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홀로 떠나는 여행은 그렇게 쉽지 않다. 직장인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시간은 그나마 주말인데, 서울 근교의 괜찮다 싶은 여행지는 이미 사람들로 바글바글 거리기 때문이다. 주말에 떠나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재앙'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얼마 전 나는 그 쉬운 이론을 깨닫지 못하고 주말에, 그것도 혼자 여행을 떠났다. 금요일 늦은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귓가에 들렸던 노래 때문이었다.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5월에 내 사랑이 숨쉬는 곳~"감미로운 현철 오빠의 목소리에 나는 부랴부랴 춘천 가는 기차표를 예매했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 김칫국 마시기 딱 좋은 나홀로 여행새벽 같이 눈을 떠 홀로 떠나는 나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책을 챙겨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미키마우스 모양을 한 작은 엠피스리 플레이어를 목에 걸고 청량리로 가는 지하철 안에 몸을 실었다. '텅 빈 기차 안'을 꿈꾸며.
1.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마실 뜨겁고 진한 아메리카노를 준비해야지! 2. 책 읽다가 지겨우면 차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그러다 지겨우면 또 책을 읽어야지! 3. 내 빈 옆자리에 <비포 선라이즈>의 에단 호크 같은 사람이 앉을지도 몰라. 적당한 우아함을 지키도록 노력해야지!등등의 생각으로 청량리역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김칫국을 마셔도 너무 마셨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 아무도 나를 배려해주지 않는다 해도토요일의 청량리역은 '시장 바닥'이었다. 학교 동아리 엠티로 추정되는 무리들이 몇 팀이나 서 있었고, 바리바리 싸온 배낭의 포스는 겁이 날 정도였다. 입석마저 매진되는 사태에, 미리 예매를 해놓지 않았다면 춘천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짐승 같은 사람들로 바글대는 청량리역 안의 광경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 일단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갔다.
'침착하자. 비록 나는 혼자지만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을 거야.' 마음을 굳게 먹고 좌식 변기에서 일어나 물 내리는 버튼을 눌렀다. 쏴~ 하고 시원하게 내려가는 물살 틈에 낯익은 물체가 보였으니, 그건 바로 내 목에 걸려 있던 미키마우스 엠피스리 플레이어였다. 핑크빛 미키는 웃으며 변기 속으로 사라졌다.
'과연 내 여행은 즐거울 수 있을까.'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다.
아무도 위로해줄 이 없어 나는 스스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남춘천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 안은 더 심란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서로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떤 계모임에서 가족과 함께 단합대회를 가는 모양이었다. 거의 객기 수준으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금방 깎은 과일이나 갓 구운 오징어가 내 머리 위로 건네지기도 했다. 나만 거기서 장님이자 벙어리였고, 귀머거리였다. 차라리 투명인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더라. 귀에 꽂을 엠피스리 플레이어만 있었어도 이렇게 외롭진 않았을 것이다.
망할 변기통으로 사라진 내 미키마우스의 부재는 춘천으로 향하는 길을 대재앙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 옆자리에 탈 것이라 기대했던 에단 호크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에단 호크 대신 내 옆자리엔 (엄연히 한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엄마가 함께 탔다. 것도 우는 아이와 운다고 때려서 더 크게 울게 만드는 아이의 엄마…. 그렇게 기차는 한 시간 반 동안 두 좌석에 세 명을 끼운 채로 달렸다.
# 그래도, 아직은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지대성리-청평-가평-강촌을 지나자 시끄러운 무리들이 차례로 사라졌다. 두 시간에 가까웠던 소음공해를 혼자 뻘쭘하게 잘 버텨낸 것에,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칭찬해 주었다. 그때, 차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마주보고 오는 기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정차하지 않는 역에 잠시 서도록 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기차가 천천히 들어와 선 곳은, '김유정 역'이라는 곳이었다. 세상에, 김유정역이라니! 나는 감동하기 전에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서 차장 아저씨께 달려가 여기서 내려달라고 떼를 썼다. 원래 그러면 안 되지만, 아가씨 혼자 온 것 같으니 좋은 여행 되라는 선물로 주겠다며 문을 열어 주셨다.
이제껏 내가 가본 역 중에 가장 작고 가장 예쁜 역이었다. 두 시간 동안의 소음 악몽은 마음에서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한참 동안 역을 빠져나오지 않고 놀고 있는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김유정역의 역장님이 천천히 내게로 오셨다. 아마도 기찻길에서 여자 혼자 놀고 있으니, 맘이 편치 않으셨던 모양이다.
다행히 내가 완전 신난 표정으로 혼자 사진 찍고 난리를 치고 있으니,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이 김유정 마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조그만 마을, 김유정 생가가 복원되고 나서 역 이름도 바뀌고, 마을도 길 하나하나에 '봄봄길', '동백꽃길' 같은 김유정의 소설 제목을 따서 이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무도 없는 그 길을 오래 걸었다. 다리 아프면 아무 곳에서나 주저앉아 책을 읽었고(기차 안에서의 못다 한 꿈을 이루듯!) 배고프면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한정식 전문점을 들어갔더니, 몇 명이냐고 물으신다.
"저, 혼자인데요." 그랬더니 내 눈에는 곳곳에 보이는데 빈자리가 식당 종업원 눈에는 갑자기 보이지 않는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자리가 없는데…. 괜찮으시면 저기 혼자 계신 분과 같이 좀 식사하면 안 될까요?"난 괜찮으니 상대방의 의향을 물어보라고 한 뒤, 조금 기다렸다. 혼자라고 4인용 식탁을 내주지 않는 야박한 인심에도 슬펐지만, 혼자 먹고 있던 그분이 날 거절하는 것이 더 굴욕적이기에 마음을 졸이기도 했었다. 다행히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 분은 나와 합석하기를 승낙했다. 역시 혼자 여행 온 한의사 언니와 통성명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식사를 했고, 차까지 마신 뒤 춘천 길 한복판에서 서로의 여행길을 축복하며 헤어졌다.
# 굴욕, 그까이꺼 눈 한번 딱 감아주면 되지혼자인 여행은 사실 불편함이 많다. 망할 연인들을 함께 앉히기 위해 차창 명당자리를 바꿔 줘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혼자 오셨어요?"라고 놀라며 묻는 사람들에게 귀찮지만 억지웃음을 보이며 변명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 식당 들어가기를 몇 번씩 고민해야 하기도 하고, 용기내서 들어갔는데 자리 없다고 쫓겨나야 하는 굴욕도 참아내야 한다.
하지만 순간의 굴욕으로 평생을 갈 이야기를 놓치는 건 좀 아깝긴 하다. 함께 여행하는 상대가 싫다고 하면 눈물을 머금고 그냥 지나쳐야 할 김유정 역이라든가, 그곳의 아름다운 풍경들,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 같은 것 말이다. 또 혼자 여행 온 여자를 위해 밥 한 끼 정도 쏴주는 사람이 우리나라엔 참 많다. 그리고 여행하지 않았다면 쓰지 못했을 이런 기사, 허락받지 못했을 소소한 자유 등 혼자이기 때문에 떨어지는 콩고물은 참 많다.
얼마 전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혼자 무작정 서울에서 가장 먼 곳을 가는 기차표를 끊고, 한창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그 비오는 풍경이 너무 좋아서 무작정 그 역에서 내려 빗속을 한참 걷기도 했지요."혼자이기에 가능한 일들, 한 시간도 못되어 금방 잊어버릴 사소한 굴욕쯤은 견딜 만하지 않을까.
글. 니콜키드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