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보수', 영국에는 '레드 토리당'이 있다. 데이비드 캐머론이 보수당의 당수가 된 뒤 동성애·소수인종 등 진보적 논의의 모든 영역에서 상대 당의 영역을 잠식했다. '붉은 한나라당'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한나라당에 변화가 도래할 것이다."9일 오후 국회에서 6·2 지방선거 패배 원인을 진단하고 쇄신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한나라당 초선의원 모임에서 발제를 맡은 홍정욱 의원(서울 노원병)은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교조적 우파, 수구적 보수주의로의 회귀는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홍 의원은 또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검찰조사를 남발해 공안정국을 만들고, 북한과 전쟁불사의 의지를 보이는 것이 보수의 가치인양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라며 "헌정과 법치를 중시하면서 전교조 명단을 공개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면서 반대의견을 억누르고, 안정적 성장과 점진적 변화를 주장하면서 전쟁불사의 원칙을 고집하는 것은 유연하고 신선한 보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양성을 통한 경쟁력, 국가권력 최소화, 개인의 자유와 행복, 시장의 자율과 선택의 보장 등 정통 보수주의의 이념을 한나라당이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발제를 맡은 권택기(서울 광진갑) 의원도 "(광우병 보도 관련)<PD수첩> 무죄 판결, '스폰서 검사'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이 '검찰만큼 깨끗한 곳이 어디있느냐'고 말하고, 명진 스님(외압) 건, 5·18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못 부르게 하고, 5·18 기념식에 당 대표의 조화가 화환으로 둔갑돼 나오고, 한명숙 전 총리 사건에 대한 검찰의 별건수사, 대통령이 전쟁기념관에서 천안함을 발표하고, 이런 것들에 대해 내 주위에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고 민심을 전했다.
한국 사회 구성원의 30%를 차지하는 40~50대, 즉 '87년 넥타이부대'와 386세대가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데, 이들이 가진 민주시민사회에 대한 지향과 반민주에 대한 저항의식을 한나라당이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권 의원은 지난 3일 <중앙일보>·SBS·동아시아연구원의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면서 "이번 지방선거는 이명박 정부 심판론이 가장 컸다는 여론이 66.5%"라며 "천안함 사건 이후 보수세력의 집결 과정과 여론조사의 상대적인 격차에 함몰되다 보니,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나오던 국민들의 정권 견제 심리를 잊었던 것"이라고 패인을 분석했다. 이번 선거 패배에서 나타난 민심이 요구 중 가장 큰 것이 국정 운영 기조의 변화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조전혁 "당 기본가치 부정"... 진성호 "그동안 청와대만 바라봤나"
발제자들이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기조와 한나라당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고 나서자,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됐다.
홍 의원이 발제에서 언급했던 '전교조 명단 공개'의 주인공 조전혁 의원(인천 남동을)은 "반성은 좋은데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며 "한나라당의 기본 가치마저 부정하려는 이야기들이 서슴없이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기존 이념 성향을 부정해선 안 된다는 것.
성윤환 의원(경북 상주)도 "'빨간 보수' '쿨한 보수'를 말하는데 본래 의미의 보수는 어떤 의미에서도 포기해선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진성호 의원(서울 중랑을)도 "청와대 비서실장이 이번 지방선거에 책임지고 사의를 표한 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선거 패배의 책임이 한나라당에 있느냐 청와대에 있느냐"며 "청와대에 쇄신을 요구할 순 있지만, 그 중요성은 한 열 번째 정도될 것이다, 그동안 청와대만 바라보고 한 것이냐"고 반문했다.
정옥임 의원(비례대표)도 "자기 지역구 기초단체장 선거에 여기 계신 의원들도 다 관여했는데, 무소속 출마자 방치로 표가 나눠져 패배한 부분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느냐, 의원직을 내놓겠느냐"며 "한 언론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통령 지지도는 변하지 않았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도 차이는 2% 밖에 안 된다"며 당의 쇄신이 우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손숙미 의원(비례대표)도 "언론에 '청와대부터 개편하라', 이런 식으로 나오면서 주변에서 좋지 않은 얘길 들었다"며 "당이 먼저 자신을 쇄신해야지, '뼈를 깎는 아픔'이 남의 뼈를 깎는 아픔이냐"고 청와대 쇄신론에 반론을 폈다.
그러나 손 의원은 "보수의 가치를 논하되 여성·환경·복지 등 진보적 어젠다를 과감히 가져와야 한다"며 "이런 것들이 이뤄지지 않으면 경제발전 같은 것도 여유 있는 자들의 목소리에 불과할 것"이라고 당의 근본적인 변화에는 힘을 실었다.
나성린 의원(비례대표)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한 것은 정책 기본 방향이 틀려서가 아니라 국민 설득이 문제"라며 "한나라당의 원칙을 바탕으로 친서민정책을 편 것이 승리 원인으로 평가되는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승리를 참고하자"고 주장했다.
정태근 "싸가지 없어도 할 말은 해야"... 권영진 "MB정권 심판"
그러나 청와대 쇄신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는 의원들의 재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정태근 의원은 "싸가지가 없다는 소리 듣더라도 할 말은 다하고 살자"며 "청와대에 문제 제기하는 것 갖고 '왜 니들부터 반성 안하고 청와대에 쇄신을 요구하느냐'고 하겠지만, 중진 의원들이 청와대에 삿대질할 수 있겠느냐, 초선 의원들이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 의원은 이어 "계파 단합이 당 쇄신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한나라당의 낡은 관행, 젊은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관행과 정치문화를 혁신해야 하고 새로운 리더십의 등장과정을 통해 한나라당을 바꿔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영진 의원도 "대통령과 당이 과연 그렇게 분리돼 자유롭게 움직이는 존재냐"며 "이번 선거에서 국민들이 야당을 찍은 이유는 MB 정권에 대한 심판이고 중간평가를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권 의원은 이어 "청와대 수석 중에 절친한 선배가 있는데, 나라고 기분 좋아서 청와대 쇄신하라고 하겠느냐"며 "우리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대통령에게 쓴소리 듣고 선배들에게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결기를 갖고 청와대 쇄신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광덕 의원은 "여당이 대통령과 정부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따라가주니까 '신직접민주주의' 시대의 국민 개개인이 대통령과 직접 맞짱을 뜨고 싶어하고 있다"며 당-청 관계의 재정립과 정책기조의 변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동성 "'박근혜 대표 추대'가 친이-친박, 당청관계, 세종시 해결책"한편, 이번 지방선거 패배 후유증을 박근혜 전 대표의 당 대표 추대로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김동성 의원은 "박근혜 전 대표를 당 대표로 추대하자"며 "그러면 당 내 친이-친박 갈등도 해결하고, 당청관계도 수평적으로 만들수 있고, 세종시 문제의 출구전략도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총 57명의 의원들이 참석한 토론회는 약 5시간 동안 이어졌다. 애초 계획은 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할 초선 의원 2명을 추천할 계획이었으나, 토론회 말미에 참여인원이 줄어 결정하지 못하고 김무성 원내대표에게 위원 선임을 일임하기로 했다. 초선 의원들의 쇄신요구 사항을 담은 성명서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채택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