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지원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자두나무에서 새 둥지를 발견한 것은 자두 꽃이 필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산까치 둥지인 줄 몰랐다. 그러나 들락거리는 한 쌍의 새는 등이 검고 가슴이 하얀 까치가 아니었다. 까치보다는 작고 귀여웠다. 무슨 새인지는 몰라도 그저 길조이기를 바라며 새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결코 길조라고 할 수 없는 새였다. 자두가 익을 무렵 익어가는 자두를 쪼아버리는 것이었다. 하나를 골라 끝까지 먹었으면 좋으련만 서너 번 찍어 맛보고 또 다른 것을 고르는 바람에 그렇잖아도 적게 달린 자두를 많이 버린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새도 먹을 권리가 있다며 나누어 먹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인터넷을 뒤졌더니 산까치임을 알 수 있었다.
어치라는 다른 이름을 가진 산까치는 보기와 달리 다부진 새였다. 자기 영역에 들어오는 새는 비록 자신보다 덩치가 큰 새라도 큰소리로 "깍깍" 거리고 쫓아다니면서 기어이 쫓아버렸다. 또 둥지 가까이 다가서는 고양이를 따라다니며 높고 시끄러운 경계음을 내어 쫓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보통이 아니구나 싶었는데 어느 날인가 까치 한 마리가 다가오자 산까치 부부가 합작하여 몰아내는 것을 보면서 혼자 혀를 내두른 적 있다. 지금까지 못 보던 광경이었다. 참 영악하고 용맹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코 귀여운 존재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다시 얼마 후에 소나무밭 사이에 죽어있는 까치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산까치의 소행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원래 숙지원 하늘을 제 집 삼아 돌아다니던 까치가 보이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인터넷을 뒤져 산까치에 관한 자료를 찾았지만 개략적인 소개는 되었었지만 산까치가 자신보다 덩치가 큰 까치를 공격하여 죽였다는 글을 읽지 못했기에 내 직감이 틀렸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후 산까치의 소행으로 볼 때 까치의 죽음이 산까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산까치에 대한 인상을 확 바꾸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결정적으로 산까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7월 22일 이후의 일이다. 아내와 내가 자두나무 가까이 가면 경계음을 내어 거슬리기는 했으나 그렇거나 말거나 하는 태도로 무시해 버렸다. 그러다 아무래도 까치의 둥지에 무슨 변화가 있는 것 같아 둥지를 살폈는데 둥지는 높기만 했다.
그러다 7월 21일 둥지 안에 새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몇 마리인지, 어느 정도 자랐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하지만 둥지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내 디지털 카메라는 거의 1회용 소모품 수준이라 둥지를 잡는 것조차 버거웠다.
7월 22일. 그래서 22일 사다리를 받치고 산까치의 둥지 관찰을 시도했던 것이다. 사다리를 받치고 올라갔으나 둥지에는 닿을 수 없었다. 줌인도 제대로 안 되는 디지털 카메라로 놓고 둥지 주변을 살펴 아직 제법 자란 새끼들이 고개를 내두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다. 보이는 새끼는 적어도 세 마리였지만 정확한 마리 수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나로서는 순수한 관찰일망정 그 자신의 집을 관찰하는 나를 그냥 둘 산까치가 아니었다. 자신의 집 문전에 사다리를 놓고 어정거리는 내가 산까치에게는 새끼를 약탈하려는 침입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절대절명의 중대한 위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어미인지 아비인지 모를 한 마리의 산까치가 나에게 공격자세를 취하면서 높고 날카로운 경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갸륵한 부정인지 모정인지 확인할 수 없었으나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려는 산까치를 탓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자극하지 않으려고 사다리를 치우면서 해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었으나 그런 나의 진심이 통하지 않은 것인지 나를 향한 분노와 항의를 담은 산까치의 시끄러운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새끼를 둔 보모의 입장에서 당연한 반응이라고 이해했으나 산까치의 억척스러운 반응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기에 흥미로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관심이 없는 척 슬슬 다른 일을 하면서 자두나무 주변에서 멀어졌으나 내가 움직이는 곳을 향해 항의성 고함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더 흥미로웠던 점은 사다리에 근처에도 가지 않은 아내에게 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자두나무 부근에서 김매기를 하는 아내의 머리 위를 스치듯 날아가는 산까치 때문에 아내는 기겁했다. 아내가 야단을 쳐도 통하지 않았다.
아내가 자두나무와 떨어진 다른 곳에서 일을 했더니 조금 잠잠해졌지만 그래도 이따금 아내가 일하는 곳까지 찾아와 경고인지 항의인지 모를 고함을 늦추지 않았다. 여성임을 알아 본 것인지, 아니면 아내의 말대로 붉은 색이 들어 있는 상의 때문인지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23일 금요일, 전날 입었던 상의를 그대로 입은 아내가 둥지와 먼 곳에서 김을 매는데 산까치 한 마리가 그곳까지 쫓아와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내의 주변 나무를 떠나지 않는 것은 물론 가끔 쪼을 듯 머리위로 스쳐 날기도 하였는데 아내가 호통을 치며 쫓아도 나뭇가지의 위치만 바꿀 뿐이었다. 단순한 경계와 위협이 아닌 공격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지극한 모성(혹은 부성)의 발로라고 하지만 집요하고 치열함을 볼 수 있었기에 인상적이었을지라도, 결코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었다.
산까치도 남자와 여자를 분간한 것일까?
남자보다는 여자가 약한 존재라고 판단하는 것일까?
아내의 말대로 입고 있던 옷이 문제였을까?
결코 호감이 가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해주는 태도였다.
카메라가 좋지 못하여 전 과정을 담을 수 없는 점이 안타까웠다.
토요일 오후, 아내는 다른 복장 차림으로 숙지원에 갔으나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듯 아내를 보면서 깍깍거렸다. 입은 옷의 색깔로 상대를 구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둥지 가까이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날리는 경고라는 생각도 들었다.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온다는 말은 우리 조상들이 사람, 특히 낯선 사람에 대한 산까치의 경계 습성을 선의로 해석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일요일(25일) 오후, 숙지원에 갔더니 사과나무에 몇 개 달린 사과 중에서 몇 개가 크게 흠집이 나 있었다. 다른 먹을거리도 많은데 아직 익지도 않은 사과를 쪼아 먹은 것이다. 자두를 쪼아 먹던 수법과 똑 같았다. 다른 새들이 범접할 수 없는 공간에서 산까치의 짓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보복 차원에서 사과를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먹이와 자신의 먹이를 구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미물이라지만 해로운 곤충도 많은데 맛있는 과일을 먹은 산까치의 행위를 곱게 봐주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산까치에게 욕을 할 수 있나, 돌을 던질 수 있나!
오늘(28일) 오후, 혼자 숙지원에 갔더니 산까치의 경계음은 덜했다. 6일 전의 사건을 잊은 것일까? 아니면 나에 대한 적대감정이 누그러진 것일까? 그도 아니면 새끼들이 어느 정도 자라 조금은 안심한다는 것인가? 둥지를 올려다 봤더니 새끼 4 마리가 둥지 밖 나무 가지에 앉아 부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본의 아닐지라도 내 호기심이 산까치를 자극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동안 산까치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이제 나는,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온다." 고 했던 노래와,
"산까치가 울면 임이 온다."고 했던 정서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마 곧 산까치의 새끼들도 자립할 것이다. 그러면 산까치들은 오늘의 일을 잊고 말런지 모른다. 어쩌면 새끼들에게 숙지원 둥지를 넘겨주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산까치는 사람들을 반가운 친구로 여길 것인가?
개인의 경험만으로 산까치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은 유해조수의 하나라고 단정한다면 너무 감정적일까?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산까치가 사람들에게 길조라는 환상을 고집하고 싶지는 않다.
그나저나 새끼들이 독립하여 날아간 후에 자두나무의 산까치 둥지는 어떻게 처리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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