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릴 적 읽었던 <황금알을 낳는 닭>이란 동화가 자꾸 떠오른다. 이명박 정부에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는 소위 '4대강 살리기 사업' 때문이다. 기실 더 많은 황금을 한꺼번에 얻으려는 탐욕 때문에 자신을 망칠 뿐만 아니라, 멀쩡하게 살아있는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에서는 동화와 현실이 별반 다를 바 없다. 동화를 읽었더라도, 탐욕에 눈이 먼 사람은 파국에 이르고 나서야 비로소 상황을 깨닫는 법이다.
가령 <시사IN> 147호에 실린 <'죽음의 먼지' 석면까지 투입된 4대강 사업>이라는 기사를 보라. '살리기 사업'이라는 명목에도 불과하고 오히려 죽음의 그림자가 넓고 짙게 드리워진 형국이라 할 수 있다. <경향신문> 7월 14일자 기사 <'맹꽁이' 죽음 내모는 4대강 공사>의 내용 역시 마찬가지다.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대체 서식지에서 말라 죽은 단양쑥부쟁이처럼 맹꽁이도 모두 말려죽일 셈인가" 공사장 주변에서 처참하게 떼죽음 당한 물고기 사진도 언론을 통해 꽤 여러 번 보기도 했다. '4대강 살리기'로 인해 죽음이 도처에 넘쳐나는 실정이다.
'4대강 살리기'에 '죽어가는' 많은 생명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께선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시는 듯하다. 로봇 물고기의 길이가 일 미터가 넘으면 다른 물고기들이 놀란다고 걱정하셨다는데 글쎄, 죽은 물고기가 커다란 로봇 물고기의 등장에 놀랄 일은 없겠으니 우선 물고기를 살릴 방안부터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닐까.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물고기를 죽음으로 내모는 정책부터 수정 혹은 폐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 로봇 물고기의 길이에 대한 논의는 그러한 전제 위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살리기'라는 표현도 그렇다. 뭔가를 살리겠노라면 우선 그 대상이 죽어간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은 생략되어 버리지 않았나. 이와 관련해서 내가 본 자료는 왜곡으로 짜깁기되어 있었다. 예컨대 <이제는 낙동강을 살려야 합니다>라는 홍보영상에 등장하는 경천대 경관을 보라. 경천대는 낙동강 7백리 가운데 제1비경이라 일러질 정도로 수려함을 자랑한다. 그 경천대의 푸른 강과 초록 산림을 검은 색채로 어둡게 덧칠해 놓고 '낙동강이 죽어가고 있다'라고 주장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그렇게 실상을 왜곡하면서까지 무리하게 '살리기 사업'을 추진해서 남는 것이 파괴와 죽음 아닌가.
지난 18일 낙동강 순례를 하면서 문경 지역의 낙동강 35공구에 들렀다. '청강부대'가 공사에 투입된 장소다. '청강'은 아마 '淸江', 즉 강을 맑게 한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공사장 근처 건물에는 "민족의 젖줄을 살린다"라는 구호도 크게 적혀 있었다. 군부대를 투입해서 진행하는 공사가 어떻게 일자리 창출에 효과적인지 의심이 가지만, 이것은 생명의 소중함에 비한다면 부차적인 문제이다. 공사장에 투입된 군인들은 과연 자신들의 작업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자신들이 민족의 젖줄을 살리고 있다고 믿는 측에서는 자긍심을 가질 테고, 그 반대인 경우에는 부끄러운 노역으로 여길 터이다.
진실 덮는 '죽음의 언어규칙'... 그릇된 사명감 만든다
자긍심과 부끄러움. 그 사이에서 나는 '4대강 살리기 사업'과 관련해서 작용하는 언어규칙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이명박 정부에서 벌어지는 여러 정책에 적용해도 무방하다). 왜 저들은 굳이 '살리기'라고 표현해 놓은 것일까. 기실 언어의 오남용으로 잘못된 정책을 호도했던 선례가 있으니 이를 참조하는 것이 좋겠다.
과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안락사 제공"이라는 표현을 썼다. 단지 표현만 바꾸었을 뿐인데도 효과는 대단했다.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살상이 그들의 오랜 상식과 동일하지 않다는 인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이러한 책략이 만들어낸 인식의 전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해 놓았다.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 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는 얼마나 막중한가, 라고 살인자들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4대강 살리기 사업'도 마찬가지 관점에서 얘기할 수 있다. 정부가 만들어내는 언어규칙에 갇히면 착시 현상에 빠져들게 된다. 인식의 전도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내 경우 여주의 공사현장과 상주의 공사현장을 둘러보았는데, 처참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공중파에서 이 살풍경한 광경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싶다.
그렇지만 '4대강 살리기 사업'이라는 언어규칙에 갇힌 사람이라면, 4대강을 파괴와 죽음으로 이끌면서도 기꺼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으리라. 어쩌면 상황이 참혹하면 참혹한 만큼 그 자긍심이 더욱 커질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는 얼마나 막중한가" 그렇게 막중한 임무를 아무나 감당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명감 안에서 4대강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도 함께 죽어간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영문명은 'Four Major Rivers Restoration'이다. 김정욱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강연을 들으니 여기에는 심각한 왜곡이 개입해 있단다. 인공적으로 변질된 하천을 자연의 상태로 복원하려는 노력이 'Rivers Restoration'인데,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자연 상태의 하천을 인공 상태로 뒤바꾸려는 시도이므로 정반대의 명명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명박 정부에서 만들어내는 죽음의 언어규칙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연 이러한 무모한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까. 해답은 우리들 각자에게 달려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