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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역사탐방
희망제작소 호프메이커스클럽 회원들과 함께 중국 실크로드 역사탐방을 다녀왔습니다. 특히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는 약 160만㎢의 면적으로 중국 전체의 1/6을 차지하는 광대한 지역입니다. 중국 최대의 분지, 최고의 고원, 대사막, 대초원, 대고비, 대삼림은 웅대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을 간직할 뿐만 아니라 서방의 황금과 중국의 비단을 바꾸고 불교와 이슬람문화를 전한 동서문물 교류의 접합점입니다. 신장의 실크로드는 사막과 낙타로만 여겨지던 과거 버려진 길이 아닌 천태만상의 자연환경과 다채로운 민속, 유전과 가스로 이어지는 막대한 지하자원을 가진 성장잠재력이 무궁한 곳입니다. 우루무치에서 카스까지의 7월 25일부터 8월 2일까지 7박 9일간의 여행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기자주>

 키질가하 봉화대. 높이 15m로 흙벽돌로 만들어졌다
키질가하 봉화대. 높이 15m로 흙벽돌로 만들어졌다 ⓒ 오문수

투르판에서 코를라까지는 460㎞나 된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7시간이 걸리니 마음 편안히 먹고 차에서 주무시라"는 가이드의 부탁이다. 먼 거리가 아니다? 중국에서 태어난 조선족 가이드로서는 그 거리가 먼 거리가 아니겠지만, 내 느낌은 서울에서 여수까지의 400㎞보다 더 멀다.

어차피 단순한 관광이 아닌 역사탐방 여행을 떠났기에 일행은 맘을 비우고 신발끈도 풀고 가기로 했다. 여행 경험이 많은 대부분은 느긋하게 지내는데 몇몇은 입술까지 쥐었다. 물은 즉 음식을 제대로 못 먹었다는 것이다. 호텔 음식은 훌륭하게 나왔다. 여행사 사장이 동행했으니 가이드들이 신경 쓸 수밖에. 다만 중국 특유의 기름진 음식은 어쩔 수 없다.

여행 경험도 많고 부부가 온 경우가 많아 매실 장아찌, 깻잎 장아찌, 김, 고추장, 심지어 김치까지 있어 나무랄 데 없는데 입이 까다로운 사람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안 되면 컵라면으로라도 때우는 게 상수다. 장거리 여행에서 지치지 않는 최고의 방법은 충분한 휴식과 음식이다. 음식이 잘 맞지 않을 땐 과일이 최고. 과일은 만국 공통의 음식이다. 충분한 영양가와 여행의 피로를 풀어준다.

 투르판에서 쿠를라로 가는 길에 만난 물긷는 아이들
투르판에서 쿠를라로 가는 길에 만난 물긷는 아이들 ⓒ 오문수


 쿠차대사로 가는 도중 길가에서 만난 주민. 차를 마시는 모습
쿠차대사로 가는 도중 길가에서 만난 주민. 차를 마시는 모습 ⓒ 오문수

코를라는 먹을 것도 볼 것도 풍부한 곳이다. 신장에 오면 투르판의 포도, 하미의 하미과, 코를라의 샹리를 꼭 맛 봐야 한다. 특히 배의 한 종류인 샹리는 과일의 왕자라고도 부르며  배꽃 향의 사과 맛이 난다. 한 입 베어 먹으면 향까지 은은하게 따라오는 기분이 든다.

사막만 바라보는 장거리 여행에 심심할까 봐 하나투어 윤영복 과장이 마이크를 잡고 우리나라의 여행적자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한국인과 중국인이 상대국으로 관광을 오가는 숫자를 보면 6대 4정도입니다. 양국을 오가는 비행 편수를 보면 일주일에 900편 정도가 되니 어마어마한 숫자죠. 대구시에서는 외국인들이 오면 숙박비를 보조해 줍니다. 하지만 오게만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먹고 자고 돈을 쓰게 해야 합니다.

중국인들이 서울에 오면 서울의 쇼핑관광과 경주는 괜찮다고 합니다. 특히 제주도는 만족하죠. 그 외에는 별로 볼 게 없다고 합니다. 우리도 관광 상품을 개발해서 돈을 쓰고 가게 해야 합니다. 중국 '장가계'는 입장료가 10만 원이나 하니 한곳에서 떨어지는 돈이 얼마입니까? 또 거기서 창출되는 고용효과와 부대수입은 엄청납니다."

 신장에서 가장 유명한 세 가지 과일 중 투르판 포도가 빠졌다. 왼쪽은 참외의 일종인 하미과. 접시에 담긴 과일이 샹리로 배꽃 향에 사과 맛이 난다
신장에서 가장 유명한 세 가지 과일 중 투르판 포도가 빠졌다. 왼쪽은 참외의 일종인 하미과. 접시에 담긴 과일이 샹리로 배꽃 향에 사과 맛이 난다 ⓒ 오문수
 사막에도 수영장이 있을까? 오아시스 도시에 있는 수영장. 물이 아까운 듯 다음날에도 물을 갈지 않았다
사막에도 수영장이 있을까? 오아시스 도시에 있는 수영장. 물이 아까운 듯 다음날에도 물을 갈지 않았다 ⓒ 오문수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운전기사 바로 뒷자리에 앉아 사막을 바라보다 상념에 잠겼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보이는 건 자갈 사막과 이글거리는 햇빛에 아롱거리는 아지랑이뿐. 이 길을… 이 험한 길을 구도를 위해 걸었을 스님들. 과연 종교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무엇이 이 토록 험난한 길을 가도록 만들었을까? 극한의 고통을 넘으면 희열을 맛본다던가.

일행 대부분은 피곤해 잠이 들었다. 그때다. 자동차만 오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 리어커를 끌고 가는 한 노인이 보였다. 30도 각도로 몸을 숙이고 묵묵히 앞만 보고 뜨거운 아스팔트 자동차 길을 가지 않는가. 많은 짐을 싣지는 않았지만 같이 타고 가자고 권하고 싶은 마음이다. 사막의 열풍이 얼마나 더운가. 더구나 아스팔트길을. 착하게 생긴 기사도 그 노인이 끌고 가는 차 뒤에서 속도를 줄이고 조심조심 한쪽으로 비켜간다.

내 자동차라면 태우고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지평선 저 멀리 아스라이 산이 보이기는 한데. 가이드에게 노인이 저 속도로 가면 언제쯤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지를 물었다. "내일 오전쯤에요. 가슴 아프네요" 현대판 실크로드 리어커 상이 아닐까?         

 사막에도 물이 있을까? 끝없는 사막에서 만난 물과 풀
사막에도 물이 있을까? 끝없는 사막에서 만난 물과 풀 ⓒ 오문수

코를라는 온난기후대에 속하는 대륙성 기후이다. 건조하고 강수량이 적으며 고산지역은 봄, 가을로만 이루어져 있어 겨울과 여름이 없다. 평균기온은 11도 내외로 가장 추운 1월에는 영하 7.9도까지 내려가고 가장 더운 7월에는 평균 26도 정도이다.

실크로드의 천년왕국 쿠차

쿠차는 과거 천년 이상 지속되어 왔던 구자(龜玆)국의 수도였다. 전성기 때 지배 영역은 동쪽으로는 코를라, 남쪽으로는 타클라마칸, 북쪽으로는 천산 내지까지 뻗었다고 한다. 삼장법사가 남긴 <대당서역기>에도 이곳 사람들은 천성이 선하고 가무를 좋아하며 상업이 발달했고 불교가 융성했다고 한다.

한나라 때는 서역도호부, 당나라 때는 안서도호부가 쿠차에 생기기도 했지만 지역의 라이벌이었던 티베트 왕국에 의해 정복됐다. 쿠차에서 가장 유명한 것 두 가지는 향토 음악과 당도 높은 과일이다. 쿠차 외곽에 가면 주민들이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면서 곡물을 수확하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 구성지고 슬픈 느낌이 든다.

 이방인들이 방문한 모습은 아이들의 구경거리다
이방인들이 방문한 모습은 아이들의 구경거리다 ⓒ 오문수


 사내 아이들과 달리 부끄럼이 많은 여아가 살며시 문을 열고 내다보고 있다
사내 아이들과 달리 부끄럼이 많은 여아가 살며시 문을 열고 내다보고 있다 ⓒ 오문수

오아시스 육로의 북도에 자리하고 있는 쿠차는 동서 문명교류에 큰 기여를 했다. 그 여파는 이곳 한반도까지 미쳤다. 혜초와 고선지를 비롯한 우리네 선현들이 그곳에 발자국을 남겼다. 또한 그곳 악무가 우리 속으로 전해져 왔으니 우리와 오랜 인연을 맺은 곳이다.

신라 고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는 인도에 구법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727년) 당시 안서도호부가 자리한 이곳에 도착한 기록이 나온다. 쿠차는 기원전 1세기 전한 때에 이미 불교가 들어오기 시작해 서역에서 불교가 가장 흥한 나라 중 하나였다,

혜초와 동시대 인물로 한반도와 인연을 맺은 인물은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이다. 고선지는 안서도후부의 절도사가 되어 다섯 차례의 서역원정으로 파미르고원지역을 평정해 대당건설에 큰 기여를 했다.

고구려 고분벽화나 신라의 유물 중에는 쿠차와 공유하고 있는 몇 가지 문화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악무다. 서역악기에 속하는 5현이나 요고, 동발, 공후, 피리, 저, 소 등 악기가 고구려와 쿠차에 공통으로 등장한다. 북청사자놀이, 봉산탈춤, 통영오광대 같은 사자춤이 쿠차에서 전해 왔다고 한다.

키질가하석굴 - 화려했던 불교문화 중심지

'키질가하'는 위구르어로 '여인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들 석굴을 키질가하천불동이라고 한다. 쿠차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12㎞떨어진 곳에 위치한 키질가하 석굴은 4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61개의 석굴이 확인됐고 11개 벽화가 남아 있다.

이곳은 2천년 전 전한 때 한무제가 진출했던 길이며 서역북부 오아시스의 최대석굴이다. 당시 한무제는 이 지역을 지키기 위해 둔전병을 두고 관리했었다. 대부분이 방주형 석굴로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 27호와 28호 석굴은 스님들이 기거했던 요사채로 그을린 흔적이 있다. 뜨거운 사막인데도 내부는 시원해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약탈당해 없어진 불상 양옆으로 통하는 통로에는 자신이 모시는 사람의 그림을 그렸다. 1400년 전에 그린 그림이 변하지 않는 것은 도료가 광물질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4세기부터 8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키질가하석굴. 61개의 석굴에 11개의 벽화만 남아있다
4세기부터 8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키질가하석굴. 61개의 석굴에 11개의 벽화만 남아있다 ⓒ 오문수


24호 석굴 벽화에는 공후, 비파 등의 악기가 보이고 원숭이, 새, 사슴, 사람, 염소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어 부처의 공덕이 모든 생물에 미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기를 통하기 위해 뚫어 놓은 2층 창문을 통해 새가 들어와 똥을 싸 대책이 시급하다.

 키질가하 석굴 주변의 토질. 석회석이 부족한 사암이 완전히 굳지 않은 재질. 가볍게 손을 대도 손끝에 묻어나 석굴 작업이 용이함을 알 수있다
키질가하 석굴 주변의 토질. 석회석이 부족한 사암이 완전히 굳지 않은 재질. 가볍게 손을 대도 손끝에 묻어나 석굴 작업이 용이함을 알 수있다 ⓒ 오문수
어떻게 이런 사막에 석굴을 뚫고 살았는가 알아보기 위해 밖에 나와 토질을 자세히 보며 손가락을 가볍게 댔다. 가는 모래 성분이 손가락 끝에 금방 묻어났다. 이 지역은 바다 밑에서 융기한 사암성분에 석회성분이 부족하고 아직 바위로 변하지 않았다. 도구로 이용하면 석굴을 만들기가 용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키질가하봉화대

키질가하석굴을 나오면 바로 키질가하봉화대가 시야를 가로 막는다. 장방형의 기저부는 동서 간 길이 6m, 남북 간 폭 4m이다.  높이 15m에 달하는 봉화대는 흙벽돌을 쌓아 만들었다. 비교적 바람이 센 곳에 세워져 바람과 비의 침식작용에 의해 봉화대 남쪽이 움푹 패여 있다.

1400년 전인 한 대에 지어졌으며 한나라가 서역을 통치할 때 연락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당시 이 봉화대에 불을 붙이면 다음 봉화로 이어져 수도 장안까지 연결됐다.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불을 피워 위급함을 알렸는데, 사막 지역에는 불을 피울 나무가 없어서 건조된 늑대의 배설물로 불을 피웠다고 한다.

쿠차 최대의 이슬람사원 쿠차대사

쿠차대사는 신장에서 두 번째로, 쿠차에서는 가장  큰 이슬람사원이다. 16세기에 지어져 1918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7년에 완공했다. 면적은 1165m이며,  대예배당, 소예배당, 선예루, 망월루, 공정문루, 숙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장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사원인 쿠차대사
신장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사원인 쿠차대사 ⓒ 오문수

대예배당은 88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목조건축물로 신도들이 예불을 올릴 때 사용하는 곳이다. 사원 내부 정원의 남동쪽 구석에는 이슬람교 법정 유적지가 남아 있다. 예배당 안팎으로 약 5천명의 무슬림들이 동시에 예배를 올릴 수 있다.

수천리나 떨어진 곳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의 흔적. 그러나 폐허로 변한 역사의 현장이 가슴을 아린다.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와 '네통'에도 송고합니다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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