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단오제(6월 12일~6월 19일) 기간 동안, 행사가 열리는 강릉 남대천 일대는 온통 시끌벅적하다. 굿당에서는 무당들의 사설이 쩌렁쩌렁 울리고, 한쪽에서는 농악대의 흥겨운 연주가 이어진다. 난장에 늘어선 수많은 식당에는 대낮부터 한 잔 마시고 있는 어르신들도 많다.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무형문화유산인만큼 이 기간 동안에 남대천 일대가 시끄러운 것은 당연하다. 행사장을 천천히 걷다보면 온갖 소리들이 들려온다. 식당에서 아주머니들은 호객행위를 하고, 안내소에서는 사람을 찾는 방송을 내보낸다. 어디에서 몇시부터 무슨 공연을 한다는 안내방송도 나온다. 소음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뒤섞인 소리에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골장터에 온 느낌이다.
상대적으로 덜 시끄러운 공연도 있다. 행사기간 동안 매일 한두 차례씩 행해지는 관노가면극이 그것이다. 관노가면극은 재례, 단오굿과 함께 강릉단오제 3대 지정문화재를 이루는 중요한 공연이다.
관노가면극은 조선시대에 관아의 노비들이 가면을 쓰고 벌였던 극이다. 공연을 하는 사람들은 얼굴에 가면을 쓰고 대사는 하나도 없다. 우리나라의 가면극 중에서는 유일한 무언극이다. 가면 때문에 표정으로 연기를 할 수도 없다. 몸짓과 춤이 유일한 표현수단인 셈이다. 때로는 열 마디의 말보다 한 차례의 행동이 더 큰 효과를 볼 때도 있는 법이니 굳이 말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등장인물도 많지 않다. 두 명의 장자마리, 두 명의 시시딱딱이, 양반광대와 소매각시 이렇게 여섯 명이 전부다. 그외에는 주위에서 흥을 돋우는 악사들이 있다. 극의 시작은 장자마리가 분위기를 띄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공연시간은 약 한 시간 가량, 공연장 주위에는 많은 관람객들이 있다.
강릉단오제의 핵심 공연 관노가면극
장자마리의 복장은 무척 특이하다. 포대자루같은 삼베옷을 전신에 뒤집어쓰고 있다. 이 옷으로 눈과 입만 내놓은채 얼굴도 가리고 있다. 얼굴만 놓고보면 나쁜짓을 하기 위해서 복면을 한 괴한 같다. 어차피 말이 없는 무언극인데 입은 왜 안가렸을까.
장자마리는 허리에 둥그런 테를 두르고 있어서 배불뚝이처럼 보인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서 이런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장자마리 두 명이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서 판 가운데에서 분위기를 띄운다. 불룩 나온 배를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같이 뒤엉켜서 쓰러지기도 한다.
장자마리가 한판 놀고나면 본격적인 극이 시작된다. 하얀 탈을 쓰고 담뱃대와 부채를 든 양반광대와 노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소매각시가 등장한다. 나이 많은 양반광대는 점잖은 척 위엄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만 젊은 소매각시의 미모에 반해서 춤을 추며 소매각시에게 구애를 한다.
소매각시는 처음에 수줍은 듯 거부하는 몸짓을 한다. 양반광대가 다가가면 몸을 빼고 달아나며 춤을 춘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양반광대의 구애를 못이겨서 함께 다정한 모습으로 장내를 돌아다닌다.
시시딱딱이의 방해로 깨진 사랑
하지만 어딜가나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이 있는 법. 관노가면극에서는 두 명의 시시딱딱이가 그 역할을 한다. 시시딱딱이의 험상궂은 가면은 나쁜 것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란다. 극 중에서는 양반광대와 소매각시 사이에 끼어들어서 훼방을 놓는 나쁜 짓을 한다.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 오히려 어색할테니 시시딱딱이의 방해와 간섭은 극을 그만큼 흥미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시시딱딱이는 양반의 두 팔을 잡고 바닥에 팽개치기도 하고 억지로 각시를 끌고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와 함께 춤을 추자고 청하는 몸짓을 한다. 극이 한참 전개되어갈 무렵에 한 할아버지가 장내에 들어왔다. 술을 한 잔 마신듯 붉어진 얼굴로 시시딱딱이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말을 한다. 아마도 양반과 각시 사이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극 도중에 또다른 방해꾼이 나타났는데도 출연진은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극을 이끌어가는 양반광대는 그 할아버지의 머리를 부채로 가볍게 치며 나가라는 손짓을 한다. 관람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결국 악사 중에 한 명이 할아버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양반광대가 구경하던 한 서양인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자신의 담뱃대를 주면서 그걸로 시시딱딱이를 한 대 때리라는 몸짓을 한다. 서양인도 시시딱딱이가 하는 행동이 짜증스러웠나보다.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장내로 들어가서 날리는 분노의 일격!
자신의 마음을 증명하려는 소매각시
양반광대는 시시딱딱이가 두 명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한 명을 응징하는 사이에 다른 시시딱딱이는 이미 소매각시와 함께 다정한 춤을 추고 있다. 소매각시가 결국 시시딱딱이의 끈질긴 요청에 넘어간 것이다. 이것을 보고 양반광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질투에 눈이 먼 양반광대는 시시딱딱이를 제치고 소매각시를 다시 데려온다.
소매각시는 자신이 잠시 시시딱딱이에게 한 눈을 판 것을 뉘우치고 양반광대에게 사죄하지만 양반광대는 요지부동이다. 양반광대는 한 쪽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소매각시는 바닥에 앉아서 고무신을 벗어들고 서럽게 운다. 소매각시가 울건말건 양반광대는 매정하게도 등을 돌리고 앉아서 담배 삼매경에 빠져있다.
그러자 소매각시가 결단을 내린다. 죽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증명하겠다는 것. 양반광대에게 달려간 소매각시는 말릴새도 없이 양반의 긴 수염으로 자신의 목을 감고 죽은 척 쓰러진다.
다급해진 것은 양반광대다.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쓰러진 소매각시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슬피 울고, 뒤쪽에 있는 제단에서 소매각시를 되살리기 위해 하늘에 기원한다.
양반에 대한 풍자와 해학
하늘이 이들의 바람을 들어주었는지 소매각시는 자고 일어난듯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이제 슬픔은 기쁨과 화해로 바뀌었다. 양반광대와 소매각시는 언제 그런일이 있었냐는듯 즐겁게 춤을 추고 관객들도 하나 둘씩 장내로 들어와서 손을 잡고 어울린다. 관객과 출연진이 함께 어우러지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진행된 무언극이지만 내용을 파악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대사가 없어서 더욱 집중할 수 있었고, 이런 과정을 말로 표현했다면 오히려 어색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이 말을 하기 전인 아주 오랜 과거에는 분명 사람들의 관계가 저런 몸짓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다.
출연진들이 관아의 노비들이었다는 것도 어쩌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노비들은 양반들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었으니 양반에 대한 조롱과 풍자도 소리내서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관노가면극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 수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소리없이 강하다'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면 적당할까. 대사는 없지만 등장인물들의 춤과 몸짓은 말이 없어도 될 만큼 강렬하다. 마지막에 관객들과 함께 어울리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이런 면들이 관노가면극을 수백년간 이어온,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갈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