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맹목성에 관하여
흰갈매기가 내뿜는 연기가 악단석을 개조한 스튜디오의 천장 위로 사라질 즈음 피디는 우리 모두를 카메라 앞의 의자에 하나씩 앉혔다. 할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조그마한 한숨을 쉬며 촬영분량에 대해서 스태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가 자리를 다 차지하기 시작하자 능숙하게 카메라를 향해서 멘트를 시작했다.
"금요일의 특별한 여행, '마음 고백'과 함께 하시는 여러분, 그간 잘 지내셨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한 20대 초반 여성의 사연을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자살 직전 머물렀던 보카로 스튜디오를 옮겨서 그 삶이 담긴 술이 만들어지기 까지의 과정을 그려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 술의 제조 공정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클럽 멘도사의 멜레나 양을 모셨습니다."
할머니가 소개하자 클럽 안 어딘가에서 바람같이 날아온 멜레나가 짙은 향수 냄새를 뿜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단 며칠 사이에 그녀는 많이 야위어진 것 같은 볼을 하고서 짙은 마스카라에 속눈썹을 깊게 드리운채 탱고용 복장에 팔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빌로도 장갑을 끼고 있었다.
꼬맹이는 멜레나가 목에 두른 타조털 장식을 매만지며 어리광을 부렸는데, 흰갈매기는 역시나 그 곁에서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만 있었다. 멜레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지극히 과민한 반응을 보이며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그를 쏘아보는 멜레나의 눈길은 흰 중절모 아래에서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향하고 있었다.
"오늘은 완전한 가족의 모습 같네요?"
내가 한 마디 거들자 곁에 앉았던 피디는 슬슬 웃으며 할머니를 한번 쳐다보곤,
"박사님께서 멜레나 양을 꼭 참석시켰음 하셨죠. 덕분에 집 나갔던 엄마가 돌아온 따듯한 집안 같은 모습이 됐죠."
그 가운데 앞쪽의 손님용 테이블을 비집고서 안내원이 급히 달려오더니 숨을 몰아쉬고 자리에 앉기 시작했고, 멜레나와 '빨간 하이힐' 사이에 낀 그녀는 얼굴에서 심히 불쾌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주춤하던 그녀는 피디를 쏘아보더니 슬며시 주먹을 들어보였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카메라가 다가오기만 하면 요조숙녀 처럼 자세를 고치고 표정에 신경을 쓰는 모양에 조제와 나는 키득거렸다.
"지난번에 '빨간 하이힐' 님께서 문제의 그 아가씨의 고교시절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오늘은 그 다음 부분을 말씀해 주시죠."
할머니는 허리를 펴고 음료수를 한모금 마시며 말했다.
의자에 앉은 '빨간 하이힐'은 요상한 미니스커트 덕분에 한쪽 허벅지에서 허리 까지가 그대로 드러난 상태로 시선을 집중시킨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교시절, 지독한 열등감을 가진 영어 선생은 그 아이에게 열망사냥꾼의 병균을 조금씩 옮기고 말았지요. 그리고 그건 어느 순간 조금씩 그 아이의 영혼을 파먹어가고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 입시도 실패하고 한동안 집에 파묻혀서 나오지를 않았다더군요.
그나마 하나 있던 친구와 이야기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순간에도 그 아이는 다른 세계에 가 있었지요. 그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완벽하고 단단하고...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혼자 만의 세계였죠. 남들은 모르는..자신만이 알고 있는 세계였고, 그 비밀스런 세상에서 자신은 강하고 완벽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으며 남들과 정답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해요."
그러자 조제가 퉁명스럽게 한마디했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거군. 현실의 자아는 이미 남에게 패배자로 인식되었지만 내면의 자아는 그걸 부정하고 싶어하니까 현실과 다른 세계를 하나 만들어놓고 그곳에서 자신은 강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 맞죠,할머니?"
'빨간 하이힐'은 조제 쪽으로 흘끗 한번 쳐다보더니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렇게 한 두 어 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도 제대로 안자고 혼자 있더니, 현실이 걱정 되어서 입시 학원에 나갔다고 해요. 하지만 거기엔 또 다른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열망 사냥꾼은 그곳까지 미리 도착해서 몹쓸 바이러스를 죄다 뿌려놓았던 거죠."
그리고 우리가 앉은 뒤쪽 대형 화면 위로 영상이 나가기 시작했다. 어둡고 침침한 긴 복도가 이어진 학원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고, 그 틈에는 40 대 정도의 아줌마와
아저씨, 20대 후반의 처녀, 총각까지 섞여있는 조금 특이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뒷모습이 쓸쓸한 그 아가씨는 혼자 가방을 챙겨서 강의실을 나서고 있었다.
"애들 틈에 나이 든 어른들은 뭐죠?"
내가 묻자 '빨간 하이힐'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1990년대 후반에 한국 사회에선 IMF라는 것이 휩쓸고 지나갔죠. 그때 저 역시도 서른을 목전에 두고서 그 시절을 겪었어요. 실직을 당한 거대한 청년 실업자의 무리들이 뭘 할게 있었겠어요? 오로지 공부만 하고 정해진 대로 취업을 한 사람들일뿐 그나이 먹도록 자신의 뜻대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을 생각도 못해본 사람들이죠. 그런데 막상 취직을 하고 나니 그냥 막 잘렸으니..
차라리 전문직종을 가질 수 있는 학과에 다시 들어가자 하면서 의대, 약대, 한의대에 들어가기 위해서 대학 시험을 다시 치르기로 결심한 실직자가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넘쳐나는 재수생들 틈에서 그들까지 한몫을 했지요. 더구나 집에서 살림을 하던 주부들까지 합세하여 더욱 비대해진 재수생 광풍이었죠. 제 주위 사람들 중의 몇몇도 그런 식으로 몇년을 허비하고 지금은 대충 사는 사람들도 많아요.
어떻든 그 무렵의 재수학원엔 약 30퍼센트 정도가 그런 나이든 학생들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어린 애들과 똑같이 대학이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던 거죠."
그러자 안내원은 콧방귀를 뀌며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저는 대학을 안나왔어요. 하지만 대학을 왜 가려고 아둥바둥 대는지 이해가 안되는 군요? 더구나 대학 나와서도 회사를 잘린, 아니 실직 당한 상황에 또 돈을 들여가며 대학을 가다니요? 그거야말로 나라 상황이 안 좋은 상태에서 청년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봐요.
어서 경제를 부흥 시켜야 할 상황에서 쓸데없이 대학으로 몰려서, 애들이나 피나게 경쟁하는 입시율을 올리고 있다니, 좀 어이가 없네요. 꼭 대학을 통해서 직업을 구해야 안정적인가요? 그리고 직업이 꼭 한가지 뿐인가요? 다른 것들을 찾아보면 얼마든지 돈 벌 일이 있을 텐데 왜 굳이 정해진 것을 이용해서 직업을 찾으려고 하죠? 더구나 그것이 실현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안내원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빨간하이힐'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말을 이어갔다.
"십년이 넘게 지난 지금은 참 많은 변화가 생겼지만 그때는 사람들이 한가지 방향으로 같이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어요. 남과 다르게 살면 큰일 나는 줄 알았고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 방향이 옳다고 믿었기에 누군가가 강하게 제시하면 다들 그렇게 따랐지요. 그리고 그런 맹목성 역시 열망사냥꾼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고요."
'빨간 하이힐'의 대답과 함께 화면에서는 그 다음 장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걸어가는 그 아가씨의 뒷모습이 보이고, 그 주변에서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녀 대 여섯 명이 수근대며 뒤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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