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이 된 교수, 전원일기를 쓰다>의 저자 강수돌은 전국적으로 꽤 유명한 농촌 이장이다. 이장들은 대부분 농부인데 강수돌씨처럼 대학교수를 겸업으로 하는 이는 흔치않다. 대학교수였던 그가 이장이 된 사연은 그래서 드라마틱하다.
어느 날 마을 앞에 초고층아파트가 건설된다는 사실을 강수돌씨가 동네에 알렸다. 아파트 건설 사실을 감추는 동시에 (아파트)건설 허가에 필요한 주민들의 동의서를 조작한 전직 이장의 비리가 드러났고, 그 이장은 자연히 물러났다.
개발반대 교수가 이장이 된 까닭
당연히 이장 재선거가 불가피했고 주민들은 마을을 아끼는 마음을 가진 '똑똑한' 그에게 이장을 맡기게 된다. 그것이 2005년의 일이다. 그는 올해 6월까지 임기를 성실히 마쳤다.(보통 2년인 임기를 고려하면 3번 연임한 것이다)
'시골에 사는 교수'라 하면 보통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게된다.(그래서 이런 제목의 출판이 가능한 것이다) 마을사람은 더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밝히면 동네에서 처음 보던 어른들도 "아, 위에 새로 집짓고 산다는 교수양반"한다는 것이다.
처음 강수돌 교수가 당시 마을 이장을 만났을 때 시골에서 자연과 더불어 농사지으면서 사는 것이 최고라 맞장구쳤다 한다. 그런 이장이 돈을 앞세운 개발의 광풍 앞에서 문서를 위조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였다 한다. 허나 우리 주변에 흔한 모습이다. 그를 손가락질하기 전에 나를 다시 돌아봐야 할지 모를 일이다.
개발은 한적하고 고요한 시골마을에 커다란 상흔만 남겨놓는다. 내가 시골로 향하던 2006년 이전에 인근 동네에 골프장을 건설하는 것이 이슈였다. 농사짓는 곳의 땅을 팔아서 골프장을 지으면 농지를 터전으로 살던 사람은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그들은 골프 치러오는 사람들의 왕래가 주변 서비스업의 활기를 가져올 것이고 지역에 지원하는 세금으로 생계에 지원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감언이설이 실현된 경우는 거의 없다. 골프장을 짓는 이가 지역주민을 생각해서 짓겠나. 자신의 이익에 방해가 되지 않으라고, 건설 이후에도 거치적거리지 말라고 인심 쓰듯 하는 지원이 있을 뿐이다.
도시의 재개발이나 골프장건설, 경마장 건설, 카지노 건설 모두 시작단계에서 찬성과 반대로 편을 갈라서 사이좋던 이웃을 원수로 만들어 놓고 건설이후엔 주민들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정해진 수법이다. 언제 그 시설들이 지역민에게 풍성한 일자리라도 주던가. 농사짓던 노인들이 할일이 또 무엇이 있을 것인가. 기껏 꽃 심고 풀 뽑고 하는 일들은 연속적이지 못하고 중간 브로커가 끼면 노동단가도 낮아서 농사짓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류'는 '사회'를 생각하는가
개발을 반대하는 논리엔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 작물을 재배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땅과 하늘이 하는 일이고 이에 사람이 어우러져서 사는 것뿐이다.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자신의 삶과 연관해서 풀이하는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깃들어 사는 것'이라 한다.
언뜻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허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연을 대하는 진심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위대한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이 별로 없다. 어깨동무하는 모습은 주고받는 친구와 가능한 일이다. 감히 자연에 손을 걸칠수야 없지 않은가.
그냥 받아먹기만 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대할 줄 모르는 태도다. 그래서 깃들어 산다는 말을 택했다고 한다. 밥상위에서 늘 외치는 "똥이 밥이 되고 밥이 똥이 되는" 자연의 순환과 지속가능함에 대한 철학을 몸으로 실천하고자 시골에 터전을 잡았다. 아이들 셋도 모두 그곳에서 키웠다.
교육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자연 안에서 내면과 인간성, 다양성을 자연에서 키워나가는 교육이다. 이것을 화학농교육과 유기농교육으로 비유한다. 유기농법이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처럼 자녀에 대한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이 충분한지를 핵심으로 삼는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자신의 내면적 욕구나 느낌에 솔직하게 반응하게 된다.
자신도 일류대학을 나와 교수를 하지만 이렇게 반문한다.
만약 자녀들이 '무조건' 일류 대학에 가기를 원한다면 이렇게 물어 보자. 과연 일류 대학 나온 사람들 중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안위를 넘어 온 사회가 행복해지도록 진지하게 노력하는 이들은 도대체 몇 퍼센트나 될까? 나아가 우리나라를 망가뜨리는 사람들 중 일류대 출신의 많은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은가? 대답이 뻔하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아이들이 무조건 일류대에 가기를 갈망하는가? 대답을 찾자면 두 가지다. 하나는 일류대 출신이 갖는 기득권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그걸 갈망하는 부모 자신이 가진 열등감 때문이다.
욕심을 버리고 내려놓아야 더 만족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직접 집짓기에 동참했다. 작은 귀틀집을 짓고 흙 속에서 산다. 이반 일리치를 인용한다.
"우리가 평생 동안 끊임없이 수집하는 가구나 기타 물품들이 우리에게 내면적 힘을 주지는 않는다. 이 물건들은 불구자의 목발 같은 것이다. 우리가 편의품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 물건들에 대한 우리의 의존도는 더욱 커진다."
그의 말은 더 많이 큰 것을 가지고자 하는 이들, 마음과 몸과 생활 방식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일갈한다.
결국 '소박한 자연품안의 삶'이다.
사람은 대개 자신의 삶을 마감할 때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한다. 첫째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따뜻하게 해 줄 걸 하는 후회, 둘째, 인생을 좀 여유롭게 살 걸 하는 후회, 셋째,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걸 하는 후회가 바로 그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만을 위해 아등바등 사는 사이에 평생이 다 흘러버린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뿐인 이 소중한 인생을. 경쟁과 시기, 질투등에서 비껴서 내면을 성찰하고 보다 큰 만족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삶의 기쁨과 관계의 즐거움을 일상적으로 느끼며 날마다 작은 행복을 만들며 살아가는 인생, 그런 삶과 그렇게 사는 삶들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겸손하고 건강하게 더불어 사는 공동체, 전국 방방곡곡, 세계 구석구석마다 창조하는 일이야말로 간디와 장지오노의 철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가 아닐까?
버려진 농업, 함께 생각하기
농촌의 삶은 국가가 버린 농업을 '새로보기' 한다.
한국의 식량 자급률은 25%내외다. 나머지 75%는 외국에서 수입해 해결한다. 대단히 위험한 구조다. 그나마 자급률 중 90% 이상은 쌀농사이고, 그것도 100% 수입에 의준하는 석유를 이용해야 가능한 수치다. 따라서 석유 빼고 쌀빼고 보면 진짜 자급률은 5%밖에 안 된다.
지금부터라도 농민을, 존중하는 정책을 써야 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스스로 먹고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정책자들이 되어야 한다. 핸드폰과 자동차를 팔아서 매분기 기록을 경신하는 대기업에 몰아주기위해 농업을 희생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책은 그의 자연과의 삶을 정리한 일기다. 현재 학교에서<녹색평론>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매주 마을 아이들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는 그가 과거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얻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시골 흙집에서 살게 된 것은 시대흐름에 대한 '저항'이다. 몸소 실천하고 행동하는 지성의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 모순된 경제시스템과 그릇된 가치관에 대한 지적, 올바른 삶에 대한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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