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형 진짜… 성장이 더디다 더뎌, 진짜."
노홍철의 입에서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길'. 방송분량 뽑아내겠다며 새벽 4시부터 스태프들 불러내놓고 라면 하나 끓여먹은 뒤 텐트 치고 그대로 잠든 길을 보며 노홍철은 "왔으면 나가든 안 나가든 얘기를 해야지. 이런 다음에 깨놓고 '나 혼자 있으면 안 돼, 형들 없으면 안 돼' 이런 얘기나 하니까 예능이 발전이 없는 거예요"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난 2주에 걸쳐 방송된 <무한도전> 바캉스 특집은 쉼 없이 반복되어 온 장기 프로젝트들로 인해 피로가 누적되어 있는 멤버들을 쉬게 하려는 제작진의 목적으로 기획됐다. <무한도전>의 일곱 멤버들은 춘천으로 놀러가 말 그대로 즐겁게, 푹 쉬었고, 사이사이 깨알 같은 웃음을 주는 것으로 시청자들 역시 즐겁게 했다.
그러나 늘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다. <무한도전>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을 때도 있었다. 바로 길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나는 여러 번, 그가 시도한 개그에 묘한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소위 그가 던진 '무리수'에 불편함을 느낀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는지, <무한도전>의 시청자 게시판과 디시인사이드 <무한도전> 갤러리 등지에서는 길의 행태를 비판하는 글이 다수 눈에 띄었다.
재미 없는 방송분량 2분은 없는 게 낫다
바캉스 특집의 시작에서부터 길은 무리수를 던졌다. 아침 8시까지 여의도공원 앞에서 모이기로 한 후 그는 새벽 4시에 스태프들과 함께 약속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없는 일인 걸 알았는지 그는 "재미없는 건 아는데, 방송분량에 2분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라며 스태프들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문제는 새벽 4시에 스태프들을 불러낸 것 자체가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해놓고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라면 하나 끓여 먹고 텐트를 친 후 잠들었다. 이게 핵심이다. 노홍철의 지적대로 그는 '뭐라도' 했어야 했다. 스스로가 만든 상황에서 그는 '재미없다'는 걸 전제로 깐 뒤, 그대로 방기했다. 한마디로 무책임했다. 그럴 거였다면 애초에 시도 자체를 말았어야 했다. 재미없는 방송분량 2분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박명수와 유재석의 신발을 감춘 것도 문제의 소지가 다분했다. 최초 박명수의 신발을 기차 안에서 감춘 것은 정형돈이었다. 길은 정형돈에게 전달받은 박명수의 신발을 꽁꽁 숨겼고 결국 박명수는 기차에서 내린 뒤 과자상자와 비닐봉투로 발을 감싸고 다녀야 했다. 길은 여기서 한술 더 떠 식사 도중 유재석의 신발까지 감췄다. 아마 스스로는 이 상황이 재밌게 흘러간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그다지 재미도 없을 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한 행동이었다. 길가에 유리조각 같이 날카로운 것이라도 있었다면 얇은 과자상자와 비닐봉투로 감싼 발은 그대로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 한여름의 햇볕을 받아 뜨겁게 달궈진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이 발바닥에 여과 없이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시청자들은 이런 점들을 지적하며 신발을 감춘 것은 불필요한 행동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소극적인 길의 자세... 무한'도전'의 의미를 생각했으면
바캉스 특집과 함께 방송된 레슬링 특집에서도 길의 행동은 도마 위에 올랐다. 바캉스 특집에서의 그의 행동이 지나치게 적극적이어서 결과적으로 무리수를 남발하게 됐던 것과는 반대로, 레슬링 특집에서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멤버들은 물론 시청자들에게도 실망을 안겼다.
레슬링하는 록가수 '손스타'(채리필터)에게 맹훈련을 받는 <무한도전> 멤버들은 연일 새로운 기술을 배워나갔다. 지난주 방영분에서는 '수플렉스'라는 고난이도 기술을 배웠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멤버들은 손스타의 시연을 본 뒤 차례로 체험에 나섰다. 몸이 붕 떴다가 바닥에 그대로 떨어지는 수플렉스는 한눈에 보기에도 당하는 쪽의 고통이 대단할 것 같은 기술이었다.
그러나 "이건 못 하겠다"며 고개를 흔들던 멤버들은 어느새 유재석을 필두로 하나둘 기술 체험에 나섰고, 두려움에 떨던 박명수마저도 두 번의 시도 끝에 수플렉스를 온몸으로 겪었다. 문제는 역시 길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 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보다 못한 유재석이 나서서 체험을 종용하자 결심을 한 듯 나선 길. 그러나 그는 끝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수플렉스 체험에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손스타까지 부상의 위험이 빠트릴 뻔 했다. 레슬링의 기술은 그것을 시도하는 쪽만큼이나 당하는 쪽에서도 확실하게 받쳐줘야 한다. 그래야 양쪽 모두 부상 없이 제대로 기술을 시연할 수 있다. 그러나 길은 두려움 때문에 들어오는 기술을 제대로 받쳐주지 못했고, 손스타는 허리부상을 입을 뻔 했다. 그것도 두 차례나. 결국 손스타가 먼저 포기를 선언했다.
물론 두려울 수 있다. 시청자가 보기에도 아찔한 장면들이 차고 넘치는데, 가장 가까이에서 그것들을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두려움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그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무한도전>이 갖고 있는 '도전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지난해 간염을 앓고 난 뒤 부쩍 늙은 박명수와 겁 많기로는 최고인 정준하가 솔선수범하며 레슬링 기술 습득에 나선 것은, 그들이 하는 프로가 <무한도전>임을 알기 때문이리라.
아직 레슬링 특집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 얼마든지 만회할 방법이 있다. 어쩌면 길의 변화된 모습을 담아낸 장면이야말로 레슬링 특집이 시청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감동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분명한 건, 길의 눈치 없는 예능감이 프로그램 전체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비호감 캐릭터 벗으려면 강박증부터 벗어던져라
앞서 열거한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길의 가장 큰 문제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상황과 안 나서야 할 상황을 구분 못한다는 것이다. 예능 프로에서 그를 보면 예능 초보자로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종종 엿보인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는 상황을 아우르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판단력이 없다.
그러다 보니 뭐라도 하긴 해야 한다는 마음에 이것저것 잔뜩 던진다. 던지다 보면 뭐라도 걸리겠지,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것들은 대부분 무리수가 된다. 이번주 <놀러와>에서도 그랬다. 골방토크에서 그는 같은 패널인 김나영과의 등산기를 언급하며 김나영이 눈썹이 없다고 폭로했다.
늘 생글생글 웃으며 잘 받아치던 김나영도 그 대목에선 순간 움찔하며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노련한 유재석이 잘 받아넘겼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한순간 썰렁해진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놀러와>에서 그가 던진 무리수는 대부분 유재석이 잘 받아넘긴다. 그러나 시청자 입장에선 폭로와 짜깁기로 일관하는 그의 개그를 더 이상 받아줄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예능인으로서 길은 분명 장점을 여러 개 갖고 있다. 나서서 뭔가 해보려는 능동적인 태도는 적어도 적당히 묻어가려는 소극적인 것보다는 낫다. 동작이 큰 리액션도 그 중 하나다. 물론 때때로 그게 지나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리액션이 작은 것보다는 다소 큰 게 예능에서는 미덕이다.
그러나 그 장점을 압도적으로 묻어버릴 정도로, 현재의 그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감이 없다. 호감과 비호감의 경계. 그 아슬아슬한 선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는 언제까지고 비호감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강박증을 벗어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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