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내기는 벼농사의 일 년 중 첫 번째로 가장 큰 일이다. 그래서인지 모내기철에 김제 만경평야를 지난 백범은 다음과 같은 느낌을 적어 당시의 풍경을 알려준다.
"모를 심을 때에 선소리꾼이 북을 치고 농가를 인도하면 남녀농군들은 손발을 흔들고 춤을 추며 일을 한다. 논 주인은 탁주를 논두렁 여기저기에 동이째 놓아두고 마음대로 먹게 하고, 행인이 지나면 다투어 권한다. 농군이 음식을 먹을 때는 현직 감사나 수령이라도 말에서 내려 인삿말을 건넨다."광주에서 청년 백범은 역말이란 시골 동네에 들어간다. 몇 백 호나 되는지 모르는 이곳에 7명이나 되는 동장이 사무를 보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
청년 백범은 목포로 가던 길에 함평의 이진사 집에서 보름 남짓 머무른다. 이 진사는 대단한 부호인데 함께 지내던 객이 대여섯 명 되었고, 그중에는 이 집에서 손님 노릇한 지가 8, 9년 된 사람도 있었다. 손님이 일을 하면 주인이 가난해진다는 미신이 있어, 손가락 하나 쓰지 않고 주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해방 후 백범은 이 진사의 후손을 만났고, 아들 김신을 보내 이진사 집을 방문하게 하였다.
무안을 거쳐 목포에 도착한 청년 백범은 지게꾼으로 행세하며 같이 탈옥한 양봉구를 찾아갔다. 그에게 인천 소식을 물으니, 조덕근은 서울에서 잡혀가 감옥에서 눈이 하나 빠지고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였다. 탈옥 때 당직을 섰던 간수는 아편중독으로 감옥에서 죽었고, 백범에 관한 소문은 듣지 못했다 한다. 양봉구는 백범에게 인천과 목포간에는 순검들이 서로 내왕하여, 오래 머무를 곳이 못 된다며 약간의 여비를 주면서 목포를 떠나라고 했다.
김제를 출발하여 벽골제를 지나고 부량면에 이르니 길가에 '아리랑문학관'이 눈에 들어온다.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에서 이름을 딴 기념관이다. <아리랑>은 우리의 하와이 이민사를 통해 식민지 시대의 굴욕과 열등감에서 해방시키며 새로운 민족사를 창조한 작품이다. 김제는 <아리랑>의 문학과 역사의 고장으로 <아리랑>에 담긴 문학정신과 역사의식을 보다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아리랑문학관'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일본 대사를 암살하려던 백정기 의사이른 아침이라 관람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며 영원면에 들어서니 백정기 의사 순국기념관이 오른쪽에 나온다. 백정기 의사는 정읍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운동을 선도하였고, 각지를 잠행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일본 군사시설 파괴에 전력한 애국지사이다.
1925년 상하이로 가서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였고 농민운동에 투신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중국 상행에서 일본대사 아리요시를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모의하며 남긴 말이 비석에 적혀 있다.
"나의 구국 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 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 평화 위에 세계 일가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공생 공사의 맹우 여러분, 대륙 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주시오. 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백범기념관이 있는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 효창원에는 백정기 의사의 묘소가 있다. 백범 선생이 1946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 효창원에 안장하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유골도 찾으면 안장하려고 빈묘를 만들어 놓았다. 효창원에는 이동녕·차리석·조성환 선생과 함께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도 있어 우리 민족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아침을 먹기 위해 들렸던 식당에서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광주를 가려면 고개가 높은 내장산 쪽보다는 장성으로 가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그의 말대로 29번 국도를 따라 정읍에 도착하여 그 입구에서 1번 국도로 갈아타고 입암면으로 행하였다. 긴 오르막 갈재와 곰재를 넘어 장성댐에 이르렀다. 고개는 별로 힘들지 않아 아침에 우연히 들은 한 마디가 큰 도움이 되었다.
백범 선생도 탈옥 이튿날 인천감옥 근처를 헤매다가 모군꾼(공사판 따위에서 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 서울로 가는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때 그 사람은 백범을 이 골목 저 골목 후미진 길로만 데리고 가 언덕 위에서 길을 가르쳐 주었었다. 마치 내가 탈옥해 갈 길을 헤매는 백범 선생이 된 기분이었다.
장성을 지나 광주지부 회원의 도움을 받으며 현재 광주시 북구 우산동 383번지로 동강대학 근처인 광주 역말로 갔다. 그곳에는 '경양역터'라는 표지석이 길가에 놓여 있다.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담양·순창·곡성·화순 지역에 있었던 6개의 작은 역과 도로를 관장하던 경양역 터다. 1896년 역로 제도가 폐지되면서 경양역도 없어졌다."
정치자금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이어 동구 학동 광주천변에 있는 백화마을을 찾았다. '백화아파트'와 '백화마트'라는 말에서 옛날의 백화마을을 연상하게 한다.
도피여정과는 관계없으나 해방 후 다시 들른 광주에서 백범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만주로 징용을 끌려갔거나 생계를 위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즉 '전쟁의 재난을 당한 백성'인 전재민(戰災民)들이 매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본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후원금(또는 정치자금)을 모두 광주시장에게 건네주어 전재민을 위하여 마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백범의 요청과 금품을 받아든 당시 광주시장은 동구 학동 광주천변 공터에 전재민촌을 건설한다.
비자금을 통한 불법 정치자금이 난무하는 오늘날 백범 선생의 이러한 모습은 모든 정치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백범 선생은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 아니라,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란 말을 충분히 들을 만한 분이시다.
영세민촌이 백화마을이 1992년 백화아파트로 다시 준공되었다. 백화아파트 주변은 온통 공사현장이다. 백화아파트 주변 일부를 역사공원으로 만들기로 최종 결정하였다는 말을 들으니, 백범 선생의 정신이 이곳에서 꽃 피워 널리널리 퍼져 나가기를 기원한다.
우연한 사건으로 화를 모면하다너무도 우연히 자전거를 수리하게 되었다. 자전거를 차에 싣기 위하여 자전거 뒤에 달린 깃대를 빼려고 뒷바퀴의 조임새를 풀었다. 마침 그 때 나를 도와주려고 하던 분이 자전거를 드는 바람에 뒷바퀴가 빠졌다. 다시 달려하니 바퀴에 달린 뒷 기어의 조임새가 풀려 달 수가 없었다. 운행 중에도 첫 번째 기어를 사용할 수 없었는데 이 때문이었나 보다.
나를 위한 저녁 만찬이 베풀어졌지만 자전거 가게 문 닫을 시간이 다가와 초조해 음식이 입에 닿지 않는다. 사정을 말하여 조금 일찍 끝내고 전문 산악자전거 가게로 갔다. 문제가 기어뿐이 아니었다. 체인도 늘어나고 브레이크도 거의 마모되었다.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앞으로 1000㎞는 더 가야할 자전거의 문제점을 모두 정비할 수 있었으니 이것도 새옹지마라 할까. 뒷바퀴가 빠졌을 때 표현은 안 했지만 마음이 좀 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뒷바퀴가 빠지지 않았다면 정비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분명 순례 도중에 사고가 충분히 생겨 일정에 차질이 생길 뻔하였다.
다음 날 1번 국도를 타고 나주 시청에 도착하였다. 시청을 나오면서 이정표를 따라 함평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멀리 돌아가는 길이란 것을 안 것은 이미 많이 왔을 때이다. 잘못 13번 국도를 타는 바람에 함평을 가기 위해 두 배나 멀리 돌았다.
함평으로 가는 도중 '나주 우습제'라는 습지가 나왔다. 연꽃이 가득히 피어 있었다. 무안을 거쳐 목포 시청에 도착하니, '우리힘닷컴' 회원 여러 명이 마중을 나왔다. 오늘은 비록 폭염 예보가 있었으나 중간 중간 흐린 경우가 많아 크게 힘들지 않았다. 이제 전 일정의 반이 끝났다. 현재 728km를 주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