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 한 발 내딛기가 정말 그렇게 어려울까 싶다. 사실 지난해 5월 첫 걸음을 내딛는 듯했다. 그런데 웬 걸, 도무지 감감 무소식이더니 이제 자기를 드러낼 모양이다. 박근혜 전 대표의 6월 21일 발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박근혜 전 대표, 중도로 이동하려나?
13개월 전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박 전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경제발전의 최종 목표는 소외계층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의 행복공유에 맞춰져야 한다."
뭐, 대단한 선언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의 극단적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조금 벗어나보려는 기미로 읽혔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지난 21일의 발언은 조금 더 나갔다.
"경제정책 운용의 주안점을 성장률뿐 아니라 서민과 젊은층에 도움이 되는 데 두어야 한다."
이 발언 역시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소득분배나 양극화까지 입에 담았으나, 곱씹어 보면 별 게 없다. 다만, 성장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 서민과 젊은층의 고단한 현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변화의 기미로 읽을 여지는 있다. 드디어 박 전 대표가 우(right) 편향에서 중도(center)로 이동하려는 모양이다.
사실 박 전 대표의 중도 이동은 때늦은 감이 크다. 2002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 전 대표가 패한 것은 중도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지지기반은 한나라당 지지층, 보수 또는 우에 갇혀 있었다. 견고했으나 확장성이 부족했다. 그래서 새롭게 포지셔닝해야 할 필요성은 진작부터 박 전 대표에게 던져진 숙제였다.
그런데도 이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 상황적 요인은 세종시 수정 논란 때문이다. 그는 세종시 수정 프레임에 매몰돼 정작 해야 할 지지기반 확장을 시도하지 못했다. 친이 진영이 여론의 열세에도 세종시 수정을 밀어붙인 것도 박 전 대표의 지지기반 확장을 저지하려는 시도에서였다. 갑론을박하다, 1년 넘게 허송세월해야 했다.
친이의 세종시 수정 카드로 인해 박 전 대표가 입은 손해는 만만찮다. 그러나 여론 지지율에서 유의미한 대항마가 당내에 없다는 점에서 아직 초초해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보수 내에서 박 전 대표에 대한 회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다. 이 땅의 보수는 시장주의자든 발전주의자든 여전히 서울(수도권) 패권주의, 행정권력 중심주의에 빠져 있다. 일종의 경로의존성이다. 따라서 행정부를 일부 옮기는 세종시 원안을 고집하는 박 전 대표에게 보수들이 마땅찮아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다른 것은 몰라도 독선은 무조건 피해야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보였고, 지난 정부에서도 확인된 사실 중 하나는 대중들이 지도자의 독선만큼은 지독하게 싫어한다는 것이다. 자신만이 옳다는 오만, 요지부동 밀어붙이는 독선, 다른 사람은 말도 못하게 하는 강압 등에 대해선 어김없이 '투표 짱돌(paper stone)'을 던졌다. 세종시 수정과 관련해 박 전 대표가 바로 이런 독선의 리더십 행태를 보여준 것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여론이 적지 않다. 이 또한 부담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20~30대의 정서다. 선거에서 이들이 화를 낸 이유는 한마디로 답답함 때문이다. 예컨대 김제동 논란에서 보듯, 이들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문화세대고, 감성세대다. 또 독선과 위계를 싫어하고 공존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세대다. 이들과 소통하지 못하면 누구도 승자가 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박 전 대표의 리더십이 갖는 한계는 분명하다.
이명박 대통령(MB)은 대중과 불화를 겪고 있다. 대중과 대립하고, 대중을 무시하고 있다. 이런 오만은 대통령이 흔히 빠지는 오류다. 이 기조로 가면 MB는 성공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 함의다. MB의 실패가 보수세력 전체의 실패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수는 1997년 IMF 파산과 차떼기로 레드카드를 받았다. 그런 그들이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세력의 잘못에 힘입는 것이기도 하지만 뉴라이트 운운하며 보수가 환골탈태하는 듯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대중의 눈에 그리 미덥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과거의 부패와 무능에서만큼은 벗어났으려니 생각했다. 그래서 표를 줬다.
그런데 MB를 보니 달라진 게 없다. 구(old) 보수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달라진 것이 없는 것으로 대중의 생각이 점차 굳어지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먹고 살지에 대한 비전 제시도 없다. IT는 사라지고 토건만 시끄럽다. 이번 선거에서 20~30대에 이어 40대까지 돌아선 것도 이런 흐름의 반영이다. 이렇게 되면 박 전 대표 역시 한 무더기로 휩쓸려 갈 것이다.
박 전 대표가 성공하려면
따라서 박 전 대표는 여전히 어느 정도 지지율을 받는 대선후보임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MB로부터 떠나고 있는 민심이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하고,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 박세일류의 선진화 담론이나 콘텐츠도 이미 그 효력을 다한 것 같다. 그런데도 박 전 대표가 세종시 프레임에만 순순히 갇혀 있었으니 사실 위기를 자초한 측면도 없지 않다.
박 전 대표의 중도 행보는 바람직한 선택이다. 아무리 봐도 그 전략밖에 없다. 그런데 함정이 있다. 박 전 대표의 중도가 MB의 중도실용처럼 이미지 정치로 전락한다면 오히려 민심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한나라당의 구각, MB의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야 한다. 어떻게? 좋은 예가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의료보험을 도입했듯이, 시민단체가 주장하는 '모든 병원비를 건강보험 하나로' 정책을 박 전 대표가 전격 수용하는 것이다.
요컨대, 박 전 대표가 살 길은 민주와 복지다. 민주를 위축시키거나, 복지를 외면하고선 승리할 수 없다. 언제나 그렇듯 적은 내부에 있다. 박 전 대표에게 그것은 내부의 꼴보수다. 이들의 극복여부에 박 전 대표의 대권 성패가 달려 있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과연 박 전 대표가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 본질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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