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를 잘게 썰다
아내는 늘 나에게 교육을 한다.
"이제 세상도, 시대도 바뀌었으니까 며느리나 딸에게 밥 얻어먹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고, 당신 밥은 스스로 챙겨먹는 자립생활을 하세요."
아내는 말로만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자주 실습을 시키기도 한다. 당신 나들이 할 때가 내 실습기간인데, 그래도 아내는 미리 반찬은 다 준비해 두고, 밥도 해두거나 전기밥솥에 스위치만 켜면 되도록 해 놓는다.
며칠 전 혼자 점심을 차려먹으려는데 갑자기 김치볶음밥을 해 먹고 싶었다. 그래서 김치를 꺼내 도마 위에 놓고는 예삿때보다 칼로 아주 잘게 썰었다. 그것은 이즈음 내 잇몸과 이빨에 통증이 생긴 탓이다. 도마에 김치를 잘게 써는데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떠올라 울컥 눈시울이 뜨거웠다.
부산에 사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서울 내 집에 오시면 매끼마다 아내에게 일렀다.
"어멈아, 김치를 잘게 쫑쫑 썰어다오."
아내는 시아버지 분부대로 김치를 잘게 썰어 다른 그릇에 담아드렸다. 그러면 아버지는 다시 대접을 달라 하시고서는 거기다가 잘게 썬 김치와 밥, 김 등을 넣은 다음 맛있게 비벼 드셨다. 헤아려보니 그때 아버지 나이가 꼭 지금 내 나이다. 어쩌면 사람은 미워하면서도 닮아간다는 말이 왜 이렇게도 적확한지 모르겠다.
나는 평소 익힌 솜씨로 프라이팬에다 참기름을 넣고는 잘게 쓴 김치와 밥을 넣고 거기다가 김, 그리고 날계란까지 깨트려 넣어 비빈 뒤 대접에 옮겨 맛있게 들었다. 밥을 먹은 뒤 소금물로 양치질을 했지만 잇몸 통증이 멎지 않아 아무래도 치과에 가봐야겠다고 서울 목동에 있는 단골 치과의원에 전화를 걸자 간호사가 반겨 받으며 다음날로 예약을 주었다.
사실 나는 건강관리에는 낙제생이다. 그런데도 큰 병 없이 오늘까지 지내온 것은 오로지 부모님에게 감사할 일이다.
이빨이 부서지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서울을 떠나 강원도로 내려온 이듬해 여름, 우리 가족이 삼척 갈남마을로 피서를 갔다. 주인은 귀한 손님이라고 손수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 전복, 홍합, 소라 등 해산물을 한 바구니 잡아와서 곧장 밥상에 올렸다. 나는 그 가운데 큼직한 홍합을 입에 넣고 씹는데 우직 소리가 났다. 씹은 것을 뱉어보니까 자그마한 돌과 이빨 부서진 조각이 나왔다.
그때부터 치통을 자주 앓게 되었는데 어느 하루는 통증이 몹시 심해 그 무렵 내가 살던 안흥에서 가까운 횡성 읍의 한 치과에 갔다. 치과의사는 내 이를 살피더니 곧 몽땅 뽑고는 틀니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벌써 틀니를 할 나이인가?'
'내 이빨이 그렇게 삭아버렸나!'
나는 의사에게 집에 가서 생각한 뒤 결정하겠다고 하고서는 응급처치만 받고 돌아왔다. 나는 거울을 통해 내 이빨을 보면서 깊은 충격과 고뇌에 빠졌다. 우선 당장의 고통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사 말대로 뽑고도 싶었지만 아프지도 않는 생니까지 몽땅 뽑는 일에는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번호부에서 나의 오랜 단골 치과를 찾아 전화로 예약을 하고는 서울로 달려갔다.
나는 젊은 날부터 관리 소홀로 이빨이 좋지 못했다. 1970년대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ㅅ치과김 원장은 늘 삭은 이를 뽑아 새로 의치를 해 넣기보다는 되도록 본래의 이를 치료하여 살리는데 주력하는 분으로, 늘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김 원장은 오랜만에 내 이빨을 보고는 "쓸 수 있는 한 치료해 써 보자"고 잇몸치료와 이빨치료를 정성껏 해 주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치과 진료만큼은 강원도에서 먼 거리임에도 꼭 서울 목동까지 가서 진료를 받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빚진 날
김치볶음밥을 먹은 다음 날, 치과에 갈 때 이제는 치과의사가 나에게 틀니를 해야 한다고 해도 별 수 없다고 미리 마음속으로 작정했다. 그리고선 담담히 진료를 받는데 김 원장은 6년 전과 똑 같은 말을 했다. 그런 뒤 아주 알뜰하게 치료를 해 주고는 잇몸치료가 끝난 뒤 그 부분만 의치를 하자고 친절히 말해 주었다. 진료를 끝내고 처방전을 받으면서 진료비를 묻자 간호사가 원장님이 강원도에서 멀리 오셨는데 받지 말라고 했다며 끝내 받기를 거부했다.
다음 일정은 상암동 DMC 단지 내에 있는 눈빛출판사에 들르는 일이다. 약속시간이 촉박해 약국에 가는 일을 미루고 곧장 출판사로 갔다. 지난번에 나온 책의 인세 정산과 새로 나올 책에 대한 의견을 나눈 뒤 돌아오는데 굳이 출판사 대표가 1층 현관까지 배웅을 했다. 그때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다. 대표가 손전화로 직원에게 우산준비를 시키는데 마침 바로 앞에 한 약국이 보였다. 잠깐 기다리는 새 처방전 조제를 해야겠다고 들어가자 흰 가운을 입은 약사가 커다란 눈의 동공이 더욱 커지면서 소리쳤다.
"어머! 박도 선생님 아니세요?"
"너 미영이지?"
"어머, 여태 제 이름을 기억하시네요."
"그럼, 너 이대후문 봉원동 종점에 살았잖아. 꺽다리였고."
"제가 1985년에 졸업했으니 그새 25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기억해 주시고. 선생님 옛 모습이 하나도 안 변했어요. 목소리도 그대로고요."
"그럴 리가."
그는 처방전에서 내 이름을 새삼 확인하고는 정말 옛날 국어선생님을 만나 기분 좋은 날이라고 좋아했다.
"꼭 티브이프로를 본 것 같습니다."
약사 곁에서 보조하는 아가씨가 말했다. ㄱ 약국 이미영 약사는 잠깐 동안 동창들의 소식, 자기 남편과 아이 이야기까지 했다. 그때 출판사 직원이 우산을 가지고 왔기에 약봉지를 받으며 약값을 치르고자 돈을 꺼냈으나 한사코 받기를 거부했다. 나는 출판사 직원에게 최근에 펴낸 <영웅 안중근>을 이 약사에게 전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는 원주로 내려왔다.
아내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또 한 소리했다. "이제 빚지면 갚을 날이 없으니 빚지고 살지 맙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곧장 아내 입막음을 했다. 제자에게는 이미 책 한 권을 전해 주었으며, 목동 연세치과에는 당신이 부탁해 횡성농민회원이 유기농으로 농사지은 옥수수 한 상자를 보내주자고.
이튿날 이미영 약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지금 막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어요. 선생님 덕분에 안중근 의사를 뒤따라 일백년 전 러시아와 중국 여행 잘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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