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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은 '요술 상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많은 의문들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꽉 들어차서는 계속적으로 요술을 부리는 것 같은 형국이다. 아주 간단히 속을 뒤집어볼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고 '술수'라는 이름의 포장지들로 겹겹이 싸놓아서, 그것으로도 요술의 마력을 발휘한다.
요술 상자 안에 가득 담긴 마력 때문에 갖가지 기이한 현상들도 생겨나고, 기묘한 말들도 심심찮게 만들어진다.
어떤 천주교 신자는 정부와 합조단의 말을 믿지 못하는 신자들에 대해 "의부증이나 의처증 같다"면서 "그렇게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믿는 것이 신기하다"는 말을 했다.
어떤 언론은 북한에 대해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하라는 말을 했다. 딴에는 기발한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자신들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에 그 증거를 대라고 하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웃을 일이다.
한 보수 지식인은 내게 "북한 소행이 아니라 하더라도 북한 소행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며, 김정일을 궁지로 몰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말도 했다.
이렇게 천안함은 기상천외한 말들도 많이 만들어낸다. 너무도 어안이 벙벙해지게 만들고 할 말을 잃게 하니, 요술 상자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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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초순 고장 밖의 한 문학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건강 문제도 있고, 장거리 운전에다가 밤중에 돌아오는 문제도 있고 해서 아내도 동행을 해주었다. 한적한 야외 숲 그늘에서 가진 그 모임 자리는 정다움과 화기애애함이 주변 정취와 잘 어우러졌다.
그런데 그만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중앙일보에 실린 천안함 46명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한 여성시인의 시를 본인이 직접 낭송하고 났을 때였다. 참으로 애절한 내용의 시를 귀담아 들은 참석자 모두는 잠시 동안 숙연하고 침통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가슴이 아픈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천안함 관련 이야기가 나올 것은 당연지사였다. 60대 남성시인 한 분이 북한을 규탄하는 발언을 했다. 나는 여성시인의 애도시를 들을 때는 천안함 관련 화제로 이어지지를 않기를 바라며 되도록 함구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북한을 규탄하는 노인 시인의 입에서 어뢰공격이니 인간어뢰니 하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만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조중동이 너무 소설을 쓰는 것도 문젭니다. 조중동 보도를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이 말에 나보다 몇 년 연배이신(등단은 후배이신) 시인에게서 즉각 반박이 나왔다. 그는 거침없이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
"30년 동안 대공 분야에서 공직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는 북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내 정보 경험으로 볼 때 북한의 소행이 틀림없다. 또 나는 월남 전장에서 수류탄이며 포탄 터지는 것도 많이 봤다. 어뢰 폭발이 아니고는 천안함 절단과 침몰을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북한의 소행임이 너무도 분명하다. 우리는 북한 소행임을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 천안함 자체가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다."
나는 처음부터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정면충돌을 하기보다는 조금 우회를 하기로 했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이라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아느냐. 북한군은 악조건 속에서도, 또 한국 해군과 미국 해군이 합동훈련을 하고 있는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정확히 어뢰 한 방으로 1300톤 급 초계함을 절단 침몰시킨 신출귀몰하는 기술력과 전투력을 갖추었다는 얘기가 되고, 한국 해군은 물론이고 미국 해군도 허수아비라는 얘기가 된다. 어떻게 우리 해군이 그렇게 무능하고 무력한 군대일 수 있느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명박은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하고, 군 지휘부는 줄줄이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옷을 벗어야 한다. 그런 조처가 선행되어야 나 같은 사람도 북한 소행임을 믿을 수가 있다."
그러자 그 시인의 입에서는 '불가항력'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국 해군이 북한군의 어뢰 공격을 미리 감지하지 못하고 또 막아내지 못한 건 불가항력이라는 얘기였다. 그건 불가항력이므로 그 일로 군 지휘부를 처벌할 수는 없다는 논지였다.
나는 기가 막혔다. 그 불가항력이라는 말이 내게 불가항력 같이 느껴지는 기이한 느낌 속애서도 그의 말을 되받았다.
"어떻게 우리로서는 불가항력인 일을 북한군은 그렇게 쉽게 해낼 수 있나. 그렇다면 우리 해군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고, 무엇 때문에 존재하나."
이런 내 말에 그 시인은 화가 솟구친 것 같았다. 대뜸 내게 반말로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말도 하고, "북한 김정일보다도 우리나라의 종북 좌빨 새끼들이 더 문제"라는 말도 나오더니, "네가 뭘 안다고 까부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쪽에서 그렇게 나오면 내 기가 팍 죽어 끽 소리도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도 이미 성이 날대로 난 상태였다.
"누구한테 반말이야. 나도 환갑이 넘은 사람이야. 당신한테 반말 듣고 욕먹을 사람 아니야. 나도 베트남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온 사람이야. 당신은 대공 분야에서 어찌 살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말단 전투병으로 화약 냄새를 질리도록 맡고 온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당신만 애국자인 것 아냐!"
이쯤에서는 여러 사람이 두 사람을 뜯어말리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다. 여러 사람이 제지를 하는 상황에서도 그 시인은 "저런 새끼들 때문에 국론 분열이 되고 나라 꼴이 엉망이야. 저런 새끼들은 모두 북한으로 보내야 돼!"라는 말을 했고, 내 입에서는 "웃기지 마. 너 같은 새끼들이 우리나라를 망치는 거야. 한번 붙어볼까? 말싸움이 힘들 것 같으면 한번 주먹으로 해볼까!"라는 말이 나왔다.
정말 육박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이미 자리는 난리판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나서서 그 시인과 나를 멀찍이 떼어놓았다. 문인들의 진지하고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풍비박산이 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 쪽에서 먼저 화를 가라앉혔다. 등단 선/후배 여부를 떠나서, 나보다 몇 살이나 연상인 그분께 내가 먼저 사과를 하는 것이 도리였다. 잠시 후 나는 여러 문인들께 미안함을 표하고 그 시인께 가서 손을 내밀었다.
그 후 다시 정돈된 분위기 속에서 모임을 마무리하고 그곳을 떠나오면서 우리 부부는 여러 문인들께 감사했다. 젊은 축은 물론이고 나이 드신 문인들 가운데도 여러분이 내게로 와서 위로와 호의를 표해 주셨다. 내 말 쪽에 더 신빙성이 간다고 하신 분도 있었고, "옛날의 기백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 분도 있었다. 또 어느 노인 시인은 내게 천안함의 진실을 알고 싶다며 '정보 제공'을 부탁하기도 했다.
<3>
그 일은 어느새 두 달 전 일이 되었다. 그 동안 나는 그 일을 거의 잊고 지냈는데, 요사이 새롭게 인터넷으로도 접하고 직접 듣기도 하는 갖가지 기상천외한 말들 때문에 그때 그 일을 다시금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의 초두에 소개한 어떤 천주교 신자는 하느님과 KAL기사건, 천안함사건 등의 '증거'를 병렬(竝列)에 놓았다. 북한 소행 증거들을 의심하고 믿지 않는 신자들이 하느님을 믿으니, 그것이 신기하다는 것이다.
그 신기하고도 오묘한 말 중에는 "신자들 대부분 주님의 존재를 무조건 믿는다"라는 말도 있었다. 가만히 나를 돌아보았다. 젖먹이 시절에 세례를 받고 '성가정'에서 성장을 했지만 나는 하느님을 무조건 믿지는 않았다. 수많은 의문의 숲 속에서 갈등을 겪어야 했고, 반항의 강도 건너야 했다.
궁극의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금도 나는 하느님을 무조건 믿지는 않는다. '무조건 믿는 것'과 '전적으로 믿는 것'은 다르다. 나는 하느님을 온 마음을 다해 지성으로 믿고 섬기지만,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알려주신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인류에게 하느님을 제대로 알려주고 하느님 믿는 길을 바르게 알려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 바르게 믿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탐구 노력'이 따르게 마련이다.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우상, 또는 사이비 교주에게나 해당되는 맹목이다. 맹목은 정상적인 것도 아니고, 이성과 인격이 결여된 상태다.
그런데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사이비 교주에게서나 나올 법한 말이 천안함과 관련하여 한 시인의 입에서 나왔다. 나와 싸움을 하신 그 시인뿐만 아니라 당대의 유명 시인 정호승에게서도 비슷한 성격의 말이 나왔다.
북한의 어뢰 공격, 즉 합조단의 발표를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말을 달리 치환시키면 천안함은 어느덧 우상이 되고 사이비 종교 차원이 된 셈이다. 걸핏하면 '종북 좌빨'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이 거기에는 결부되어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천안함 이데올로기를 무조건 믿을 수도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 절대자인 하느님도 무조건 믿는 게 아니라 분별력을 지니고 전적으로 믿을 뿐인 사람들은 천안함 이데올로기를 무조건 믿지 않고 또 전적으로 믿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너무도 많고 또 자명하기 때문이다.
'요술 상자'의 성격을 지닌 천안함의 그 요술도 오래 가지는 못할 것 같다. 유엔 안보리까지 가는 등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지만, 속이 빤한 요술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요술 상자의 입구가 원래 하나 뿐이라서, 없는 '출구'를 찾느라 고심들을 하는 것 같은데, 그 고심의 귀추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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