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부 수립 이후 두 번째로 '이' 대통령과 함께 살고 있다. 두 번째 이 대통령은 2008년 촛불집회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나서는 집회 참가자를 끝까지 추적하여 벌금형 등으로 응징하였다. 2010년, 민주주의 퇴행과 독단적 국정운영을 반대하는 소리없는 외침이 선거로 나타나자 이를 받아들이겠다며 청와대와 내각의 인적쇄신을 말했다. 동시에 국민의 70% 이상이 반대하는 4대강은 흔들림 없이 추진한다고 불통의 꿋꿋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임기의 절반을 남겨 둔 지금 이 대통령과 정부는 남은 2년 반 동안 민주적으로 창출된 정부답게 다수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게 될까? 전혀 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 지금의 상황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
한국전쟁이후 1960년까지 첫 번째 이 대통령과 자유당 정부 또한 국민 위에 군림하고자 하였다. 전쟁으로 고달팠던 국민들은 자유를 입에 올릴 수 없었던 7년 동안 인내의 시간을 보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던 중 1960년 고교생이 학원의 민주화를 외치며 혁명이 시작되었고 마산에서의 두 차례(3월 15일, 4월 11일) 유혈 항쟁을 거치며 격화되었다. 학원 내 정치개입, 가당치 않은 부정선거와 공권력의 시위 진압은 분노를 촉발시켰고, 가족과 친구의 죽음을 목도했을 때 학생과 시민들은 혁명가로 변모하였다.
1960년 3월, 당시 마산고 2학년이었던 김정세는 "파출소로 돌진하는 데모대에 경찰이 총을 난사할 때 데모대는 돌로 맞섰을 뿐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같은 학교에 다녔던 송정명은 "흥분된 군중들의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울컥 치미는 의분심을 주체치 못했다"고 하였다. 부두 노무자였던 문채영은 "부정선거 다시 하라", "독재정권 물러나라" 구호를 외쳤던 당시를 떠올리며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은 없어도 불의와 부정을 보고 지나치기보다 그것을 타도하기 위해 몸 바칠 각오로 항거한 것이 보람된 일이었다"고 자부하였다. (1992년 4·19의거 상이자회 경남지부가 발간한 『3·15의거』참조)
마산항쟁에 대한 정부·여당의 반응은 공산당 개입에 의했다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도 그렇게 말했다. 2008년 촛불집회 당시 보수언론과 정부 인사들에게서 끊임없이 나온 '배후세력'과 모습이 겹친다. 1960년 3·15선거 당시 자유당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은 3월 15일 마산에서의 시민을 향한 발포에 대해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고 발언하여 민주당으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경찰의 '시민 죽이기'는 마산에서 그치지 않았다. 4월 19일 경무대로 향하는 학생 시위대에 경찰은 무차별 발포로 응대하였다. '피의 화요일'에 학생들이 원하는 것은 더욱 분명하고도 직접적인 것으로 변해 있었다. "민주주의 반대자를 극형에 처하라", "이승만 박사 물러가라", "평화적 데모의 자유를 방해하지 말라"는 시위대의 구호가 그것을 보여준다. 학생 시위대와 경무대 길목을 지키는 경찰의 대치 광경은 2년 전인 2008년 서울에서도 펼쳐졌다. 50년 전의 총탄은 물대포가 대신하였지만.
혁명은 19일 이후에도 전국에서 계속되었다. 비상계엄령으로 잠재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기록된 사망자는 187명에 달했고 부상자는 수천명에 이르렀다. 25일 대학교수들까지도 시위에 가담하였다. 그 이튿날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 대통령이 하야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미국의 요구였지만 마산항쟁 후 계엄령을 허가했던 미국이 태도를 바꾼 것은 혁명 과정에서의 나타난 학생들의 대규모 희생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이 대통령은 결국 민의를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1960년 2월 말부터 시작된 혁명에서 숱한 피를 보았고, 이승만이 하야하며 민주주의와 자유는 상식이 된 것 같았다. 김수영은 4월 26일에 쓴 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에서 말했다. '민주주의는 인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자유는 이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아무도 나무랄 사람은 없다/ 아무도 붙들어갈 사람은 없다'고. 심지어 국회 본회의에서도 '전국 학도에게 보내는 감사문'을 통과시켰다.
"이제부터 이 나라에는 민의를 무서워해야만 하는 정권만이 있을 것이니 이는 오로지 젊은 영령들의 유산인가 한다.(중략) 우리가 진작 흘렸어야 할 피를 제군이 대신하였고 우리가 마련해야 할 민주유산을 도리어 제군의 손에서 물려받게 된 소위 선배 정치인들의 부끄러움은 말할 나위도 없으나 다만 이 기회에 서로 자성자계하여 국민의 요망에 따라 내각책임제 개헌 등 당면한 몇 가지 과업을 마치고 이 자리를 물러나려 한다."(1960.4.29. 제4대국회 제35회 11차 본회의 회의록)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민주주의는 이듬해 군사 쿠데타로 또 다시 미루어졌다. 민이 정권을 두려워했던 시간이 길게 지속되는 동안 두려움, 독재,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또 나타났다. 정부를 비판하기가 두려워졌다. 집회에 나가는 것도, 노조에 가입하는 것도 겁이 난다. 이 대통령도, 정부도, 여당도 모두가 민주주의를, 자유를 옹호한다고 말한다. 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민의를 존중하는 정권을 만들기 위해 또 다시 피를 흘릴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누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만들어왔고,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고, 50년 전의 『사상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입으로 '자유'를 논할 자격을 얻었으며 행동으로 민권을 과시한 실적을 남겼습니다. 자유와 민권은 어느 누구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민의 손으로 쟁취되는 것일 뿐입니다." (『사상계』1960년 5월호 권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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