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여기서 뭐해?"
하야리아 부대 앞. 새내기 때, 멋도 모르고 선배들을 따라 사수대 틈에 끼어버렸고, 맨몸으로 전경들과 맞섰던 선배들의 모습을 본날. 혼란과 두려움에 혼자서 펑펑 울었던 시간.
2003년, 나는 교과서 밖 세상을 보았다. 세상은 12년 동안 교과서 속에서 봤던 것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주 일부분일 뿐이었다. 고등학교 때 과학실 실험기구가 모자라 제대로 실험을 못하던 때, 대학 들어가면 실컷 실험실에서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도 허사였다. 아니, 실험기구나 교과서가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대학교 1학년, 소위 '운동권' 풍물패에 가입하다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풍물패에 가입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풍물에 관심이 있기도 했지만, 교회를 다니면서 절대 기독교 동아리엔 들어가기싫다고 생각한 이유가 컸다. 10년 넘게 교회를 다녔는데 대학교에서도 교회활동을 한다는 걸 상상하니 너무나도 답답했다. 그래서 학과 동아리나 취업 관련 동아리, 기독교 동아리를 다 포기하고 단과대학 소속 풍물패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풍물패, 뭔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가입하고 며칠 뒤, 동아리 회장 선배는 이 풍물패가 한총련 활동을 하는 곳이라고 알려주었다. 내가 대학 입학하기 전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데모하지 마라'였는데, 하필 내가 그런 곳에 가입을 하다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한총련이라는 걸 알게 되자 오히려 더 이 곳에서 활동하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면, 뉴스에서 시위하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왜 그 시위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다. 한총련도 마찬가지리라.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풍물패에 나가지 않았다. 20대의 질풍노도가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2년 반, 쉴새없이 달려온 풍물패 생활
풍물패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다. 교내에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내용의 대자보가 붙었고, 저녁마다 학교 앞과 서면 천우장에서 촛불집회가 계속되었다.
수업을 마치면 정문에서 모여 천우장으로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천우장 집회의 마지막에 하야리아 부대를 가는 일이 많았기에 주말에 집에 가는 것보다 천우장과 하야리아 부대에 가는 날이 더 많았다. 물론 항상 집회에는 늘 보던 사람들만 보였다. 그래도,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라크 전쟁 반대 활동을 하다 보니 어느새 여름방학이 되었다. 여름방학 초반에는 함안으로 2주간 농활을 가서 농민분들 일손도 거들고,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FTA 관련 촌극도 공연했었다. 내가 맡았던 역할이 농민분들을 대변하는 거라 그런지 몰라도 농민분들이 날 정말 좋아하셨다.
그리고 여름방학 후반에는 8·15 통일축전 준비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반미시위를 하는 활동을 했다. 1학년 때가 아니면 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도전했는데, 진보성향의 시민단체나 학생회 말고 우리를 좋아해주는 분은 아무도 없었다. 하긴, 우리 부모님도 내가 운동권이라는 사실을 아셨을 때 '빨갱이'라고 하시던데,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난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대학교 1학년때 활동이 주로 반미와 관련된 것이라면, 2학년 때는 약간 방향이 달랐다.그도 그럴 것이, 1학기 초반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되었기 때문이다. 하필 풍물패 공연날 일어난 일이라 공연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로 각 풍물패 회장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 끝에 공연을 취소하고 서면으로 갔다. 그때 본 사람 수가 내가 2년 반 동안 풍물패 생활을 하면서 서면 집회에서 본 사람 수 중 제일 많았다. 그때 '아, 지금 내가하는 활동들이 솔직히 큰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분명 나는 잘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통령 탄핵 때문에 광화문에 10만 촛불이 타오르던 때, 난 그 현장에 있었다. 우리 부모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친 짓'이었지만, 10만 촛불을 직접 보았을 때 그 감동이란. 나는 적어도 미래의 내 아이들이 역사를 배우며 그때 이야기를 한다면,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당당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외에도 여러 일들이 있었다. 한진중공업 고 김주익 열사를 추모하러 서면에서 영도까지 악을 치며 행진하기도 했었고, 동아시아경제포럼(WEF) 항의 집회에 가서 주위에 있는 시민들에게 관련 유인물을 나눠주기도 했었다.
뉴스가 알려주는 것보다 많은 일들이 내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매년마다 연례행사처럼 느껴지던 노동자들의 파업이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새롭게 다가왔고,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하에 가진 자들의 배를 불리는데 급급한 신자유주의자들의 모습을 보며 화가 나기도 했다.
풍물패 활동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음을 깨닫다
하지만, 가족들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부모님 두 분 다 보수 성향이셨기에, 풍물패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진보성향을 띠게 된 나는 집에서 '빨갱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풍물패 활동을 하면서 서울로 원정 집회를 자주 다니다 보니 집에 연락하는 일이 뜸했고, 그래서 가족들의 걱정도 많았다. 거기다 서울 가면 교회는 못가는 거나 마찬가지니, 2년 동안 교회를 간 일이 거의 없었다. 이 부분은 사실 내 잘못이 크지만, 당시 난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2005년 중반 즈음, 나는 집안의 반대와 부모님의 걱정을 그냥 둘 수 없어 풍물패를 그만두고 기독교 동아리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번 내 안에 굳어진 가치관을 바꾸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동아리에서 적응하긴 힘들 거라 생각했다. 일단 3학년 때 들어가기도 했지만, 2년 반 동안 내가 본 기독교인의 모습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하나도 관심없고 오직 자기들 교세 확장에만 여념이 없는 이기적인 이들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내가 가입한 동아리에서는 1주일에 한 번씩 사회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으며, 내가 졸업하기 전 동아리 내에 사회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학생회 선거기간에는 선거 공보를 가져다가 각 후보간의 공약을 비교해보기도 했고, 진보적 성향을 띠는 기독교 잡지를 함께 돌려보기도 했다. 행동력은 풍물패 때보다 낮았지만, 분명 이들도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역시 크고 작은 일들이 쉴새없이 터졌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MBC 노조위원장 해고,천안함 침몰과 관련된 미심쩍은 부분들 등. 그 때마다 이건 아니라고 말하면서 거리로 나오는 시민들이 있었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여러 모임들이 있었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찻잔 속의 태풍'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트위터나 블로그 등에 올라온 글을 볼 때마다 내가 2년 반 동안 했던 활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풍물패 활동, 그 시간에 감사한다
2003년, 나는 교과서 밖 세상을 만났다. 교과서 밖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밝은 곳이아닌, 아픔과 눈물로 얼룩진 곳이었다. 2년 반 동안의 풍물패 활동은 내게 세상의 얼룩을 보게했고, 얼룩을 지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 고민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나보고 너무 따지려들지 마라고, 그냥 물 흐르듯이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난 오히려 지금의 내 모습에 만족한다. 만약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채 경제만 살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20대 초반을 풍물패 활동을 하며 보낸 것에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내 시야를 넓혀준 그 시간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