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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8일 3․15탑(마산)에서 약 300~400명가량의 학우들과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 등을 불렀다. 내가 시위대 앞쪽에 있는데 '요년들' 하면서 갑자기 경찰관 3~4명이 달려들어 치마를 올려서 얼굴에 덮어씌운 채 머리카락을 뒤에서 움켜잡고 질질 끌고 갔다. 치마를 들어 올려 얼굴을 덮어씌워서 나의 아랫부분은 속옷이 다 드러나게 되었고, 이러한 상태로 시멘트 바닥에 눕혀진 채 끌려갔다."

"1979년 10월 21일 해군보안부대라는 곳으로 연행되었다. 수사관 3명 정도가 교대로 나에게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과 관계되어 있지 않은지 추궁했다. 옷을 벗기기도 하였고 며칠 동안 잠을 재우지도 않았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 좌우측으로는 착검한 병사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내가 부인하면 수사관은 손으로 얼굴과 몸을 구타했다.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하여 남민전의 일원이라고 허위로 말한 사살이 있다."

 정성기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이 14일 오전 경남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면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낸 결정서를 들어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정성기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이 14일 오전 경남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면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낸 결정서를 들어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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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마산민주항쟁(부마민주항쟁) 때 진압 및 수사과정에서 인권 침해를 받았던 최아무개(여, 당시 24세, 경남대 국어교육과 3년 재학)씨와 서점을 운영했던 노아무개(남, 당시 27세)가 한 진술이다. 이처럼 부마민주항쟁 당시의 인권 침해 사례가 31년 만에 밝혀졌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2일 보도자료를 통해 '부마항쟁 진압·수사과정 인권침해 사건'과 관련해 결정 사실을 공개했다. 이규정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과 차성환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상임이사가 신청하고, 진실화해위가 조사를 벌여 이같이 결정했던 것.

이에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14일 오전 민주공원(부산)에서,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창원)는 같은 날 경남도청 브리핑룸에서 각각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는 부마항쟁에 대한 전면 조사를 하고, 민주헌정의 기본질서를 공고히 할 것"을 촉구했다.

 정성기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이 14일 경남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면서, 당시 경남대 앞에서 벌어진 시위 장면을 담은 사진을 입수해 설명하고 있다.
 정성기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이 14일 경남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면서, 당시 경남대 앞에서 벌어진 시위 장면을 담은 사진을 입수해 설명하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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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는 정성기 회장(경남대 교수)과 허정도 전 경남도민일보 사장, 우무석 진이호 옥정혜 이창곤 윤치원씨 등이 참석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당시 경남대 앞에서 벌어진 시위 장면을 담은 사진을 입수해 이날 공개하기도 했다. 정성기 회장은 "30년이 지나 정부의 공식 입장이 나왔지만, 부족하다"며 "전면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와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공동)회견문을 통해 "부마항쟁이 '잊힌 역사'가 되어 온 과정 그 자체가 우리 현대사와 민주주의의 수준을 드러낸다"라며 "부마항쟁은 그 항쟁의 직접적 결과인 10․26사태와 유신체제의 붕괴로 인해 오히려 역사의 그늘에 묻혔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번 조사는 겨우 4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단 2명의 조사관에 의해 수행된 것으로 애당초 부마항쟁의 규모나 역사적 무게에 비추어 터무니없는 조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우선 조사 대상 규모에 있어서 1500여 명의 공식 연행자, 100명에 육박하는 기소자가 있는 사건임에도 피해자 조사가 이뤄진 건 20명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또 이들은 "조사 내용에 있어서 그 20명에 대해서도 진압 및 조사과정의 인권침해 이후 30년간 안고 살아온 정신적 후유증이나 가족관계 파괴, 블랙리스트로 인한 구직난에 따른 고통 등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부 조사 결과는 의미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 경찰은 물론 부산시장, 경남지사, 군과 정보 관계자, 경찰 등을 조사하여 부마항쟁을 남민전과 연루된 것으로 조작하려 했다는 것을 밝혀냈다는 점에서다. 또한 시위군중이 만든 사제총기가 발견되었다고 당시 발표한 것이 마산경찰서장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것, 공수부대와 39사단 병력 투입에 의한 진압은 위수령 이전의 불법적 병력 동원이라는 것 등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와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군사력으로 다시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유신쿠데타에 의해 성립한 유신체제가 얼마나 불법적으로 국가권력을 사유화하며, 국민주권을 유린했는지를 드러낸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적 병력 동원의 지휘체계를 밝히지 못했으며, 당시 중앙정부의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동향에 대해서도 접근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14일 경남도청 브리핑룸에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과 관련해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14일 경남도청 브리핑룸에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과 관련해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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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정부는 불행한 현대사로부터 냉혹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라도 부마항쟁 진압과 수사과정의 인권 유린은 물론, 부마항쟁 전개과정과 그 전후의 복합적 배경, 결과 등을 포함하여 총체적 전모를 조사할 것"을 촉구했다.

또 이들은 "각 정당과 국회도 당리당략을 초월하여 부마항쟁 진상조사와 명예회복, 피해자 구제 등의 후속 조치에 뜻을 모으고, 정치 퇴행 방지와 민주헌정질서 공고화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부산시와 의회, 창원시를 포함한 경남도 자치단체의 집행부와 의회 또한 역사적인 부마민주항쟁의 현장에서 진실화해위의 권고 이행을 위해 적극 나설 것"을 제시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현 통합창원시) 지역을 중심으로 유신체제에 저항한 시위를 말한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의 '김영삼 의원 제명 변칙 처리' 등이 원인이 되어 부산대 학생들의 '유신 철폐' 구호와 함께 시위가 시작되어 시민계층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정부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참여자 1058명을 연행했으며, 마산지역에서는 18~19일 사이 시위참여자 505명을 연행했고, 20일 낮 12시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연행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부마민주항쟁 연행.조사과정에서 인권 침해가 있었다고 밝혔다. 사진은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
 진실화해위원회는 부마민주항쟁 연행.조사과정에서 인권 침해가 있었다고 밝혔다. 사진은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
ⓒ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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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국가 차원의 전면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진은 부마민주항쟁 당시 사복 경찰관이 시위 학생들의 해산을 요구하고 있는 모습.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국가 차원의 전면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진은 부마민주항쟁 당시 사복 경찰관이 시위 학생들의 해산을 요구하고 있는 모습.
ⓒ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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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마산민주항쟁#부마민주항쟁#위수령#민주화운동#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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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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