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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일어난 사건들은 한결같이 이가 어긋난다는 느낌이 강했다. 사온서에 몸 담은 박봉사의 외동딸 금옥이의 혼삿길에 일어난 신랑 살해사건은 왈자들의 행동으로 밝혀졌으나 선대왕의 총애를 받은 후궁의 핏줄인 이철형의 죽음엔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의 죽음으로 모든 의혹의 눈초리가 보내질 게 뻔한데 왜 이주부는 왕실의 비방을 원했던 것일까. 답답한 마음은 관청에 있지 못하고 정약용을 육조거릴 걷게 만들었다.

태조 이성계의 마음이 개성에서 달려 내려온 한양. 조선시대 한양의 공식명칭은 한성부였다. 서울의 지리적 명칭은 도성 내부인 종로구와 중구 일부를 포함해 도성밖 4km인 성저십리가 해당됐다.

그렇다보니 지금의 도봉구와 노원구 중랑구 광진구 등은 경기도 양주군이고 은평구 서대문구는 고양군,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는 양천현, 구로구 금천구 관악구 동작구는 시흥군,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는 광주군이었다.

한양의 구조를 살펴보면 고종때 만들어진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으론 창경궁과 창덕궁이 있고 서에는 경희궁이 있다. 물론 임진왜란 이후엔 덕수궁이 새롭게 궁궐에 포함됐으며, 의정부와 육조 홍문관·사헌부·사간원 등의 관청은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자리 잡았다.

한성부 역시 육조거리에 있었고 경기도청이랄 수 있는 경기감영은 지금의 독립문과 무악재 근처에 있었다. 정약용이 육조거릴 걷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사헌부 6품직에 근무하는 감찰 장인서였다. 따라 걸으며 그가 말했다.

"나으리께 드릴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관아에서 해도 될 터인데."

"듣는 귀가 많습니다."
"따르게."

정약용이 앞서 나가자 이번엔 장인서가 꺾었다.

"저는 급히 가 볼 때가 있습니다. 나으릴 찾아뵌 것은 새벽어림에 전하의 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관아엔 여러 대관들의 눈과 귀가 열려 있으니 이런 방법 밖에 쓸 수 없습니다."

정약용의 도포 소매에 봉함 서찰을 찔러주고 그는 북한산 쪽으로 사라졌다. 조용한 유곽을 찾아 한 잔 술을 청하고 펼쳐든 서찰의 내용이 미묘했다.

'정수찬은 명을 받들라. 보름이 턱 앞으로 다가왔으니 나의 생각이 맞다면 내일은 문인방의 도주 송덕상이 모습을 감춘 지 10여년이 넘은 세월이다. 송덕상은 점을 치고 <정감록>을 내세워 민심을 어지럽히길 즐겨하였으나 그가 소격서의 무리는 아니다. 다만 그들을 이끄는 향도자였으니 반역죄로 나라 안에 수배령을 내린 지 오래지만 지금껏 소득이 없지 않은가. 그곳 사헌부는 청환직으로 문과 급제자 중 청렴강직하여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바를 굽히지 않는 자들이 있는 곳이다. 예전에 과인을 살해하고자 술책을 꾸민 문인방의 흔적을 조사하다 목숨을 잃은 장한기의 죽음을 은밀히 조사해 오고 있는 장인서는 과인이 우연히 장한기의 집에 미행 나갔다가 그의 무예와 학문이 뛰어남을 보고 별시문과에 입격시킨 장한기의 큰아들이다. 그가 굳이 사헌부 근무를 원하였기에 과인이 그리 처리한 것이지만 그의 총명함과 빼어난 예지력이 정수찬에게 도움 줄 것으로 믿는다. 사암은 사헌부에 비장된 10여년 전에 있었던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길 바라노라.'

서찰의 말미엔 눈에 익은 화압이 그려져 있었다. 상감이 은밀히 명을 전할 때 쓰는 요즘 날의 사인이다.

정약용은 관아로 돌아와 10여년 전 사건 기록의 두루마릴 펼쳤다. 보통의 기록은 다섯 해 정도 남기지만 역모에 관한 것은 왕조의 역사가 어어지는 한 계속 남는다.

정약용이 궁금해 하는 건 감찰의 신분으로 조사에 나섰던 장한기의 주검 기록이었다. 검안은 초검관으로 나선 사헌부 장령의 기록이었다.

'사헌부 감찰 장한기가 삼각산에 올라간 것도 해괴한 일이지만 그의 주검이 발견된 게 부아악 인근이라 말이 많았다. 한양 부근의 가장 높은 산으로 수도 서울의 진산이자 종산으로 일명 삼각산이라 불리운 곳이다. 삼각산은 일명 부아악, 화산, 귀봉, 중악이다. 최고봉인 백운대를 비롯해 인수봉, 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양주 땅에서 바라보면 세 뿔처럼 솟아있으므로 삼각산이라 했으며 부아악이란 인수봉의 모습이 아이를 안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근자에 장감찰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그는 성상이 보위에 오른 초기 단계에 <정감록>을 연구한다는 이조참판 송덕상의 행처를 수소문하던 중 부아악에 오른다고 했었으나 일체의 보고 기록이나 감찰기록이 없어 이 사건은 그동안 덮어 둔 상태다.'

그가 삼각산에 왜 올랐는지를 설명하는 것보다 그가 사헌부 감찰로 의혹을 가졌다는 점만을 밝히는 것이라 할 수 있었고 검안서의 뒤쪽에 그의 주검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장한기는 부아악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앞가슴에 칼을 맞고 쓰러졌었다. 검은 단검이 아니라 장검이었으며 그가 엎드러진 가슴 아랜 무언가를 발로 지운 흔적이 있었다.'

이것으로 보면 장한기는 안도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장검 공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의 주검과 주위 상황을 조사한 사헌부 장령 오경환은 그가 사복을 입은 채 수사했으므로 인근 부랑배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가까운 곳의 왈자들을 잡아들일 때만 해도 금방 범인이 잡힐 것 같았지만 1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 범인의 행색은 오리무중이었다.

상감의 꿈길을 어지럽힌 벽파 무리를 평소 송덕상이 가까이 했던 건 여러 모로 드러나 보이지만 지금까지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는 데다 그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문인방 패거리들을 움직이는 실체가 무언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상감의 입장에선 궁안을 번란시킨 반역도의 무리란 점은 10여년 동안 찜찜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답답한 마음은 장인서를 삼각산으로 이끌었는데 뜻밖에 그의 주검이 발견된 것이다.

사헌부의 말단관리지만 그래도 직급은 감찰이다. 사헌부 관원이니 정보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인수봉 아래 약간 후미진 곳에서 주검이 발견돼 현장 상황을 살피는 데 어려움이 따랐지만 관원들이 주변에 금줄을 치고 외부인 출입을 통제한 후 검안에 들어가자 몇 가지 의문점이 일어났다. 정약용은 그 점을 지적했다.

"장감찰이 사헌부에 몸담은 채 10여년 전에 일어난 문인방의 반역사건을 조사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네. 내가 사헌부에 몸 담게 됐을 때 우연히 그 사람에게 들은 말이 있네. 이곳 삼각산엔 귀한 약수터가 많아 사람들의 발걸음이 적지 않은 곳이라 한 것은 산을 헤매는 자에겐 대수로운 일이 아니겠으나 그들이 굳이 삼각산을 택한 건 다른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조사 중에 있다는 것이었네."

따지고 보면 산과 지세를 살피던 맹천보가 풍수사 일을 접고 배다리 일에 끼어든 것은 그 시작이 삼각산의 약수터였다. 온종일 산을 헤집고 돌아다니다 약숫물 한 잔에 피곤기를 씻어내며 한 소릴 뇌까린 게 그 이유였다.

"북한산은 다른 이름으로 삼각산이라 합니다만, 부아악이라 한 것은 인수봉 모습이 아이를 업은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산을 중악이라 한 것은 조선 초기의 학자 양성지가 이 산을 중악으로 삼자고 진언했기 때문입니다."

금강산을 동악, 구월산을 서악, 지리산을 남악, 장백산을 북악, 그리고 북한산을 중악으로 삼자고 진언한 것은 알려진 사실이나 정약용의 관심을 끈 것은 화산이었다.

화산은 도읍지의 진산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인수봉 아래 약수터에서 만난 맹천보는 일행들에게 흥미로운 얘길 들려줬었다.

"삼각산은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역사적으론 고려의 기운이 일어나는 걸 삼각의 기운으로 엿볼 수 있지만 이 산이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이므로 부아악이라 부른다는 점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에 걸맞게 인수봉 아랜 약수터가 있습니다. 풍수적으로도 좋은 곳입니다만 저 아래 약수터는 정신을 맑게 하는 신령스런 물을 만들어낸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일행들은 흘려들었으나 맹천보의 뒷얘기가 여간 흥미를 끌었다.

"한양 땅에 물을 볼 수 없는 곳이 있겠습니까만, 이곳에 있는 약수는 다르지요. 사람들 발걸음이 잠잠한 깊은 밤엔 바글바글 끓어오르며 자정에 감로를 만들어 내지요."

일행들은 처음 듣는 얘기라 시선을 집중시켰다. 산 중에 흐르는 약수. 그것도 자정을 기해  솟아나는 약수는 감로가 함유된 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정수를 복용하면 위장병을 비롯해 폐병이나 요통 · 관절염 등을 치료할 수 있으며 영력을 강화시키는 보양 · 보음 작용을 기대할 수 있다.

우주의 생명은 물과 불이다. 물의 정과 불의 신이 만나면 영을 이루므로 천지에 있는 모든 샘은 자정이 되면 감로의 기운이 일시적으로 솟구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산과 물에 대해 탁월한 식견이 있음을 느낀 탓에 송덕상과 가까이 지냈지만 알려진 바가 없었다. 정약용은 이 지역을 조사하던 장감찰이 살해된 시점을 좀 더 당겨 탐색했지만 확실히 드러난 건 없었다. 뇌리를 스치던 강한 의혹이 일어난 건 사헌부로 돌아오던 걸음이었다.

"가만···, 10여년 전의 기록을 보아하니 송덕상은 이미 세상을 떠나 인수봉 아래 묻혔다고 했다. 그렇게 하여 관원들이 이 지역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송덕상의 묘를 쓴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한데 말이다, 서과야."
"예에."

"그 이후 송덕상의 처가 반역 사건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다. 나라에 죄를 얻었으니 당연히 봉분을 올리지 못했을 터이나 죽은 자의 몸은 어딘가에 묻혔을 것 아닌가."

"소인이 사헌부 기록을 뒤졌더니 송덕상의 경처(京妻)가 참수 당한 날은 비가 거칠게 쏟아져 사헌부 형리가 목을 쳤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당시 형을 집행하는 관리는 오경환 장령이었습니다. 죽은 장감찰에게 그 일을 물었더니 아예 입을 다물라고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예에. 장감찰이 그 일을 물었던 모양입니다. 오경환 장령은  무슨 일인지 연유도 묻지 않고 화부터 내더랍니다. 역도들이 참수 당한 걸 알면 됐지 나라의 관원이 어디 묻힌 것까지 알아야 될 이유가 뭣이냐 따지더랍니다. 일이 그렇게 돼 더 이상 묻질 못한 것 같습니다. 지금 오경환 장령은 액정서로 자리를 옮겼으니 물어 볼 기회는 영 없어진 듯 보입니다."

사헌부로 돌아온 정약용은 당시의 사건 기록에 대한 연계점을 찾아나섰다. 그 당시 형리들이야 사헌부에 몸담고 있으나 장감찰이 자세히 알아봤겠지만 이건 효수된 죄인의 행방에 관한 것이다. 궁 안이라면 시구문을 통해 나갔을 것이지만 형옥은 공동묘지를 정해 묻어버리는 게 대부분이다.

"송덕상의 묻힌 곳을 모르는 상황에서 나라에 죄를 얻어 죽은 자를 10년이나 지난 지금 기억하고 있는 자도 드물 것이다만, 문제는 송덕상이 산행할 때 곁에 있었던 게 맹천보란 점이다. 맹천보는 배다리 일을 할 때 준천사의 사령으로 일했으니 이것은 어떤 일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이다."

"나으리, 보답이라면요?"

[주]
∎도시혈(盜屍穴) ; 시체가 사라지는 혈


#추리, 명탐정,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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