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청에서 노린 도가(道家)는 남산골에서 멀지 않은 초동 끝자락의 '원숭이 도방'이었다. 이곳에 집터를 잡은 건 서부 여경방을 오가는 권속들 출입에 불편함이 없고 서울과 지방으로 통하는 산물을 어렵지 않게 걷어 들일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이곳을 원숭이 도방이라 한 것은 예전 도주의 이름이 신익수여서 그들의 힘이 여경방에 자리한 장악원을 움직이는 실세였기 때문이다.건물은 일종의 유곽형태로 지어졌다. 음률에 관심있는 천민 계집을 양성하다 보니 정원엔 그들의 굳은 마음을 풀어줄 화초가 널비했고 그윽한 향내를 풍기는 향나무가 군데군데 자리해 그윽한 내음을 주변에 풍겨냈다.
음률을 배우는 계집은 필요에 의해 여남은 명에서 스무 명이 됐지만 그들이 밖으로 나가 원숭이 도방에 이익을 주지 않았어도 일종의 체아(遞兒) 형식으로 경비를 내렸다. 체아란 쉬고 있지만 언젠가 일을 한다는 점을 예상해 수고비를 내린 걸 말한다.
대문간엔 편액이 있는 자리에 귀령학수란 달필이 무겁게 자리 잡았고 집안에 들어서면 널따란 건물이 품자(品字)형태로 안온하게 자릴 잡았다.
그들의 숙소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으나 간간이 자진머리장단을 타는 노랫소리가 쏟아지는 걸 보면 여기가 장악원에 들어갈 악생을 양성하는 곳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광화문에서 보면 서쪽이라 하여 서관이었다.
집 뒤쪽은 주인이 기거하는 곳으로 (주인은) 언제나 사랑채에서 일을 봤다. 일이란 게 장악원에 필요한 인력이 어느 정도며 집에서 키우는 악생 가운데 적임자가 누구인지를 보고 받거나 파견하는 일을 수결(手決)했다.
좌우포청과 사헌부에서 이곳을 원숭이 도방이라 하는 건 처음 문을 연 주인의 성이 신씨(申氏)인데다 창포검을 든 무뢰배들이 들락거리기 때문이다.
주인의 풍모를 짐작케 하는 사랑방엔 물건들이 즐비했다. 죽장검과 창포검이 엇비슷히 벽면에 놓인 채였고 좌우 주련(柱聯)엔 자객들의 암행을 나타내는 구절이 초서체로 달렸다.
도방의 붓 끝이 힘차게 도약하며 용(龍) 자를 그려낸 어제 정오, 문밖에서 기척이 왔다.
"나으리, 상압(潒鵝)니다.""무슨 일인가?""표철주 집주름이 나으리 뵙길 청하고 기다린 지 오래됐습니다.""표철주는 근자에 거래가 없었는데?""다급한 일이라 하여 지금껏 기다리고 있습니다.""만나 보세."스무 살 쯤 되는 서사 차림의 사내는 예순이 넘은 백발머리의 사내를 안으로 데려왔다. 머리는 봉두난발이었지만 두 눈만은 살아있어 올빼미처럼 섬찟한 느낌을 풍겼다. 그는 붓질하는 사내에게 큰 절을 올리고 한 걸음 물러나 무릎을 꿇었다.
"소인, 표철주이옵니다.""무슨 일인가?"여전히 사내의 붓질은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소인은 이제껏 집주름 일을 해 왔습니다."집주름은 요즘 말로 부동산중개업자다. 그가 자신의 행색을 밝히자 도방도 머리 들어 시선을 마주쳤다. 여러 생각들이 도방의 뇌리에서 꿈틀거렸다. 어찌 표철주를 모르겠는가. 자신의 나이 쉰이 넘었지만 상대는 예순 넘은 석양녁 인물이다.
그가 세자궁 별감으로 있을 때 기생을 끼고 몇 말의 술을 마시던 인물이라는 걸 한량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 늘 황금색 바지를 입고 지내다 비 오면 그제야 다른 것으로 갈아입을 정도로 깔깔한 성격이었다.
호화롭게 사치스러운 그의 인생이 예순이 넘어서자 이가 빠지고 등이 굽었다. 길을 걸을 때엔 쇠 지팡이를 짚어야 걸을 수 있는 초라한 노인으로 변한 그가 도방을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나으리, 소인은 옛 영화를 들먹거리려는 건 아닙니다만 한때는 세자궁 별감이었습니다. 힘이 넘쳐나는 시절이라 기생들을 찾아다니며 힘을 쏟은 탓에 몸은 상하고 추억만 아련히 남은 편이지요.""그래, 무슨 일인가?""소인이 나으릴 찾아온 것은···."두 달 전이라 했다. 그동안 표철주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집주름 일을 하며 선비들이 책 읽는 곳에 들러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일을 해 왔었다.
힘깨나 쓰는 세도가 서얼들이 모이는 곳이라 잔재미도 쏠쏠할 것이라 생각해 찾아들었는데 말이 책 읽는 곳이지 음란한 행위를 연구하는 잡스런 곳이었다. 그곳 일행 중에 전라도 어느 절에서 중 생활을 하다 쫓겨난 태욱(太昱)이란 자가 흥미로운 제안과 엽전 쉰 냥을 내놓았다."이보시게 궐자, 내 쉰 냥 드릴 테니 흥미로운 일을 하지 않겠소.""무슨 일이우?"표철주는 상대가 이끄는 구석진 곳으로 따라갔다.
"장안은 넓소. 그동안 궐자도 느꼈을 테지만 있는 놈들은 때가 오면 지저분한 일을 멋대로 처리해 지탄을 받으면서도 배를 두드리며 살고 있소. 궐자도 집주름 하며 그런 저런 생각을 해 봤을 것이오만, 사내가 밖으로 나돌면 집안에 있는 아녀자들은 상상 이외의 짓을 한다지 않습니까."표철주는 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쥐어 준 동전만 만지작거렸다. 사내의 말이 더욱 은근해졌다.
"장안엔 과부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그들이라고 모든 일을 곱게 어루만지는 건 아닙니다. 사내가 없는 여인네는 기나긴 밤을 한숨 속에 지세며 탄식을 흘리지요. 그녀들이라고 어찌 다른 생각이 없겠습니까. 남 보기에 부러운 미색들이니 더욱 그렇지요."빡빡머리는 산중에 살았던 위인답게 행동이 여간 조심스러웠다. 그는 더욱 목소릴 낮췄다.
"해서, 집주름이란 점을 앞세워 궐자가 수소문 해 보라는 것이오.""예순 넘은 내가 음란서생이 되란 말인가?""아이구 그런 소리 마쇼, 음란서생이라니. 그런 건 피끓는 젊은 것들이 할 테니 궐자는 찾아간 집에 누가 사는 지 그것만 알아봐주면 됩니다.""그러니까 중신을 하라는 건가?""에헤헤, 그런 게 중신일지 모르나 궐자는 손해날 일 하나도 없소. 오히려 몸이 뜨거운 계집들을 도울 수 있으니 선행을 베푸는 거지. 집주름이란 점을 내세워 장안을 돌아다닐 때 무엇보다 시집 못 간 처녀나 과부들이 있는가를 살펴 주시오. 그리 해준다면 손에 쥔 쉰 냥은 궐자 것이오."간밤에 개꿈을 꾸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생겼는가에 감지덕지 하며 표철주는 고갤 끄덕였다. 사내 말에 수락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쉰 냥을 받아먹은 죄로 몇 군데 소개해 줬는데 뒷소식은 지금껏 들은 바 없었다.
"그 후 소인은 가리왕산에 칩거한 사촌 동생에게 좋은 약젤 부탁했지요. 그 아이가 인편에 전한 소식은 깊은 산 험한 골엔 금석곡(金石斛)이란 약제가 있는데 중원의 제왕들이 기를 쓰고 찾아 나선다는 귀한 약제랍니다. 자신의 운이 좋아 그런 약제를 캤으니 가져오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사람이 왔던가?" 표철주는 울음을 터뜨릴 듯 낯이 일그러졌다.
"산에서 온 사촌 동생은 어찌된 셈인지 수표교 물 웅덩이에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포청에서 조사를 한다 어쩐다 부산을 떱니다만 일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다 지니고 왔을 약제까지 없어졌으니 이것은 약초를 노리는 자의 소행이라 생각하여···.""찾아왔단 말인가?""예에 도방 어른."표철주는 재빨리 덧붙였다.
"소인도 나름대로 조사를 했습지요. 가리왕산에 있던 아이가 수표교 인근에 나타난 걸 본 사람이 있습니다. 제중당(濟衆堂)이란 곳이온데 가져온 약제가 두 촉이라 가격을 물었던 모양입니다. 약초꾼들이 농담질하며 색시집으로 끌고 가 술을 진하게 빼앗아 먹고 엉뚱한 장소를 알려주며 그곳에 가면 비싼 값으로 팔 수 있다고 했답니다.""그곳이 어딘가?""나으리가 계시는 바로 이곳입니다.""뭐라? 그런 사실은 관아에서 알고 있으니 수사할 것인데 어찌 날 찾아왔는가?""귀한 약제지만 억울하게 죽은 아이의 원혼이나 달랬으면 싶어섭니다. 모든 정황이 제중당에 머물러 있는데 소인의 능력으론 한 걸음도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나으리께선 예전 도방처럼 옳은 일에만 나선다고 했으니···.""자넨 돌아가 내일 다시 들리게. 도움 될만한 것은 상아에게 말해 주고.""알겠습니다, 도방 어른."밖으로 나온 그는 상아에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죽은 아이 몸에 있는 칼자국 흔적 말이야. 그게 우(又) 자 흔적이니 칼계의 소행이 분명한데?""
그리 말하면 안 됩니다. 그나마 집주름이라도 호구지책으로 삼을 양이면 말을 가려 하세요. 집주름 얘길 듣고 저라고 가만 있었겠어요. 좌포청 사령에게 탁배기 값 찔러주고 정보라는 걸 얻었지요.""쓸만한 게 있던가?""수표교에서 발견된 주검엔 우(又) 자 흔적이 있기는 하나 차(叉)와 흡사해 임시방편으로 엉성히 그린 것이라 칼계의 소행으로 뵈지 않는답니다. 그 일에 대해 도방 나으리도 깊이 숙고하신 것 같습니다. 나으리께서 손을 쓰실 것이니 내일 오면 전말을 알게 되겠지요."이제 본격적으로 흔적을 찾아 나설 모양이었다.
[주]
∎여경방(餘慶方) : 종로구 광화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