고를 대하는 사람들의 인식에 대한 상념이 성 작가의 작품이 전시중인 장흥아트파크의 RED SPACE 전시장에 도착하는 때까지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육산의 후덕과 골산의 원기
고개를 넘을 때 멀리 서울의 북한산 바위가 육중한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김기호선생이 말했습니다.
"저렇게 우뚝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산을 골산骨山이라하고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곡선의 숲으로 이루어진 산을 육산肉山이라합니다. 골산은 이렇게 육산너머로 보기보다 골산을 바로 마주보는 것이 좋은데……."
김 선생님의 관심은 자연과 풍수지리를 아우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멀리서 보는 그 골육骨肉의 경계가 너무 선명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터였습니다. 저는 이즘 '나누어짐'과 그것을 결정짓는 '경계'에 대해 미궁 같은 고민 속에 있거든요. 저는 지금까지 경계 넘나들기를 즐겨왔고, 그 재미야말로 '경계 있음'의 미덕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경계는 이해利害가 놓인 사람들 사이로 넘어오면 제가 집착하는 '지역 넘나들기'와 '문화 넘나들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기도 합니다. 골육지친骨肉之親의 배려와 희생이아니라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중상과 모략을 배태하는 것이지요. 육산의 후덕과 골산의 원기를 아우를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애옥한 작가의 희망이야기
성낙중 작가의 작품은 폐철로 만든 새와 둥지 시리즈였습니다. 이 젊은 조각가의 새들은 날개가 퇴화되어서 날지 못하는 새들입니다. 더구나 날 수 없는 이 새는 새장에 갇힌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새들은 아파트형 둥지에 날개대신 몸만 비대해진 채 끼여 있었습니다. 또 다른 새들은 골산에 몸을 얻고 아파트를 내려 보고 있었습니다.
이 가난한 조각가에게 폐철을 소재로 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폐철도 감당할 경제적 여유가 없어 손을 놓으면 김기호 선생은 고물상을 한바퀴 돌아 한때 헐린 빌딩의 뼈였던 철골들을 몇 톤 모아 그의 작업장에 갖다 놓곤 합니다.
쇠를 자르고 붙이는 작업은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닙니다. 그 무게 때문에 크레인이 필요하고 용접기나 그라인더의 소음과 쇳가루는 이웃들로 부터 배척받습니다.
지난 이태 동안은 양주시의 장흥조각아틀리에 1기 입주 작가로 뽑혀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기한이 다 되어 다른 작가에게 그 자리를 비워주고 나오니 다시 어디로 용접기를 옮겨야할지 아득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다시 인접한 크라운해태 아트밸리 입주작가로 자리를 옮겨갈 수 있었습니다. 비록 옛 주차장에서 작업을 하는 경우이긴 하지만, 올해의 전시는 그 작업 공간이 허락되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술을 좋아하지도, 잘 먹지도 못하는 성낙중 작가는 오랜만의 버젓한 갤러리 기획전에, 그리고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선·후배작가들의 적지 않은 방문에 감읍해서인지 캔 맥주 하나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탓인지 평소 어떻게 웃는지도 잘 모르는 듯했던 성 작가의 입이 귀에 걸려있었습니다.
성 작가의 작품은 폐자재로 날 수 없는 새를 작업하지만 희망과 순환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오행의 상생은 '금생수金生水'라고 합니다. 폐철은 다시 어머니가 되어 물을 자식으로 삼아 어머니가 자식에게 모든 것을 받치듯 물을 살아있게 할 것입니다. 골산위의 새는 진경의 산수를 질펀하게 누리는 선경仙境 속의 새로 달리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성 작가의 전시장을 나오면서 겨드랑이가 간지러움을 느꼈습니다. 날개가 돋을 모양이었습니다. 성낙중 작가의 골산은 페이드아웃fade-out되고 무릉도원으로 페이드인fade-in되었습니다.
헤이리로 돌아올 때 성동사거리의 교통사고를 당한 오리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하루에 200여종의 생물이 지구에서 영구적으로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5일은 '세계 환경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각국의 민간기구와 정부주도의 환경보전행사들이 열렸습니다. 이런 기념식과 전시적 행사가 성동사거리 흰뺨검둥오리의 비극을 함께 슬퍼할 사람들의 마음을 키울 수 있을까요?
어쩌면 헤이리 갈대늪에 들렀다가 이웃한 논으로 친구들을 찾아 이동 중에 성동사거리에서 비극을 맞은 것은 아닐까요?
이 험한 꼴을 당한 이 철새는 어찌하여 북쪽으로 동료들의 이동을 따르지 않았을까요? 인간이라는 단일 종의 번성이 극에 달해 다른 종이 모두 사라진 뒤의 모습은 어떨까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경계 건너의 사람들이 모두 이민을 가버린 마을은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성작중 작가의 '우주새'라는 작품이 모티프원의 정원에 있습니다. 모티프원의 난간에서 알에서 깨고 다시 보름을 자란 멧비둘기 자매가 이소하고, 며칠 전 이 우주새 아래에서 가족과 상봉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새가 우리와 더불어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이 될 수도 있을 까요?
이것은 경계너머의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은 하늘을 이고 있는 새들도 행복할 수 있는 땅이 될 수 있음을 증언하는 것일까요? 상기의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성낙중 작가의 전시명처럼 '다른 관점에 서서' 스스로 답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성낙중 조각전 | 다른 관점에 서서
-06.04 fri _ 06.27 sun | 장흥아트파크 RED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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