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라 역 대합실에도 자주 간다. 14일 00역 대합실에는 그동안 못 봤던 포스터가 기둥과 홍보물 코너에 걸려 있었다.
"안전한 'G20 정상회의' 국민 여러분과 함께 이끌어 가겠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경찰청이 만든 'G20 정상회의 성공 개최를 위한 테러 신고보상금 제도'를 알리는 포스터였다.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군대도 동원할 수 있도록 한 특별법까지 만들어가며 각별히 신경 쓰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문제의 포스터를 보는 순간 씁쓸한 생각이 더욱 커졌다.
포스터에는 '테러의심유형'이라고 해서 테러로 의심할 만한 사람들의 행위를 세 가지로 특정해 놓았다. 그런데 이게 참 아연실색, 기가 막힌다.
경찰청이 테러유형으로 특정한 세 가지는 ①쓰레기통이나 화장실 등에 가방을 방치하고 급히 떠나는 사람 ②공항, 백화점 부근에 차량을 방치하고 급히 떠나는 사람 ③계절에 맞지 않게 두껍고 긴 상의를 입거나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화장실에서 깜박 가방을 두고 나와서 급히 (기차나 버스를 타기 위해) 떠나면 테러범으로 의심하고 신고를 하라는 거다. 주인한테 가방을 두고 갔다고 알려주거나 주인을 찾아주어서는 결코 안 된다. 공항이나 백화점 부근에 차량을 두고 급히 물품을 배송하러 떠나는 택배기사도 테러범으로 의심할 만한 인물이다. 일단 신고해야 한다. 그가 들고 있는 택배를 가장한 포장물이 폭탄일 수도 있다.
입이 딱 벌어지는 건 세 번째다. 통사구조상 ③번 문장은 아래와 같은 두 개의 문장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계절에 맞지 않게 두껍고 긴 상의를 입은 사람 + 계절에 맞지 않게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
그러니까 여름에 '두껍고 긴 상의를 입'고 있으면 일단 테러범으로 의심하고 신고해야 한다. 개인적인 이유로 반팔 옷을 못 입거나 하는 건 신고하고 나서 조사 과정에서 밝혀지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계절에 맞지 않게 땀을 많이 흘리는 사람'은 또 누굴까. 아니 그보다 계절에 맞게 땀을 적당히 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계절에 맞게" 땀을 흘리려면 어느 계절에는 몇 CC의 땀을 흘려야 하는지도 기준량을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테러범으로 신고당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모두들 ①②③번을 암기하고 조심하시라. 가방은 반드시 손에 들거나 목에 걸고 다니고, 그게 힘들다면 맨 손으로 다니시라.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공항이나 백화점 부근에 차량을 두고 떠나서는 안 된다. 그 순간 당신은 테러범이다.
팔뚝에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흉터나 상처가 있어도 여름엔 긴팔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테러범으로 몰리지 않으려면 민소매옷이 더 좋겠다. 그런데 문제는 땀이다. 내 맘대로 용량이 조절 안 되는 땀. 조금만 걸어도 흥건히 머리부터 온몸을 적시는 땀. 밥 한 공기 먹는 데에도 땀을 찌개냄비 두 개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흘리는 당신은 더욱 위험하다.
어쩔 수 없다. 방법은 단 하나. 당장 병원으로 가서 땀샘을 막는 수술을 받는 수밖에. 땀샘을 다 막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 의사와 사전에 꼼꼼하게 상담하는 건 필수다. 2010년 여름, 땀샘수술이 대유행 할 것 같다.
G20 정상회의 성공 개최를 위해 저토록 개 발에 땀나듯 고생하는 분들을 위해 이 정도는 해 주는 게 국민 된 도리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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