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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병원에 계시던 노친이 어제(5일) 오후 마침내 퇴원하셨습니다. 지난해 11월 한 달 동안을 꼬박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계셨고, 12월부터 올해 7월 5일까지 줄곧 태안의 서해안요양병원에 계셨으니, 무려 8개월 이상을 병상에서 생활하신 셈입니다. 그렇게 반년하고도 두 달이 넘는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병실을 떠나 가정으로 귀환하신 것입니다.
상태가 좋아지시면서 여러 번 병원 밖으로 나와 가족들과 함께, 또는 큰아들과 단 둘이 점심식사도 하시고, 지난 '6/2지방선거' 때는 투표도 하시고, 외출 기회에 잠깐씩 집에 들르시기도 했지만, 집 안에서 가족과 함께 식탁 앞의 당신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시고, 또 당신 방 잠자리에 누워 밤잠을 주무시는 그 '복귀'는 어제부터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폐암 말기와 임파선 암, 그리고 골반 전이 및 골절로 돌아가실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노친은 이제 완전히 회복되셨다고 믿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픈 데 없고, 식사도 잘 하시고, 당신의 두 다리로 걸어서 화장실을 다니고, 가까운 거리는 별 무리 없이 마음대로 이동을 하시니, 그것은 '완전 회복'의 증좌일 것도 같습니다.
회복을 입증하는 것은 또 있습니다. 안 들리던 귀가 잘 들려서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게 된 것, 지워졌던 기억들이 모두 소생한 사실도 다 완전 회복을 입증해주는 것이 될 듯싶습니다.
노친은 스스로 당신이 회복되신 것을 느끼면서 오랜 병상생활에 대한 지루함을 토로하셨습니다. 만날 먹고 자고 화장실 가는 것이 전부인 생활이 너무 무의미하다는 표현도 하셨지요. 내가 매일같이 하루 두세 번씩 요양병원을 다님에도, 노친이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족과 떨어져서 독거노인 처지로 살아오신 것도 아니고, 아들들 집과 딸들 집을 전전하며 살아오신 것도 아니니, 노친께서 가족의 품과 가정생활을 그리워하실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나는 금년의 절반이 지나는 시점에서 노친의 퇴원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노친께 집의 거실에 마련해놓은 병상에서 지내시기를 권했습니다. 하지만 노친은 집에서도 병상에서 살기는 싫다고 하셨습니다. 병상이 없어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으니 병상을 처분하자고 했습니다.
나는 노친으로 하여금 병상이 아닌 방바닥에 스스로 앉고 일어서 보도록 했습니다. 노친이 조심스럽게 방바닥에 앉았다가 두 손을 짚고 어렵게나마 스스로 일어서는 것을 보고는 집 안 거실을 비좁게 만드는 병상을 처분할 결심을 했고, 또 퇴원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대학생 아이들이 집에 와 있는 점(집에 와 있도록 유도한 것이지만), 조금 있으면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도 방학을 하게 되는 점 등을 고려하여 7월 초에 노친을 퇴원시켜 드리기로 계획을 세운 거지요.
방학이 끝난 이후에도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신 노친은 앞으로 더욱 활력을 얻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벌써부터 그런 조짐이 보입니다. 밤잠을 잘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신 노친이 몸을 움직이시는 것을 보니, 병상생활을 하시기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이 분명하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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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게는 또 한 가지 바쁜 일이 생겼습니다.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인터넷 매체에 그 동안 여러 번 내 노친의 병환에 관한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노친을 돌보는 일이며 암을 물리친 기적 같은 이야기들이 많은 분들의 관심을 산 것 같습니다. 그에 따라 여러분의 문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천주교 대전교구의 '대전주보'에 노친 관련 이야기를 쓴 것 때문에 요즘에는 더욱 부쩍 많은 전화문의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해 여름부터 대전주보의 '지요하와 함께 보는 믿음살이 풍경'이라는 고정 코너에 한 달에 두 번씩 글을 쓰고 있는데, 지난날 27일치 주보에 게재된 '암을 이기신 87세 노친'이라는 글을 우선 소개해 봅니다.
올해 87세이신 노친이 지난해 6월 서울성모병원에서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임파선에도 암이 있고, 여생은 6개월 정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종양내과를 피하고 완화의학과를 선택하여 호스피스 병동에 열흘 정도 있다가 퇴원한 후부터 우리 부부는 식이요법을 시행하였습니다. 말이 쉬워 대체의학이고 식이요법이지, 그것은 환자 본인은 물론이고 온 가족의 큰 노고와 정성의 집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친은 9월 23일 폐가 깨끗해졌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노친께 확실한 병명을 말씀 드렸지요. 나날이 좋아지시는 노친을 보며 우리 부부는 자못 의기양양해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11월 1일 갑자기 노친께 일어서지도 못하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다시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으로 모신 다음 정밀검사를 시행했는데, 노친은 너무 지친 탓인지 돌아가실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간호수녀님이 임종이 임박한 환자 보호자들에게 실시하는 교육에 나도 참석하면서 지레 눈물을 흘려야 했지요.
그러나 희망을 놓지 않고 노친께 웅담과 흑마늘 엑기스를 집중적으로 복용시킨 다음 관장을 하게 해서, 변비 현상으로 일주일 이상 보지 못했던 숙변을 모두 배설케 하니 회생의 기미가 보이게 되었습니다.
최종 진단은 암세포의 '골반 전이 및 골절'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상태가 좋아져서 11월 31일 태안의 서해안요양병원으로 옮겨올 때는 여생이 2개월 정도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요양병원에서도 회복보다는 고통을 감소시켜서 비교적 편안히 여생을 마치시게 해드리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을 들었지요.
하루 세 번씩 요양병원을 다니며 노친을 보살폈습니다. 노친께 조금도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 암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감소시켜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병원에 가고 올 적마다 운전을 하면서도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골절이 아니라 엉덩이뼈에 붙은 암세포 때문에, 바로 그 암세포 부위가 골절되었으니 87세 노인이 다시 걷는다는 것은 의학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일 터였습니다.
그런데 노친은 다시 걷게 되었습니다. 3월 말 화장실에 모시고 가느라 휠체어에 태울 때 내 두 팔의 힘이 덜 드는 것을 느낀 순간의 기쁨, 그 후 4월 초 보조기구를 잡고 다시 걷는 모습을 처음 보던 날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제 노친은 외출도 하시고, 지난 '6월 2일 지방선거' 때는 투표도 하셨습니다. 나는 병원 가는 일을 하루 두 번으로 줄였고, 가끔 점심때 노친을 모시고 나와 외식도 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곤 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글이 나간 후 내 연락처를 묻는 전화가 태안성당 사무실로 많이 와서 사무장이 더욱 바쁠 지경이었습니다. 3만부를 찍는 대전주보에 나갔을 뿐인데, 서울에서도 대구에서도 내게 전화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애초 정보 나눔과 '도움'을 전제로 그런 글을 발표한 것이기도 하니, 당연히 내가 기쁘게 감당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요즘 그쪽으로 적잖이 시간을 씁니다. 노친의 암 퇴치를 위해 우리 부부가 시행했던 식이요법과 여러 가지 대체의학의 실체들을 소개하고 식단표 등을 이메일 전송해주면서 희망을 가지도록 열과 성을 다합니다.
병고를 겪는 이들에게 내 나름으로 열심히 위안과 희망을 주고, 내가 실증한 사례로 실제적인 조언을 드리면서 또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일 것으로 믿습니다. 그것 또한 하느님의 소명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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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친께서 퇴원하신 어제, 나는 특별한 일 한 가지를 했습니다. 요양병원에 가서 노친을 모셔오느라 잠시 몸을 움직인 것 외로는 하루 종일,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집중적으로 달라붙어 마무리한 일입니다.
'국제효문화선양운동본부'라는 단체에서 시행한 제1회 '전국청소년 효문화선양 글짓기대회'의 심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접수된 220편이 넘는 글들 가운데서 예심을 거쳐 추려진 70여 편의 글을 읽고 초중고 별로 대상, 금상, 은상, 동상, 장려를 가르는 일이었습니다. 또 심사평 작업도 해야 했습니다.
그 일이 어떤 경로를 거쳐 내게 왔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인터넷으로 접수된 효에 관한 초중고 학생들의 효에 관한 글을 읽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꼼꼼하게 읽고 비교하면서 등위를 정하는 데는 많은 고심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일찍이 초중고와 대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글 짓는 법을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글보다 우선은 마음을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글을 짓는 일은 마음을 가꾸는 일일 터였습니다. '글은 마음의 거울'임을 상기하면서 학생들의 글 속에서 마음을 읽고자 했고, 마음의 거울을 보고자 했습니다.
논술교육의 효과 덕인지 전반적으로 잘 쓴 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논술 형태의 규격화된 글들이 많았습니다. 어쩌면 논술교육의 폐해일지도 모른다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다수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큰 다행이었습니다.
우리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효를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며 어떤 양식으로 실행하고 있는지를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러는 아릿함도 안겨주고 웃음도 선사하는 글들을 통해 아직은 우리 사회에 효의 문화가 잘 유지되고 있음을 감득할 수 있었습니다. 한 학생의 글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전략) 가족의 손길만큼 좋은 치료약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가족이 보고 싶고 그리우실까? 간병인들이 아무리 잘해 주어도 가족만큼은 못할 것 같다."
나는 그런 구절이 들어 있는 한 고교생의 글을 읽고 나서 요양병원에 가서 노친을 모셔오는 일을 서둘렀습니다. 노친을 집에 모셔오고 병원에서 가져온 소소한 짐들을 정리한 다음 다시 심사 작업을 계속하면서, '어머니 퇴원하시는 날에 내가 효행에 관한 청소년들의 글을 읽고 심사를 한다니!' 그 사실을 신기해하기도 했습니다.
새벽 3시쯤 일어나서 살며시 어머니 방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노친과 손녀가 나란히 누워 깊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끝 무렵에 엄마를 잃은 후로 줄곧 큰집에서 생활하는, 올해 중1인 아이였습니다. 간혹 밤에 살며시 방문을 열어볼 때마다 혼자 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유난히 측은하고 안쓰럽게 보이곤 했는데, 이제 다시금 조손이 함께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원상회복'이라는 단어가 냉큼 내 머릿속에서 자리를 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노친과 손녀의 잠자는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가만히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리고 입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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