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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이 멀지않은 어느 날, 규장각 서고에 앉아 상감은 누굴 기다리고 있었다. 나타난 인물은 지난해 3월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으로 해미현에 유배됐다 풀려난 정약용이었다. 사헌부에 몸 담은 채 상감의 극진한 은총으로 배다리(舟橋) 프로젝트를 은밀히 수행해 왔었다.

"이보게 사암, 노론의 반대를 뚫고 보위에 오른 과인이 '죄인의 아들'이란 굴레를 벗어나는 건 원통히 돌아가신 아버님의 추숭작업이네. 양주의 배봉산에 있는 무덤을 수원으로 옮겨 현릉원이라 했고 수원에 화성을 만들어 개혁의 중심도시로 삼으려는 것 아닌가."

상감은 아버지의 묘소를 옮긴 이후 자주 행차에 나섰다. 아버질 추숭하는 작업을 통해 왕권을 과시하고 그곳에서 마주친 백성들의 목소릴 직접 들어보려는 뜻이 있었다.

화성행차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한강을 건너는 것으로 이전엔 선릉을 참배하려 중종대왕이 배다리(舟橋)를 건넌 적이 있었다.  정조는 대규모 행차를 원활히 하기 위해 새로운 배다리 건설을 지시했었다.

"비변사에서 주교사(舟橋司) 설치에 대해 여러 말이 올라온 것은 기유년(己酉年)에도 있었듯 주먹구구식 설치방법에 이의를 단 것이오. 과인은 그 동안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작성해 배다리를 놓는 기본원칙을 제시했는데 이렇다 할 소득을 얻지 못하고 있소."

배다리는 배를 엮어 강을 건널 수 있게 한 부교(浮橋)다. 조선시대엔 백성들이 강을 건너려면 나룻배를 이용했다. 국왕이 능에 행차하거나 온천에 갈 때엔 3, 4척의 배를 묶어 어가를 건너게 하는 결선법으로 배들을 엮어 다리를 건넜다.

정조는 주교사를 발족시켜 <주교사절목>을 정했다. 효심이 강한 상감은 능으로 행할 때 한강 선창을 양쪽에 만들어 배 타고 건넜으나 경술년에 이르러선 배다리를 가설케 한 것이다.

배를 엮어 다리를 만들 때 큰 배를 강심 중앙에 놓고 작은 배는 강의 양쪽에 놓아 가운데가 높고 양단이 낮아지는 모양을 이룬 것이다. 주교가설에 동행되는 주교선은 겨울을 한강에서 지내고 1, 2월에 일을 마친 다음 각자의 일을 하게 했는데 이 일에 동원된 선척은 충청도 조운선과 비상사태에 대비해 강화도에 비치한 관선들이었으나 나중엔 사선도 징발했다.

이들에겐 정기적으로 배다리 가설에 참여한 공로로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동미를 독점해 운임을 받고 운반하는 주교사선의 특권을 주었다. 배다리는 일기가 사나운 겨울철엔 쉬고 좋은 계절에 취역케 한 상감의 온정이 남아 있었다.

"과인이 사암을 부른 건 은밀히 조사할 일이 있기 때문이오. 배다리에 관계하는 자 중에 준천사(濬川司)도 있게 마련인데 그 일을 하는 맹천보라는 이가 지난밤 무리를 이끌고 과인의 꿈길에 나타나지 않았겠소."

안개가 자욱이 내린 강가라 했다. 겨우 주위만 알아볼 정도였는데 오건(烏巾)을 쓴 한 사람을 정점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내는 특이하게 싹이 돋은 매화나무 가지를 들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강가엔 민초들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루었지만 소란은 없었다.

조선의 뒷골목을 누빈 떠돌이 약장수를 비롯해 놀잇배를 타고 흐느적거리는 기생과 건달, 사기꾼, 도둑놈, 도굴꾼···. 그 외에 땡땡이 중 같은 이도 있었지만 그들은 오건을 쓴 사내가 가리키는 배다리를 건너는 상감의 행차에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같은 꿈을 사흘이나 꾸었던 터라 내관에게 조살 시켰더니 배다리를 설치한 장소엔 오건(烏巾) 쓴 무리가 나타난 적 없는 데다 특별한 징후도 없다 했소. 그런데도 오늘 사암을 부른 건 새벽 미명에 과인을 찾아와 깊은 눈물을 뿌린 사내 때문이오. 사령 복색을 했으니 준천의 일을 한 듯 보였으나, 누군가 그에게 맹천보라는 호패를 건네는 것으로 보아 과인에게 뭔가를 말할 듯 싶었으나 끝내 말 못하고 돌아섰소. 그 자를 생각하면 과인의 마음이 무거워 하루 종일 편치 않으니 사암은 이 일을 어찌 생각하오."

"신 정약용 아뢰옵니다.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신 후 백성들 마음에 있었던 건 정유년의 소란입니다. 선대왕 마마때 세상을 뜨신 사도세자의 폐위와 죽음의 원인 제공을 했던 송학수 도주의 잔재가 남은 탓에 그런 꿈을 꾼 것이라 보옵니다. 꿈이 사흘이나 연이어 나타난데다 새벽미명엔 행색을 알 수 없는 사내가 모습을 보였으니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닌 듯싶나이다."

"그렇소. 준천사로 뵈는 그 사내는 개천 뿐 아니라 묘자리를 팔 때 광중도 구석구석 살핀다 했으니 사암이 조사해 주기 바라오."

상감이 보위에 오른 초기엔 역적모의를 일으킨 자들이 여덟 명이었다. 형조판서 홍인한을 비롯해 전 좌승지 정후겸, 공조판서 이태서, 전 좌의정 오현수, 형조참의 이정호, 전 좌찬성 이두복, 전 병사 장기환, 전 충청감사 이태성 등이었소. 이들의 죄상은 만천하에 드러나 모두 사사돼 흉측한 계략이 가라앉은 것 같았으나 그들을 따르는 잔재들이 있는 한 결코 안심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사암은 과인의 꿈길을 찾아온 맹천보(孟川甫)란 사내를 수소문하고 황극경세원을 이끌던 송학수의 생사가 지금껏 밝혀지지 않았으니 이 일 또한 은밀히 수탐하기 바라오."

한양 성 중에서 허드렛 일을 행한 관원의 생사까지 걸리고 보니 이 일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느낀 상감은 은밀히 명을 떨군 것이다.

"믿을 사람은 과인 곁에 그대 뿐임을 잊지 마시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정약용이 어전을 나오자 멀찍이서 따라붙는 여인이 있었다. 서과였다. 정약용이 궐문을 나서자 재빨리 다가선 여인이 뒤쪽에서 말을 전한다.

"나으리, 서과이옵니다. 전하의 분부를 받잡고 망우리 인근에 산다는 맹천보의 집을 찾았으나 식솔들은 그곳을 떠난 지 오래됐다 하옵니다."

청계천 가까이 살았는데 남편이 죽은 후 부질없다는 생각에 망우리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불가에선 사람을 걸어 다니는 시체요, 달음질하는 고깃덩이요, 옷 걸어놓는 횃대고, 밥 담는 통이라 했다. 그래서 망우리 공동묘지는 엄청나게 많은 핑계 없는 무덤이 생전의 사랑과 미움과 갈등과 번뇌를 흙으로 덮은 채 누워있다.

누워있는 사람에겐 걱정이나 근심도 있을 수 없다 하여 글자 그대로 모든 근심을 잊는 곳 망우리였다.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의 기초를 세웠으나 한 가지 걱정은 자신이 묻힐 곳을 정하지 못한 점이다.

다행히 지금의 구리시 검암산 기슭에 터를 정하고 이 고개에서 '이제야 근심을 잊겠노라'하여 그 뜻을 따 망우리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 맹천보의 식솔은 근심 없이 그곳을 떠난 것인가? 아닐 것이다. 잔정이 진눈깨비처럼 칙칙하게 달라붙어 그걸 잊고자 떠났을 것이다.

명을 받은 서과는 나름대로 맹천보에 대해 조사 했었다. 그는 본래 땅의 기운을 살피는 풍수사였는데 송학수 눈에 들어 그의 일을 거든 게 배다리 일에 끼어든 동기였다. 그가 소속된 곳은 주교사(舟橋司)다. 이곳엔 도제조 3인에 제조 6인, 도청(都廳) 1인, 서리 5인, 고직(庫職) 1인, 사령(使令) 4인이 있었다.

맹천보는 일하기 좋은 때 사령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가을이 오면 이 나라 삼천리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위인이었다. 서과는 한양 인근의 관아를 돌아다니며 수소문했지만 아직 맹천보의 식솔 행적은 찾지 못한 상태였다.

설 명절이 가까워서인지 달빛이 차가왔다. 괜스리 부산스러운 마음은 일 하는 주모나 행인들이나 매 한가지다. 이곳 버티고개는 벌아령 또는 부어치라 불렀는데 길이 좁고 행인이 적어 도둑이 많은 곳이다. 지금의 중구 약수동과 한남동 사이의 이 길은 순라꾼들이 야경 돌며 도둑을 쫓았기에 번치라 하다가 버치 또는 부어치로 변했다.

삼각산 인수봉이 어린앨 업고 나가는 형국이므로 그걸 막기 위해 서쪽에 모악과 떡고개를 두어 어머니가 떡을 가지고 아이를 달래게 했으며, 남쪽엔 벌아령을 두어 아이가 나가면 때리겠다고 을러대 함부로 나가지 못했다고 전한다.

좁은 길로 쭈욱 가다 세 길이 합해진 삼거리에 주막이 있었다. 얼굴이 고운 삼거리 버드나무집 주모는 마흔이 다 됐지만 피부는 탱글탱글한 탓에 오가는 술손님의 농담을 받아내기에 족했다.

달이 훤히 뜬 이날 밤엔 아랫마을 김초시의 부름을 받고 주모는 자리를 비웠고 그의 딸 달래만 단잠에 떨어져 있었다. 나이 이제 열일곱인가. 나긋나긋한 성격은 삼거리를 오가는 이들에게 평안함을 주었고 그런 후덕함 때문에 쇄락한 왕가의 혈손에게 예기치 않은 청혼을 받은 것이다.

이씨니 양반일 것이고 전주 이씨니 두말할 나위없이 왕손이다. 왕손이면 이 나라를 다스리는 상감의 피가 흐르는 것 아닌가. 이레만 있으면 설이니 그 전에 혼례 치르고 명절 음식을 맡기겠다 하여 달래는 마음이 부풀어 신바람이 났다.

부산스럽게 일했어도 자리에 눕기 전까진 그런대로 신명나는 하루였다. 열일곱 꽃다운 설레임을 곱게 가슴에 접고 달래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달빛이 문지방 가까이서 노닐다 누군가 툇마루 가까이에 다가오자 얼른 물러났다. 시꺼먼 그림자는 봉창문에 쓰윽 손을 집어넣더니 지도리에 찔러 넣은 숟가락을 어렵지 않게 뽑아냈다. 바시시 문이 열리며 털복숭이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왼쪽 눈썹노리에 패인 듯한 칼자국이 있는 사내였다.

사내는 소리없이 웃으며 웃통을 벗어던진 채 달래 옆에 모로 쓰러졌다. 그는 씨익 웃으며 잠든 처녀의 옷가지를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동작의 신속함은 자주 범방을 해본 숙련된 자의 솜씨였다.

'으흐흐흐흐.'

옆으로 찢어진 가는 눈이 그렇게 웃고 있었다. 관상가가 이런 눈을 세이장(細而長)이라 했던가. 눈매가 가느다랗고 길지 않으면 재주 있는 사람이라 했다. 그게 옆으로 나갔다면 심성이 악한 자다. 털북숭이는 그런 사내였다.

심성이 잔인하고 사나우면 상대가 지치고 기가 질리는 이상한 속성이 있다. 죽은 듯 널브러진 어린 계집을 탐하는 게 여간 조심스러운지 그의 손은 속적삼 사일 헤집고 도톰하게 치솟은 부분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침입자의 기척을 느껴서인지 달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움츠렸다.

"누, 누구···세요?"
사내의 음침한 속삭임이 후끈한 열기 속에 다가왔다.
"으흐흐흐, 내 말을 듣겠느냐. 앙탈을 부리겠느냐. 죽고 싶다면 말 하거라. 단번에 숨통을 끊어 주마."

말은 느릿했으나 손놀림은 빨랐다. 달래가 고분고분할 리 없었다. 끔찍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좌우로 몸을 뒤틀며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려 몸부림쳤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내의 몸놀림은 더욱 옥죄어지자 달래는 질끈 혀를 깨물었다. 그래서인지 거칠게 반항하던 달래의 몸이 멋대로 흔들리자 사내는 이상한 느낌에 상체를 쭉 폈다.

"아니 이런 년이 있나! 혀를 깨물어? 촌년이라 생각했는데 지조가 있었던가?"
털복숭이는 축 늘어진 달래의 몸을 들쳐 매고 헛간 쪽으로 다가가 대들보에 목을 걸었다.

[주]
∎준천사(濬川司) ; 한양 성내에서 개천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광중(壙中) ; 시체를 묻는 구덩이


#추리, 명탐정,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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